송은 과거를 통해 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과거 선발 인원의 확대는 많은 과거 준비생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새로운 사대부 계층을 형성해 송대 사회의 주역이 되었 다. 송 황실은 士大夫들의 宴會나 畜妓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취하였고 이는 사대부 와 歌妓의 만남을 촉진시켰다. 만남에는 歌妓의 노래와 연주가 있었고 여기에 맞춘 塡詞의 풍조를 탄생시켰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의 창작도 급속도로 늘어났 다. 숭문정책으로 과거급제자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늘어난 진사급제자 숫자만큼 같 은 시기 사 작품의 숫자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송사의 대표작가 30명을 분석해보면 사가 흥성한 북송시기 사인이 17명이다. 그 중 진사출신이 13명으로 76프로를 차지 한다. 인구에 회자되는宋詞三百首를 분석해 보아도 북송시기 진사출신 詞人이 60 프로에 달한다. 즉 송사는 숭문정책으로 인한 사대부계층의 확대와 그에 따른 도시 문화, 음악문화, 歌妓문화가 어우러져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RCEP will have a significant impact on ASEAN, China and other contracting parties, significantly enhancing the cooperative levels between ASEAN and other essential economies in the region. It can develop the manufacturing industry in ASEAN and China with higher quality. First of all, this study used the Strengths (S), Weaknesses (W), Opportunities (O) and Threats (T) (SWOT) model to analyze the specific impacts of China’s participation in RCEP on the development of ASEAN’s manufacturing industry. Subsequently, strategic recommendations were put forward for the high-quality development of ASEAN’s manufacturing industry under the RCEP cooperation mechanism from four aspects of SO,WO, ST and WT. As the signing of RCEP provides an excellent development opportunity, the ASEAN member countries should carry out deeper cooperation with China; create new strengths for high-quality development of the manufacturing industry; erect a closer regional industrial chain and the supply chain; and promote the realization of a higher level of regional economic integration between ASEAN and China.
점점 악화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직면 한 트럼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정하였으며, 단기간 안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수 없기에 아프가니스탄 테러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2001년 이후로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베이징과 워싱턴 사이에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대화나 협력 메커니즘이 없으며,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모든 주변의 국가들조차도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및 파키스탄 등 아프가니스탄의 인근 국가들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난민, 마약 및 테러리스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본 논문은 아프가니스탄 평화를 목적으로 중국과 미국이 서로 협력할 가능성에 대한 연구했다, 그리고 미래적인 번영(Future of Prosperity)을 구상해봤다. 또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로 중국의 노력은 아프가니스탄이 가능한 한 빨리 국제 사회의 도움과 협력으로 평화와 안정을 회복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공통된 관심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와 안정 회복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영국의 문화융성정책이 내포하고 있는 문화정체성과 세계화를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1990년대 영국에서 발현된 ‘창의산업’ 정책을 탐구하고 있다. 세계화와 정권 교체라는 국내외적 시대 상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영국의 문화융성정책은 내적으로는 전통과 현대 문화를 경제와 산업에 동원해 신경제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키고자 했고, 외부로는 영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미지 쇄신 및 국가 결속력을 높이고자 했다. 특히 영국이 가지고 있는 다문화주의적 문화 정책성은 세계화 시대 상당히 부합하는 정신으로 다민족의 역사를 통합해 이끌고자 했던 당시 정치 상황에서도 관심을 두었던 주제이다. 결국 영국적인 것을 공감하고 만들면서 공유할 수 있도록 문화 정체성을 강조했던 영국정부는 창의산업이라는 문화융성정책을 계획하며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그 지원 분야도 소설, 시 같은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 패션, 영화, 도서, 텔레비전, 스포츠 그리고 대중음악까지 이르렀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는 ‘쿨 브리타니아’라는 구호를 통해 전통과 현대 문화의 대중화, 상업화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유니언 잭은 대중에게 이전보다 더욱 개방되었고, 브릿팝에서는 영국의 문화정체성을 보다 강화시키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결국 문화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정책의 논리는 문화를 융성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부합되는 부분도 있지만, 대치되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하면서 창의산업 정책은 여러 가지 우려되는 상황을 낫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벌 문화 시장이 더욱 활발하게 교류·확산되는 세계화 시대, 문화융성정책은 문화 정체성을 지켜야 하면서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현명하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본 연구는 진주 승산마을에 세거하였던 능성구씨 문중에 관한 것이 다. 