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

        1.
        202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as conducted to investigate the dietary adaptation and use of the university foodservice (UF) in Korea according to the residence period of foreign students. The average length of residence in Korea of t he subjects was 8.2 months. The period of residence was divided into quartiles: 1-4 months in the first quartile (average 2.2 months), 5-7 months in the second quartile (average 6.3 months), 8 months in the third quartile, and 9-66 months in the fourth quartile (average 18.3 months). The regularity of meals tended to be the highest in the 1st quartile and lowest in the 2nd quartile and then increased in the 3rd and 4th quartiles. The frequency of consumption of delivery food and convenience store food was lowest in the first quartile and highest in the second quartile and then decreased with the period of residence. The frequency of night eating increased according to the period of residence after the second quartile. The degree of adaptation to Korean foods was highest in the first quartile. The use of the university cafeteria was significantly higher in the 1st and 4th quartiles than in the 2nd and 3rd quartiles (p<0.05, p<0.01, respectively). The satisfaction with the UF decreased as the residence period increased. Based on these results, since international students are very positive and try to adapt to the dietary life in Korea in their early years of studying in Korea, it would be desirable to intensively support them to adjust to their dietary life at this time. In addition, since it takes about 18 months or more to assimilate the Korean food culture and show positive changes, it is necessary to continuously operate the Korean food culture adaptation 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s over this period.
        4,500원
        3.
        2013.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李憲明이 제자의 눈으로 바라본 龍山 시절 스승 臺山 金邁淳의 일상 과 학문을 추적하였다. 대산은 1806년 伯從兄 金達淳의 獄事로 관직이 삭탈되었을 뿐 아니라, 1817년 에는 金基敍의 陰祀 사건에 연루되어 상당한 고초를 겪는다. 이는 평소 말수도 적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성격에 일처리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 지 않을 정도로 주도면밀하지만, 빈궁한 사람을 도와주느라 녹봉조차 부족했을 정 도로 남에게 관대했던 성품 탓이기도 하다. 대산은 외동딸이 非命橫死하고 善根을 양자로 들인 이후에도 1년 넘도록 기녀 의 몸에서 후사를 바랄 정도로 핏줄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그 바람도 물거품이 되자, 선근의 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만큼 기대가 남달랐다. 심지어 淸襟樓詩會를 베풀고 李碩章과 이헌명을 선생으로 맞아 가르칠 정도였다. 또한 대산은 세도정권에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인재 등용과 권력 전횡에 시종일 관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托物寓意한 詩로 세도정권의 부조리와 폐단을 풍자․비판하는 한편, 「治國大經十策」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는 正祖의 각 별한 총애와 은혜에 대한 대산 나름의 보답인 셈이다. 이헌명은 제자의 눈으로 대산의 일상과 교유는 물론이려니와 학문과 저술에 이 르기까지 많은 정보를『西淵聞見錄』에 포착한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알려지 지 않았던 대산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8,000원
        4.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우리나라 불교수용에 따른 토속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 해 연구되어 왔지만, 山寺의 확산으로 인한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및 그 연관성 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산지 사찰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토속적 산신신앙과의 갈등 및 극복, 그 리고 통일 이후 화엄 신앙의 정착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보살주처신앙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신앙이 대중화됨에 따라 왕경 근처의 평지에 사 찰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山地에도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 현상은 지방으로 까지 번져갔다. 그 과정에서 山寺의 승려와 토속의 산신 숭배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불교신앙이 산신신앙을 압도하였고, 산은 불교신앙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통일 이후에도 왕실에 의한 山神祭는 계속되었고, 전국의 名山을 三山‧五岳‧二十四山으로 나누어 大祀‧中祀‧小祀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불 교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名山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불교의 기도처를 전국에 확대하였다. 이는 왕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신라불국토 의 염원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화엄신앙의 한 형태인 보살주처신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에 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 고 그러한 염원이 더욱 확대되면서 산에는 磨崖佛이 새겨지고 새로운 불교설화 가 만들어졌으며, 더 많은 산에 사찰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 이 흐르면서 산 이름이 사찰명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사찰명이 산 이름으로 바 뀌기도 하면서 산에 불교적 신비성이 가미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