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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8세기 모라비안 공동체는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었는데, 특히 북미 원주민 선교에 있어서 데이빗 자이스버거(1721–1808, 독일식 발음은 다비트 차이스베르거)는 60여 년간 델라웨어족과 여러 부족들 가운데 거주하며 모라비안 선교의 대표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의 선교는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의 고난과 피의 속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선교이다. 둘째, 델라웨 어어, 모호크어, 오논다가어를 습득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번역하며 원주민 언어와 문화 관습(왐품, 친족 호칭 등)을 존중한 언어·문화적 접근이다. 셋째, 소그룹 대화(Banden)와 생활적 교류를 통해 깊은 신뢰와 영적 교감을 형성한 공동체적 방식이다. 이러한 모델은 동시대 의 문명화 선교 혹은 동화주의적 선교와 달리 원주민의 주체성을 존중한 점에서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한 선교사 가 아니라, 원주민과 함께 “살아간 동반자”로서 그들의 언어와 삶 속에 복음을 심은 인물이었다. 본 연구는 자이스버거의 선교를 통해 18세기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북미 원주민 선교의 역사와 그 독창성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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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5.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가 한국사의 전체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부 분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한국사 연구의 심화와 지방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 조선시대 지방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논문 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9세기 조선시대 전라도 무주부라는 지방 군현의 실제 모습을 홍등중기라는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다. 19세기 조선에서 크게 알려 지지 않은 지방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사료의 부족이다. 그렇 기에 본 연구는 홍등중기라는 사료를 통해 그 실태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작성 당시의 지방 군현의 실태를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중기(重記)이다. 특히 이 자료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두 가지 내용에 주목하였다. 첫째는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중요했던 지방의 군비(軍備) 관련 내용이다. 둘째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교방(敎房)과 교방청 물목(敎坊廳 物目)에 대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19세기 조선의 지방 군현이었던 전라도 무주부의 군비 실태와 교 방 문화의 실상에 다가서고자 하였다. 또한 이 중기 자료를 중심으로 각종 관찬 자료와 읍지(邑誌) 등의 자료를 통해 19세기 조선 전라도 무주부라는 지방 군현의 실체에 접근하 고자 노력하였다. 이 연구가 한국 지방사를 이해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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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의 16세기는 유교화의 진전이 상당히 발전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지난 1세기 동안 조선에서 유교의 정착을 위해 양반 관료와 사대 부 그리고 유생들이 국왕과 왕실과의 논쟁으로 얻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의식의 유지와 관련하여 유교 성리학을 정치철학으로 표방하 는 사대부로 대표되는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왕과 왕실에서 여전히 고려 의 불교적 관습과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15세기의 유교와 불교의식의 대립은 국왕과 왕실로 대표되는 힘과 유교적 소양을 갖춘 힘 들 간의 간접적 대립양상으로 펼쳐졌으며, 결국 국왕과 왕실이 양보를 하 는 선에서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종대의 기신재 혁파와 수륙재의 폐지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 으며, 명종대와 선조대에도 계속해서 존속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성리학 을 공부하는 유생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예 (禮)의 논리를 펼치면서 계속 지속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16세 기 유・불 의식의 갈등 상황에서 불교계의 입장이 분명하게 기록된 문헌 을 찾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실제의 의식집 혹은 불교 의례문으로 알려 진 청문(請文)의 존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불교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 게 된다. 청문이란 오늘날 불교 의식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佛)·보살 (菩薩)을 청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청문의 방법과 내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식(法式), 의식(儀式)의 절차, 진언(眞言) 등을 수록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선조7년(1574) 안변 석왕사에서 개판한 목판본을 중심 으로 청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자료를 통해 16세기 유・불 의례 의 갈등에서 불교계는 종국적으로 불보살에 대한 공양(供養)과 조사와 영 가들을 위해서는 영반(靈飯)과 시식(施食)을 반영했다는 것을 살필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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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s to construct a corpus of 17th-century Korean personal letters, classifying them into royal and aristocratic (yangban) correspondences, and to compare their linguistic features through quantitative analysis. Based on a total of 285 letters—including 「현풍곽씨언간」, 「숙명신한첩」, 「숙휘신한첩」—the 17th Century Eongan Corpus was developed with detailed morphological analysis and lemmatization. The findings reveal that yangban letters tend to utilize practical and colloquial expressions, whereas royal letters demonstrate a more written style with enhanced forms of greeting and ritual politeness. Distinct differences were observed in pronoun usage, speech levels, sentence endings, and adjectives. Furthermore, phonological changes and dialectal vocabulary appeared more frequently in yangban letters, whereas royal letters maintained linguistic conservatism. This study contributes a new methodological approach to the field of historical Korean linguistics by providing a structured corpus and employing corpus-based analysis to elucidate stratified stylistic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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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한민국 정부들은 복지국가를 시대적 과제로 천명하고 있음에도, 낮은 복지 지출과 높은 사회적 불안이 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복지국가 ‘체제’의 기획을 제안 하며, 그에 필요한 관점과 방향성을 얻기 위해 복지국가이론의 계보를 탐색한다. 