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a basic study of further investigating the effect of oceanographic conditons, such as bottom profile, currents, and temperature, to the fish migrating course around the set-net. The survey was held at Dojang Po, southern part of Geoje Island, from July to October in 1985. There was a sea valley of which depth was 20 to 40 meters around the set-net. Near the bottom of that sea valley, there was different current pattern to the upper layer. In the sea calm condition of July and October, the vertical profiles of current and water temperature were simple. But in rough condition of September, they were complicated because of wind tuburance.
Schooling behavier to a fishing gear and estimation of the volume of fish school in set net have ~ been studied by making use of such techniques as visual observations, underwater cameras, under- water televison. However, all of these observation techniques are subject to restrictions caused by illumination, underwater visibility, underwater transparent and sea conditions. For the above mentioned reasoa, one of the most effective method by this time become generally known a method using fish finder. In this paper, in order to control the fishing ground of set net effectively and to develope the telemetric fish finder, the experiments for the target strength, underwater shape of fishing gear, schooling behavier and volume of fish school with fish finder were performed at Galgott fishing ground of set net located Keouje Island, 15th-24th July and 18th-20th October in 1985. The results of these experiment showed that a method using fish finder in fishing grOlllld of set net is available for estimating distribution and school size, fish behavier in relation to a fishing gear and underwater shape of fishing gears.
최근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국가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대외 선전이 국가적,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동시에 대외 선전 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중국 특색이 있는 작품 등을 번역하는 사업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대외 선전 번역은 국가 이미지 구축과 언론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중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소개하고 ‘중국 문화 해외진출’ 전략을 실시하는 데 추진력이 된다. 중국에서 대외 선전 번역은 중국의 이야기와 중국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담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한다. 현재 외국에서 국제 이슈에 대한 중국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하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중국어로 발언했기에 중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해야 한다. 본 연구는 중국 지도자인 시진핑 주석의 발언, 담화, 강연, 지시, 서신 등을 담고 있는 『시진핑 국정운영을 말하다』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수사학 시각에서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는 시진핑 주석이 수사적 특징을 가진 중국의 고전 시문, 속담, 고사성어 등을 인용하고 비유법 등 수사법을 사용하므로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국어 번역문을 분석한 결과 역자가 직역, 의역, 첨가, 생략, 한자 표기, 바꿔 번역하기 등 번역 방법을 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를 통해 앞으로 『시진핑 국정운영을 말하다』를 비롯한 우수 작품들이 번역되어 한국과 문화 교류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손중산(孙中山) 선생은 중국 근대 민주혁명의 선구자로서 민주혁명에 그의 일생을 받쳤다. 그는 중국 근대화 시기 민주혁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화와 정치제도를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정치사상을 형성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삼민주의(三民主义)를 창안하였다. 손중산(孙中山)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三民主义)에서 비롯되었으며, 삼민주의(三民主义)는 다년간의 민주혁명운동의 과정에서 그의 혁명강령이 된다. 손중산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하에 서양의 삼권분립체제를 한 단계 발전시킨 오권분립체제의 민주공화제도를 중국에 도입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손중산이 주장한 오권헌정(五权宪政)이다. 이는 헌정(宪政)을 민주정치의 기초로 삼고 국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여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인명진 목사의 정치참여 활동을 11번으로 구분해서 분 석했고 끝으로 그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검토했다. 인명진은 1970년대 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 인권과 권익을 대변했고 네차례 감옥 생활을 했 다. 1980년대 인명진은 강제 추방되고 외국에서 다양한 혁명 사례를 분석 했고, 정치 혁명이 아닌 신앙에 근거한 인간 변화의 공동체 운동을 대안으 로 생각하게 됐다. 1982~84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극좌로 이념화되어 인명진의 사상은 개량주의로 비판받는다. 1986 그는 민주화운 동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지도자 김영삼과 가까운 관 계를 맺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것이 훗날 보수 정당과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하에서 그는 목사의 정체성을 지키면 서 행정개혁과 KBS 이사직에 참여했다. 2006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부 정부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윤리위원장직을 맡아 부패한 정치인을 징계하 는 개혁에 참여했으나 정치구조를 바꿀 수 없는 한계를 경험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된 이후 새누리당에서 97일 동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탄핵을 수용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헌정질서를 따라 당에서 대통 령 후보를 배출하고 그 직을 사임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큰 비 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활동을 기독교 목회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겼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보수 진보를 떠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했다. 한국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진보적 사회운 동을 했던 목사가 보수 정당을 대표해서 비상대책활동을 한 것은 아주 특 이한 정치참여 경험이다.