경화사족이었던 능성구씨 가문의 具槃은 18세기 처가인 김해허씨 의 세거지인 진주 승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들은 승산마 을에 세거하면서 한국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승산 마을에 입향한 능성구씨의 先系와 구반의 직계 선조, 그리고 구반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승산리에 세거한 능성구씨 집안은 도원수파에 속한다. 능성구씨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구치관과 구치홍 갈래가 현달한 관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승산마을 에 정착한 구반은 구치홍의 후손이었다. 구치홍의 가계는 왕실과 혼인 이 잦았고, 또한 두 차례의 반정 때에 正功臣에 책봉된 훈척가문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원종비 인헌왕후의 형제인 구사맹 집안이 조선 후 기 무반 벌열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승산리에 세거한 입향한 구반은 구사맹의 동생 具思閔의 직계손이 다. 구사민은 1578년(선조 11) 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구사민의 차남 具寭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아들 具仁至 와 함께 대북세력의 비판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었다. 구혜와 구인지 는 선조 말년에 재상이었던 유영경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비판하여 대 북세력에게 유영경의 당으로 낙인이 찍혀서 화를 입었다. 구인지는 정쟁으로 금고를 당했다가 사망함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 었다. 그렇기에 구인지의 차남 具崟은 10대 후반에야 외숙인 택당 이식 의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영릉 참봉이라는 음직을 받고 1652년 (효종 3) 문과에 합격하여 참상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정치적 공백이 길었고, 조부가 유영경의 당이라는 지목을 받았으며, 문관 관료 가문으로서의 기반이 아주 탄탄한 것은 아니어서 당상관으 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구음의 아들 具文游는 46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기 때 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양천허씨 부인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 는데, 그중 차남인 구반이 승산리 김해허씨 가문인 허륜의 사위가 되었 다. 구반은 승산리에서 연이어 세 아들을 낳고 불행하게도 30세에 사망 하였다. 구반이 일찍 사망하므로 허씨부인은 어린 아들들을 거느리고 승산리에서 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은 외가인 김해허씨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위에 힘입어 진주 주요 사족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진주 사족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구반의 자손들은 입신하기 위해서 儒業에서 武業으 로 전환하기도 하고, 계속 학문에 힘써서 생원진사시나 문과에 합격하 기도 하였다. 구반의 후손들은 직계 선대에는 무반 관료가 없으나 외가가 무반 가문이었고 방계친족이 세력 있는 무반 가문이었기에 무과에 합격하여 서는 무반 청요직인 무겸선전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구진검 같은 이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지역 사족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기도 하였다. 구연호는 일찍부터 경학 공부에 치중하 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 후 참하관 시절을 온전히 승정원 에서 보냈고, 6품으로 승진해서는 대간에 재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구 반 이후 5대가 지나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청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집안의 문지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승산리의 능성구씨는 세력 있는 무반 벌열 가문의 갈래는 아니었으 며, 정쟁의 화를 당하기도 하여 가세가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구반이 승산리의 김해허씨 집안과 혼인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승산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3세대가 지나도 록 기반을 닦아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한 노력이 지금의 승산리 능성구씨 가문을 있게 하였다.
본 연구는 태국에서 이문화인식과 학습동기를 통한 한국어교육 활성화를 위한 일련의 방안을 강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어교육에서 문화적 측면을 고려함은 문화 상호간 무슨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가 문화간 의사소통에 어떤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또 문화차이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 등을 규명하게 한다. 언어문화통합교육은 학습자 중심 교육은 물론 실제 자료의 사용으로 효과적인 과제 중심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언어학습에 있어서 이문화인식은 양국 문화의 특징을 상대성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학습자와 교사들은 의사소통적 기능뿐만 아니라 문화간 인식에도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어학습자의 학습동기 유발과 이문화인식은 학습자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우선 전략적 바탕을 두어야 한다, 더불어 한국어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양국 정부, 대학교 및 기업의 역할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