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후지이 겐지의 평화선과 어업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평화선이 독도 어장 보호, 영유권 강화를 위한 제도가 아니고 이것이 독도해역에서의 어업분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시마네현의 기선저예망어업이 효율이 좋기 때문에 연안어업 분쟁을 일으켜서 어업 규제를 강화하고 어장을 동중국해, 황해 해역으로 유도해서 더이상 시마네현 기선저예 망어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 어업 정책에 의해 시마네현 어민의 피해가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마네현에서도 동중국해, 황해 어업 지역에 이주하여 어업을 했지만 이 지역에서의 나포 어선 피해가 커지면서 평화선에 의한 피해 의식이 계승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독도주변해역은 일본의 오징어잡이 어선의 어장이 되고 1970년대가 되 면 한국도 동해 해역 어업을 본격적으로 참가하면서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 대립은 독도문제와 어업문제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도 주변해역은 일본과 한국양국에서 나라 전체 어획량으로 따져보자면 양국이 함께 논의해야할 정도로 중요한 어장은 아니라고 보고 있으며 1978년 5월 이후 한국이 독도 12해리 이내의 일본 어선의 조업을 단속하고 일본 어선이 자체 철수하고, 중유의 급등과 어업 자원 상황의 악화, 출어해도 채산이 맞지 않는 경우 등의 이유로 독도 주변 해역으로 출어하는 사람들이 대폭으로 줄어 전무한 실정이라 분석하고 있다. 또한 후지이 논문에서 동해지역 오징어잡이어업어획량에서의 독도 주변 비율을 보면 1970년대 일본의 어획량 수치는 한국의 어획량보다 2배 많았기 때문에 시마네현과 일본 어민의 피해보다 한국 어민의 피해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독도는 1946년 SCAPIN 677호에 의해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었고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에는 한국정부가 이미 독도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 통치권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며 강화조약에는 독도에 대한 아무런 규정도 없고 한국은 강화조약에서의 비조인국이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평화선은 트루먼선언(1945), 중남미국가들(칠레와 페루(1947), 산티아고 선언(1952.8))을 바탕으로 200해리 영해 또는 어업수역을 한국해역에 도입하였고 이런 배타적 어업수역은 1970년대 이후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일반화되었고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에도 수용되었다. 평화선은 맥아더라인을 승계하면서 국제적 선례들을 참고하여 한국 주권수역을 대외적으 로 선포한 것으로 국제법상 법적 타당성 및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 규범으로 보야 한다.
본고의 과제는 일본 시마네현 ‘죽도문제연구회’의 『제4기 최종보고서』에서 제시된 「죽도 문제에 관한 학습」 추진 검토부회의 활동을 개관하고 각급학교의 ‘학습지도안’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죽도문제연구회’에서는 이미 2005년 「죽도(독도)학습」 부회의 활동이 2009년부터 「죽도에 관한 학습」으로 이어졌으며, ‘제4기 죽도문제연구회’에서는 「죽도문제 에 관한 학습」으로 확장되어 학습지도요령 및 해설서의 동향을 반영하여 체계화하고 있다. 본고에서 검토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죽도문제연구회’의 활동에서 역사적 연구가 차츰 근현대 이후의 연구로 변화되고 있으며, 독도교육=「죽도문제에 관한 학습」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점차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제2기 최종보고서』의 독도교육=「죽도에 관한 학습」은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죽도문제에 관한 학습」으로 확장하였고, 검토부회가 조직되어 각급 학교급별 ‘학습지도안’을 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죽도문제에 관한 학습」 추진 검토부회의 ‘학습지도안’은 문부성의 개정 『학습지도요령』 및 『해설서』를 토대로 ①‘기능·지식’, ②‘사고 력·판단력·표현력’, ③‘주체적으로 학습에 임하는 태도’의 3가지 단계별 지도를 염두에 두고 그 내용에 체계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도문제에 관한 학습」 추진 검토부회 의 ‘학습지도안’은 교육부의 독도교육 방향 설정은 물론 관련지자체인 경상북도교육청, 대구 광역시교육청이 주도적으로 추진해야할 독도교육에 대해 많은 시사점과 방향성을 던져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독도교육 내용의 학교급별 체계적 구성뿐만 아니라 주입식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는 교과내용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독도/竹島에 관한 일본어 논문에서 연구자 간 논쟁이 치열하다. 