본 연구는 한국사회의 ‘인정의 정치’의 일면을 교육감 선거의 공약 측면에서 관찰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2014년과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 어떤 후보 자가 다문화 관련 공약을 제시했는지 검토했다. 후보자 130명의 공약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다문화 공약은 후보자의 정치적 진영이나 출마 지역의 특수성을 떠나, 높은 당선 경 쟁력을 갖춘 후보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제시되어 온 경향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결 과는 선거 후보자와 유권자를 ‘정치 시장’의 ‘합리적’ 참여자로 간주하는 ‘행위자 중심적’ 시각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대신, 후보자의 공약 제시가 상당한 정도로 ‘적 절성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을 강조하는 ‘제도주의’ 가설과 부합한다. 교육감 선 거에서 다문화 공약은 높은 제도적 ‘정당성’을 갖춘 ‘적절한’ 정책 의제로서 주요 후보자들 을 중심으로 제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과 내용적인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당시 같이 채택한 대한장로교회 신경과 함께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에서 노회를 위한 규칙과 부칙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합공의회의 회원들은 곧 설립하게 될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감당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유로 좀 더 간단한 형태의 규칙을 채택했다. 이렇게 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에 나타나는 장로교 정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존직을 장로와 집사 두 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했다. 둘째, 당회, 노회, 총회 등 치리회를 매우 수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교회직원을 항존직 중심으로 규정하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영수, 조사, 전도부인, 전도사, 권서 등에 대한 규정은 미비했다. 넷째, 별도의 예배모범 없이 간결한 주일 예배 형식만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시찰위원회와 같이 현장에 필요한 독자적인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정치체제를 따르면서 1907년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을 고려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
본 연구는 개표방송 정보 디자인을 영화·드라마 패러디형과 인물수치형으로 분류하여 수용자 태도에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고, 정치효능감에 의해 조절효과가 있는지 분석하였다. 또한 수용자 태도가 정치참여의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영화·드라마 패러디형이 인물수치형보다 수용자 태도가 높게 나타났다. 정치효능감의 조절효과를 분석한 결과 정치효능감이 낮은 집단은 인물수치형 보다 영화·드라마 패러디형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정치효능감이 높은 집단에서는 영화·드라마 패러디형과 인물수치형에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용자 태도는 정치참여의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수용자 태도가 높으면 정치참여의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표방송 정보디자인은 정치효능감에 따라 수용자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과 수용자 태도가 정치참여의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은 이론과 실무에 유용한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본 논문은 17세기 후반기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음악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음악후원에 내재했던 정치적 수단의 측면을 조명한다. 스웨덴의 왕좌에서 내려와 가톨릭으로 개종한, 하지만 늘 정치적 야심가였던 여왕은 로마에 입성해 아카데미를 서둘러 열고 그 아카데미의 ‘주인장’으로서 정치적 공간의 중심에 섰다. 그렇게 군주로서의 권위 및 지위를 유지하고 정당화했으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음악을 동원했다. 따라서 여왕의 후원에 힘입은 작품들 곳곳에서는 콜론나와 카리시미의 《선지자 다니엘》에서처럼 여왕의 영광, 위대함, 고결한 신앙심 등을 드러내려 애쓴 대본가와 작곡가의 ‘필적들’이 역력하다. 《선지자 다니엘》의 대본가로 선택된 콜론나가 여왕의 퇴위와 로마로의 여정을 도운 스페인의 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오라토리오는 여왕이 스페인의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정치적 권위를 되찾겠다는 또 다른 메시지였다고 볼 수 있다.