먼저, ‘전후 복지국가’의 팽창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고찰하고, 복지체제론을 통해 그 성숙과 위기 대응 양상도 살펴본다. 다음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환경에 조응하여 진행되는 복지국가의 재구조화, 즉 ‘탈(脫) 전후 복지국가’의 등장을 설명하는 현대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이렇듯 복지국가이론의 계보를 살피는 것은 현행 제도의 구 조와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미래 기획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이자, 대한민국이 사회권적 기본권이 적 극 구현되는 나라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적 토대를 쌓는 일이라고 본 논문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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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새로운 제작 경향을 확인하고 수륙재 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15세기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두 가지 주요 경향이 주목된 다. 첫째,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중대형으로 제작되어 주불전의 중심 존격으로 조성되었다. 이 는 아미타여래삼존이 당시 신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대세지 보살과 함께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여래삼존상이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는 당시 불교 의례와 신앙에서 지장보살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수륙재는 망자의 극락왕생과 산 자의 현세안녕을 기원하는 두 가지 핵심 목적을 지닌 불 교 의례였다. 이는 15세기에 간행된 天地冥陽水陸雜文과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의 제목에서 하늘[天]과 땅[地, 지옥], 영혼의 세계[冥], 사람의 세계[陽]를 모두 아우르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천지명양수륙잡문에는 아미타여래삼존과 정토를 상징하는 변상도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지장신앙과 관련된 소첩을 통해 지장보살의 역할도 강조된다. 이를 바탕으로 15세기 후반에는 아미타ㆍ관음ㆍ대세지 삼존상뿐만 아니라 명부의 권위자인 지장보살이 극적인 요소를 더하며 아미타ㆍ관음ㆍ지장 삼존상 역시 중대형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수륙재를 위해 아미타여래삼존상을 조성한 사례로 보은 복천사와 강진 무위사가 주목된 다. 복천사는 1451년 세종의 수륙재를 위해 아미타ㆍ관음ㆍ대세지 삼존상을, 무위사는 1478년 수륙사 중창을 위해 아미타ㆍ관음ㆍ지장 삼존상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15세기 후 반에는 수륙재를 거행하면서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모 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 아미타여래삼존상은 수륙재 성행과 맞물리며 전각에 봉안되는 중심 존격으 로 조성되었다. 그동안 현존하는 사례의 부족으로 주목받지 못한 조선 전기 불상의 조성배경 과 현상 변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선 전기 불상을 보다 심도 있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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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about the characteristics of the supply of woo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of Sannung construction.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Sannung construction cannot be planned and determined, and the construction must be completed within 3 months. Due to these characteristics, the supply of wood is also different from that of general construction. First, the method of directly logging and obtaining was minimized. Instead, they received timber from a private timber dealer. In the case of logging, considering transportation, it did not leave Hwanghae-do, Gangwon-do, and Chungcheong-do, where the distance was as close as possible. In addition, wood stored by individuals or the government was used as much as possible rather than logging, and in the 18th century, there were many cases of logging around royal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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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Hyeonpung Gwakssi Eongan」 (A collection of Korean letters)is of 176 letters. Of 176 letters, 83 letters are about dietary which are 47.16% of the total letters. In 83 letters of dietary, there are records of rice, glutinous rice, barley and buckwheat, and also yeast, malt, flour, wheat bran. For poultry and meats, there are beef, raw & dried pheasant, chicken, quail and other birds. For fish and shellfish, there are sea fish such as cod, herring, croaker, flatfish, and freshwater fish such as crucian carp. For main dish, there are cooked rice, porridge, noodles and dumplings. For side dish, there are soup, grilled dish, nureumi, stir-fried dish, steamed dish, fermented fish, raw fish, jaban and chimchae. For rice cake, there are ancestral rites cake, sanseung, gyeongdan, ssookddeok. In「Hyeonpung Gwakssi Eongan」, Ju Gwak instructed food preparation, grocery shopping, recipe, guest-welcoming, housekeeping, making bed, transportation, curfew for his kids and clothing for his wife one by one. Furthermore, there are records of dietary lifestyle of spring season and the month of November in lunar calendar. Lastly, there are birthday ceremony, coming of age ceremony, wedding ceremony, funeral ceremony and ancestral rites ceremony according to Confucianism ideal and their food rec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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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20세기 초 일본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설립되었던 속성교육기관들은 이들의 ‘문화자본’ 획득에 있어서 복합적인 ‘장’ 구조를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교육 ‘장’은 유 학생들의 제국대학 입학에 필요한 ‘문화자본’이 ‘재생산’되는 ‘장’으로 기능했다. 