특히 이케우치 사토시(池 内敏)와 쓰카모토 다카시(塚本孝)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양자의 견해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17세기 독도/竹島 영유권에 관해 ‘최근의’ 쓰카모토는 일본은 역사적 권원을 가졌다고 하나, 이케우치는 일본은 영유권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②쓰카모토의 ‘마쓰시마 도해허가’설에 대해 이케우치는 ‘폭론’이라고 결론지었다. ③다케시마(울릉도)도해금지령에 관해 쓰카모토는 마쓰시마(독도)로의 도해는 금지되지 않았다고 하나, 이케우치는 마쓰시마 도해 금지가 함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④이케우치는 1740년대 지샤부교(寺社奉行) 는 다케시마・마쓰시마 양도 도해 금제라고 인식했다고 하나, 쓰카모토는 의문시한다. ⑤덴포 (天保)다케시마 도해금지령에 관해 이케우치는 마쓰시마로의 도항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나, 쓰키모토는 문제없다고 주장한다. ⑥1877년 태정관 지령이 말하는 ‘다케시마 외 일도’의 비정에 대해 이케우치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라고 하나, ‘최근의’ 쓰카모토는 다케시마도 ‘외 일도’도 울릉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⑦1900년 칙령 제41호의 石島 의 비정에 대해 ‘최근의’ 이케우치는 독도인 것 같다고 하나, ‘최근의’ 쓰카모토는 이를 독도라고 하는 것은 한국정부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이케우치-쓰카모토 논쟁에서 이케우치의 논증은 충분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으나, 이를 박병섭이 보완했다. 이케우치의 쓰카모토 비판에 대해 쓰카모토의 반론은 약하며, 양자 간 논 쟁은 수렴될 기미가 보인다. 한편, 양자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독도/竹島가 일본 영토로 확정되었다는 견해다. 이에 대해 박병섭은 이 조약은 독도/竹島의 소속에 관한 어떠한 해석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이 섬은 국제법상 우티・포씨디티스 원칙에 따라 한국 소속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The term "inherent territory" is a dangerous political term. Moreover, in the current situation where the two countries are sharply confronting on Dokdo, there is a need to academically define the term ambiguous inherent territory and to restrain its use. This paper analyzes the usage and meaning of the term "inherent territory" and attempts to define it. It analyzes the claims of the territory of Korea and Japan according to their definition.
The reason why Korea made Dokdo Island its own territory was presented in Foreign Ministry pamphlet ‘Korea's beautiful island, Dokdo’, and "The Korean Government's view" to the Japanese government in the 1950s. If these are verified, it is not enough to justify inherent territory before the 17th century because it is vague the location of Usando island, or to confuse Usando with Ulleungdo in the Choseon History Book of [Taejong Silok]. The historical materials to be assessed as the basis of inherent territory is the [Chungwan-ji] and [Dongguk-munheon-bigo] published by government level in 18th century. These materials accept the testimony of Ahn Yong-bok, who visited the Usando island at the end of the 17th century and insisted that the island of Usando is Japan's Matsushima, and revealed his will for the territory right on Usando island. The legitimacy of Ahn Yong-bok's testimony is confirmed in the Official Document, [Genroku Memorandom] of Japan.
However, since the exact location of Usando Island was not recorded in the government publicati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Ulleungdo prosecutor and residents did not know the location of Usando Island, and Usando Island became a legendary island. On the other hand, Jeolla province fishermen who entered Ulleungdo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found Dokdo Island, called it 'Dolseom Island' or 'Dokseom Island', and occasionally hunted sea lions there. This island was recorded as ‘Seokdo(Rock island)' in the Korean imperial edict no. 41 of 1900. This “Seokdo” sign changed to "Dokdo," but the Korean empire's “Seokdo” or "Dokdo" declared intention to enter the country as an important basis for its own territory.