모바일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넘어서 일상이 되어가고 있으며 현대정치 문화에서도 모바일을 활용한 홍보는 필수적인 요인이 되어 있다. 많은 정치 후보자들이 선거 캠페인 문화 및 전략에 있어 모바일을 비중이 높은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에 비해 모바일을 활용한 정치 광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모바일을 활용한 문자메시지 홍보는 현대 정치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좀 더 정교하고 유권자들의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모바일 메시지 활용이 필요한 시점임을 알 수가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배경 하에 모바일을 활용한 정치 후보자들의 문자메시지에 대한 인게이지먼트 요인들이 유권자 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연구를 진행하였다. 기존 선거에 사용되었던 문자메시지를 수집 분석해 상호 이해형, 조작형, 정보 전달형으로 나누고 선거권이 있는 전국 남녀 120명을 통해 인게이지먼트 속성(만족, 유익성, 주목성)이 유권자 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서베이를 통해 분석해 보았다. 분석결과 첫째, 상호이해형 메시지에서 후보자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만족과 유익성이고 투표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만족인것으로 나타났다. 둘쨰, 조작형 메시지에서는 만족과 유익성 요인이 후보자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고 투표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만족과 주목 요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정보 전달형 메시지에서는 만족과 유익성 요인은 후보자 태도에, 만족과 주목성 요인은 투표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인게이지먼트 요인이 메시지 유형별로 유권자 반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효과적인 메시지 운용 전략을 펼칠 수 있으며, 한 두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는 선거에서 향후 더 발전적이고 정교한 선거 캠페인 문화에 실무적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일러수뇌회담은 일러 양국의 영토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더 나아가 아베 수상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고자 하는 회담이었으며, 동북아국제정치의 큰 판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 아베 수상의 의도가 엿보이는 중요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북방4도의 반환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북방영토문제의 미해결은 많은 부분 일본정부의 책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4도 일괄 반환’ 주장과 ‘2도 선행 반환’ 주장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잦은 ‘골대 이동’이 북방영토 해결을 무산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물론 일본정부의 그러한 결정에 미국정부의 부정적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거나, 미일동맹정책의 대가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영토문제는 대국간 힘의 전이 현상이 배경에 있어 복잡한 정치역학이 작용하는 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고유영토론에 대한 러시아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북방4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고유영토론’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명확해진다. 일본의 ‘고유영 토론’은 독도에 대한 주장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 주장의 공허함이 같은 이유에서 오버랩 되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본고에서는 독일통일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분석, 통일 및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여론조사결과에 기초하여 정치교육의 과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명제를 여섯 가지로 정식화하여 제시하였다. 첫째, 독일통일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는 후속근대화라고 특징지을 수 있으나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어 아직도 완결된 것이 아니다. 둘째, 민주적인 갈등문화 혹은 논쟁문화의 정착이 요청된다. 셋째, 민족적 연대의식의 강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동일시의 기반·준거가 무엇인가의 질문과 문제를 다루어야 하며, 이 맥락에서 헌정애국주의의 착근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넷째, 헌정애국주의의 착근을 위해 정치교육의 활성화가 요청되며, 담당기관이나 단체 사이의 네트워크가 요청된다. 다섯째, 다문화사회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와 다양성의 측면, 사회통합의 과제 및 국가·국민·민족정체성의 확립 혹은 재정립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그 두 가지 차원 혹은 준거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담론의 활성화가 요청된다. 여섯째, 통일과 사회구조의 변화 그리고 정치교육을 위한 그 함의와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당사자와 참여자의 내부적 관점 혹은 이믹(emic)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와 내러티브 접근방법이 더 많이 요청된다.