즉, 이들의 ‘문화자본’은 일본 학교 ‘장’을 중심으로 일본 국내사회 ‘장’과 중일 양국의 국 제사회 ‘장’의 중첩되는, 또는 포괄적인 교집합의 접점에서 작동되었다. 이러한 복잡 한 ‘장’ 구조에서 경제적 ‘장’의 논리는 타 ‘장’들을 점차적으로 포위해 가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부르디외가 모든 자본의 근본은 경제적 자본에 있다고 주장했던 바 와 같이 ‘경제자본’이 ‘문화자본’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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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은 해도 제작에 있어 가장 앞선 나라 중 하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는 영국 수로국 제작 해도가 세계 표준해도로 인정받았다. 영국 해도상에 한반도와 주변 바다는 1855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기재 정보가 확충되어 갔다. 이 연구는 1876년부터 1907년 까지 작성된 영국 해도 2347번에 나타난 한반도 해안선의 변화 및 지명 기재 양상을 1876년, 1885년, 1891년, 1907년에 작성된 총 4개의 해도에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해안선의 경우 1876년의 경우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 서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변경되었고, 1885년의 경우 동해안 해안선이 동쪽으로 이동한 점, 1891년의 경우 전라도 및 충청도 해안에서 많은 변화가 확인되었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해안선 이 현재의 해안선과 매우 유사함을 확인하여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한반도 및 주변 바다에 기재된 지명의 경우 기재된 지명의 개수가 1876년에 341개, 1885년에 415개, 1891년에 431개, 1907년에 244개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해도인 까닭에 해안 지형과 관련되는 자연지명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인문지명의 비중도 적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1907년 해도가 완성단계에 이르러서는 인문지명이 대폭 감소한 점 또한 특이점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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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활동을 시작한 시기, 주로 1890년대에 이루어진 불교와 개신교의 만남을 다룬다. 1880년대 말 한국에 처음 들 어온 서양인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거주했던 서울 도성 내에서 사찰을 볼 수 없었기에, 한국은 종교 없는 나라라는 선입관을 한동안 유지했다. 1890년대 들어 활동 반경이 서울 근교로 확장하자, 선교사들은 도성 바 깥에 있는 살아있는 불교와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는 머릿속에 있 던 우상숭배 관념을 불교를 통해 재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의 불교는 퇴락한 전통이고 승려들은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불교와 개신교 선교사의 만남은 의외로 휴양의 맥락에서 이루어기도 했는데, 그들이 삼막사에 머문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다. 한 달 이상의 만남과 접촉은 친밀함의 형성, 상대방 의례에 대한 면밀한 관찰로 이어졌 다. 한편 한국 전통에 다른 태도를 보인 성공회 선교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사제직과 수행 공동체를 존중하는 교단에 속했기에, 불교에 서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는 불교에 관한 부정적 관념이나 선입관에서 만남을 시 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공간 내에서 몸과 몸이 만나는 현실 속의 만남은 상호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 이 만남의 기록은 조선 말기 한국 불교의 어려운 현실을 증언해 주는 생생한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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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하멜보고서』의 ‘1660년, 1661년, 그리고 1662년’에 실려 있는 ‘종교’ 부분에 대해석 작업이다. 이는 “데 스뻬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하여 불시착한 후 1666년 9월 5일까지 조선에서 경함한 것의 기록을 활용하고 있다. ‘종교’부분 기록 내용은 17 세기 조선의 불교와 의례, 조선 승려와 계율, 불교와 사찰 교육 그리고 불교 건축과 사원 관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불교의 식에 대한 유자들의 인식과 불교가 백성들의 죽음의례에 여전히 깊이 간 여하고 있고, 평소 그들이 절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상주권공이나 수륙재가 설행되는 풍경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생태적 음식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나 자신들의 조상을 위한 의례가 행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이 교육기능은 물론 사회복지기능도 하며 사찰의 고아들에 의해 사자상승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살펴보았 다. 또 불사의 권선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한 귀중 한 민족지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17세기 중엽 조선의 종교생활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사람이 쓴 최초의 조선에 대한 민족지(ethnography)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17세기 중엽 이후 일어나고 있었을 법한 조선의 유교문화의 전개양상과 견주어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불교와 불교 의식을 폐지하려는 유자들의 권력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서 민중들이 어 떻게 불교와 불교적 세계의 신앙을 영위했을까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실상은 청허당 서 산대사 휴정의 염불문과 의문(儀文)이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소비되는 맥락을 깊이 있게 천착할 수 있는 실증자료라고 생각된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전개될 조선 후기 유교의 종법질서에 입각한 『주자가례』와 문 중(門中)의 문화와 대비하여 개인과 가족, 각 마을의 민중들이 당면한 문 제를 해결하려는 종교적 실천행위에서 불교의례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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