On the other hand, the basis for claiming Takeshima (Dokdo) as Japanese inherent territory is not presented in the [10 points of Takeshima Issue] in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pamphlet, and was presented only in the "Japanese Government View" sent to the Korean government in 1953-1962. At this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View" presented 12 documents on the basis of its own territory, but none of them reveal that Japan has a doctrine of territory on Matsushima (Dokdo). This can be inferred from the fact that the previou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brochure did not cite any of the twelve materials. In the end, before 1905, only the Chosun and Korean Empire governments were willing to treat Dokdo as territory, so Dokdo can be claimed as Korea's inherent territory.
고유영토라는 말은 위험한 정치 용어이므로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독도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한・일 양국에서는 모호한 고유영토라는 말을 학문적으로 잘 정의하고 올바르게 쓸 필요가 있다. 본고는 고유영토라는 말의 용법이나 의미를 분석하고 그 정의를 시도한다. 또한 그 정의에 따라 한・일 양국의 고유영토의 주장을 분석한다.
한국 정부가 독도를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외교부 팸플릿 『한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및 1950년대에 일본 정부로 보낸 「한국정부견해」에서 제시되었다. 이들을 검증하면 17세기 이전 사료들은 우산도의 위치가 모호하거나『태종실록』처럼 우산도와 울릉도를 혼동하는 등 고유영토의 근거가 충분치 않다. 그 근거로써 평가할 수 있는 사료는 18세기에 작성된 관찬서 『춘관지』나 『동국문헌비고』등이다. 이들 사료는 17세기 말 독도를 실견한 위에 조선땅인 우산도(자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松島)라고 주장한 안용복의 증언을 수용하고,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를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의 영토 인식의 정당함은 일본의 공식 문서 『겐로쿠 각서(元祿覺書)』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우산도의 위치에 관한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그 소재가 모호하게 되고, 19세기 말 울릉도 검찰사나 주민들은 우산도의 위치를 몰랐으며, 우산도는 전설의 섬으로 되어버렸다. 한편 19세기 중엽 울릉도로 들어간 전라도 어민들은 울릉도 동쪽에 바위섬을 발견하고, 이를 ‘돌섬’이나 ‘독섬’으로 부르고 때로는 강치잡이를 하였다. 이 섬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石島’ 표기로 기록되었다. 이 표기는 ‘獨島’로 변했으며, 대한제국이 獨島에 영유 의사를 가진 것은 ‘심흥택 보고서’ 등에서 분명하다.
한편 일본이 독도를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외무성 팸플릿 『다케시마 문제 10의 포인트』에는 없으며, 1953-1962년에 한국 정부로 보낸 「일본정부견해」만에 제시되었다. 이 견해서는 고유영토의 근거로써 12개 사료를 제시했으나 이 중에 일본이 마쓰시마(松島, 독도)에 영유 의사를 가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료는 하나도 없다. 이는 앞의 외무성 팸플릿이 12개 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1905년 이전 조선・대한제국 정부만이 독도에 대해 영유 의사를 가졌으므로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일본에서 말하는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서 죽도(독도) 활용실태에 대해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했다. 일본정부가 죽도(독도)의 활용실태를 주장함에, 오키섬에서 죽도(독도)로 직접 가서 어로로서 죽도(독도)를 활용한 사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죽도(독도)의 활용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처음 등장한 1640년대 이후의 문헌들을 검토해보면, 울릉도와 세트로 활용됐다고 제시되어 있다. 항해 기술의 문제로 20세기 초엽에야 이르러 비로소 오키섬에서 울릉도로 직접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도(독도)는 한국의 울릉도와 일본의 오키섬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두 개의 큰 섬을 연결하는 동선 상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그 점에 유의한다면 죽도(독도)를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죽도(독도)의 특성을 무시하고 그 동선 상의 어느 한쪽만 갈라놓아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도문제연구회의 좌장격인 시모조 마사오(下条正男)는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칙령41호 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石島)」에서 석도는 독도가 아니고 지금의 「관음도」라고 하여 사실을 날조했다.