순수상업작품에는 창작자의 생각과 사상이 은폐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감성 혹은 사용성, 기능성이 작품에 포함되어 감상자나 사용자에 의해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 제품과 사용자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인위적인 방해요소가 가미되되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사상적 동질감과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지는 십자가는 예수의 순수한 희생이라는 상징보다 크리스트교 포교라는 정벌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었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십자군의 십자가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대상에 은폐화 되었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디자인과 건축은 순수한 기능적, 감성적인 내용 이외에 독일 제3제국의 정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화 되어 다른 목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 고찰을 통하여 독일 제3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건축과 디자인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근대의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지식인들이 3.1운동 이후 새롭게 형성된 ‘제한된’ 담론공간 안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고찰한다. 젠더 이슈는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일제 식민체제 하에서 근대사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신지식인들은 새로운 변화에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표출하며 ‘근대’와 ‘전통’의 충돌에서 발생되는 파열음을 도덕적 균형으로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보여주었다.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소비주의와 결합된 도덕적 일탈과 가정으로부터의 이탈을 경계하며 ‘가정’이야말로 남녀평등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반면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 사회주의 여성들과는 이념적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틀을 모색하고 ‘남녀평등’이 실현된 문명사회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고자 시도했다. 이를 기반으로 여성해방논의가 더욱 확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탈정치화된 문화지형의 틀 안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만큼 기독교 신지식인들의 젠더 논의는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선 ‘문명사회의 실현’을 근대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서구적 근대의 사상적 종속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서구 중산층의 근대적 욕구를 근대사회의 이상적 가치로 수용했다. 이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즉 그 어떤 정치적 자유도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식민지 현실에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중립적 근대가치로 치환시킴으로써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과 정치적 해방의 욕구를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해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현실 인식에 있어서도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열강들의 식민주의 확장과 식민체제로부터 파생된 억압적 현실을 간과한 채, 그 근본원인을 조선의 ‘근대적 결핍’에서 찾았다. 이들은 조선여성들의 의지부족이나 미성숙한 정신 또는 교육환경의 낙후성 등을 조선여성운동의 저해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식민지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식민화된 근대’의 주요채널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최근 국내에 유입하는 이민자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국가는 잠재적인 시민을 선별하고자 이들에게 언어시험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다 언어 분야에서 제2언어 평가나 특정 목적을 위한 한국어 평가에 관한 연구물은 많이 축적되지 않은 편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국내에서 시행되는 귀화시험이 이주자의 한국어 능숙도, 사회 적응능력, 혹은 사회문화적 지식을 평가하기 위한 중립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사회정치적 문지기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련 대중매체, 정책 문서자료 등을 기반으로 이민귀화적격시험(KINAT)의 목적, 내용과 과정을 분석하고, 시험 수행에 대한 수험자들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귀화시험은 한국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요구되는 언어적, 사회문화적 지식을 평가하기 보다는 사회통합과 안녕이라는 미명 하에 적격한 이민자를 선별해 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 결과를 토대로 향후 귀화시험의 운용과 개발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발리바르의 반폭력 개념에 나타난 기독교정치학적 함의를 다룬다. 후기 - 마르크스사상가로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탈근대사회에서 혁명적 폭력 이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반폭력” 개념을 주창했으며, 그 실천과제로 “시빌리테의 정치”를 제시하였다. 이런 발리바르의 반폭력 개념은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변증법적 대립 속에서 새로운 탈근대 정치를 모색하는 기독교 정치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중간 개념으로서 반폭력과 시민인륜을 앞세운 적극적 정치참여로서 시빌리테의 정치는 기독교가 평화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현실 사회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가치가 있다. 특별히 극단화된 폭력에 맞서기 위한 기독교 정치학적 전략으로서 주목할 요소가 있다.
그의 정치학은 존 하워드 요더와 같은 기존의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넘어서서 탈근대적 기독교 정치학의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아나뱁티스트 현실주의를 강조한 “기독교 정치학”에서 존 레데콥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유연한 사고 속에서 제자도의 신념을 가지고 시민불복종과 같은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적 반폭력 개념의 이론적 사례를 제시해 준다. 반폭력 개념은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긍정할 대안 논리로 작동할 수 있으며,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재조명해준다.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맞선 시민윤리를 기독교 윤리학에 접목시킬 수 있어 공적신학의 개념을 강화시켜 주는 정치학적 함의가 있다. 다만 반폭력이 마르크스 사회정치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에 포함된 정치학적 전략은 기독교 정치학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