첫째, 『조선어사전』에서 「독(獨)」이 돌(석)의 사투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올바른 해석을 일부러 피하고, 「단독(單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부분을 적용하여 칙령의 석도는 독도가 될 수 없다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한다. 둘째, 시모조는 일본의 고문헌 니이타카호(新高号) 군함일지에는 1904년 울릉도에서는 독도라고 기록 하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논증을 거부하고 1904년경에 울릉도사람들이 독도에 들어가서 강치를 잡았는데, 그때의 울릉도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갔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셋째, 시모조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지금의 죽도를 우산도로 잘못되게 비견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1900년에 발령된 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에서 「석도」는 지금의 「관음도」라고 주장한다. 그는 광여도와 청구도가 수토사 박석창이 잘못 그린 「울릉도도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비논리적으로 함부로 사실을 날조했다. 넷째, 1900년에 발령된 칙령 41호의 「석도」는 울릉도 사투리로 돌섬을 「독섬」라고 하는 것을 문헌상 표기로 「독도」라고 기술하였다는 것은 1904년 의 일본군함 니이타카호가 증명하고 있고, 심흥택 군수가 1906년 “본군 소속 독도(獨島)” 라고 표기했던 것으로 명확하다. 그런데 시모조는 침략적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정당화 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날조했다. 이처럼 죽도문제연구회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영토내셔널리즘에 의한 침략행위이다.
이 논문은 금년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이 이른바 ‘죽도의 날’ 행사에 맞춰 발행한 『竹島問題 100問 100答』 책자에 대해 모순을 밝히는데 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 은 이 책자를 통해 독도가 일본 땅 임을 일반 성인은 물론 초중고등 학교 청소년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발행했다. 책자내용은 한국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첫째, 본래 한국 측에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역사적인 권원이 없으며, 한국 측의 논리를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검증했 을 때 정당한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 1905년 독도편입은 메이지 정부 에 의한 영유의사의 ‘재확인’이자, 근대 국제법상으로 유효하고 적법한 행위였음을 강조하 고 있다. 그리고 셋째, ‘고유영토론’과 ‘무주지선점론’을 융합시켜 논리적 충돌을 제거하려 했던 노력이 강화된 형태로 반복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독도를 ‘무주지’로 규정하는 표현 자체를 자제하려는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이 책의 이러한 논리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에 대해 사실에 입각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동시에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이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18세기 울릉도・독도로 건너간 어민들은 전복 진상지 어민들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양 항로 중심지에 위치한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초도・손죽도어민들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항해기술을 이용 하여 전국을 무대로 중개지 무역을 하며 울릉도・독도에서 생산된 어획물을 전국에 유통시켰다. 이렇게 18세기부터 울릉도・독도어장 으로 건너간 전라도어민들의 어로 활동은 여러 가지 자료에 확실 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주지선점론을 근거로 대한 제국 칙령 41호의‘석도는 관음도이거나 독도는 아니다’라고 주 장하고 있다. 시마네현 죽도문제연구회에서는 1903년 독도에 갔다고 하는 나카이 요사부로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나카이의 독 도 인식을 연구하였고 이케우치 사토시는 울릉도인들의 어업활동 을 검토하여‘울릉도인들은 독도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석도는 독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케우치의 경우‘석도는 독도 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기 이주한 경상도어민의 어로 활동을 염두에 두고 울릉도로 건너간 전라도어 민들의 어로 활동을 배제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라도 어민들은 개척기 울릉도에 이주한 주민들과 어떤 교류도 없었고 독도의 전라도 방언‘독섬’이 울릉도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려 하였다. 이것은 죽도문제연구회가 고지도연구를 통하여 석도를 울릉도 주변의 관음도라고 주장하여 자기모순에 빠진 것처 럼, 개척기 조선인들의 어로 활동을 연구하면서 전라도어민들의 어업 활동을 배제함으로써 동일한 모순에 빠지고 있음을 알 수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