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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0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대축척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대부분 소축척지도에 집중되어 왔다. 고지도 연구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 대축척지도에 대한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대축척 실측도가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된 대한제국기의 지도들을 수집하여 그 특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다음 3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다. 첫째, 대한제국기에 근대적인 대축척지도의 기초가 된 전답도형도가 등장하였다. 둘째, 그 이후로 다종다양한 근대적인 대축척 실측도가 제작되었다. 셋째, 각 지도들의 축척이 다양하고 매우 정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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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199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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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2023.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엘리엇은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에 현 대 시인의 역할을 비유함으로써, 문학 작품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나 재능 또는 당대의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객관적이거나 공평무사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제시했다. 이러한 비평관은 「완벽한 비평가」나 「문학 서평에 대한 생각」 에서도 반복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라,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엘 리엇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당대의 정치와 경제 상황과는 상관없는 것으 로 읽어 왔다. 그렇지만 본 논문은 문학 작품을 시인 개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그의 에세이들이 쓰인 기간이 그가 로이즈 은행에서 일했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 다. 그는 로이즈 은행에서 일하면서, 영국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중요 한 경제와 정치의 변동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당대 경제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한 정치 경제적인 관점을 자신의 시에 반영했다. 이러한 점에 입각 하여, 본 논문은 「요리용 달걀」과 「황무지」를 당대의 정치와 경제 상황 과 연계하여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26.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제국의 칙령은 입법체계상 법률의 위임에 의하여 제정되는 내각결정이나 명령, 훈령, 고시 등과 달리 대외적 구속력을 갖는 상위의 법규범이며 입법절차에서 법률보다 존중 되는 법규범이었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는 당시 일본의 법제와 대체로 동일하였다.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대한제국의 영토관할권에 독도(석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국가의 대외적 의사표시를 하는 공식문서로서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와 절차를 규정한 법률로서 ‘공문식’에 따른 입법절차를 거쳐 제정되어 관보에 공포된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는 법체계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불과하며 국가적 의사 표시를 위한 공식문서인 관보에도 게시되지 않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상위의 법체계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새로이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울도군의 관할에 포함되는 독도(석도)에 대하여 별도의 지리적 위치 등에 대한 설명 없이 법률로 명시하였다. 칙령 제41호에 따른 관할권의 행사는 울도군 절목이라는 후속적 하위법령의 제정을 통해 세금의 징수라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먼저 서구적 근대법의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적 주권을 행사한 1차 증거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근거로서 그 무게와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27.
        2015.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사용되는 역사용어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도 향상을 위해 연구자 자신의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실행연구를 연구 방법론으 로 채택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 연구에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첫째, 2013학년도와 2014학년도에 S여중 2학년 전 교생 180여명을 대상으로 역사과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역사용어에 대한 이해 실태를 파 악하였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는 2013학년도에 자신의 수업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실제 수업에서 역사용어 이해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6개반을 3그룹으로 나누어 3가지의 학습방 법을 적용하였다. 2014학년도에는 2013학년도에 역사용어를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학 생활동중심수업을 적용하였다. 셋째, 수업 후 교사의 수업일기와 학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수업 후의 반응을 살펴보았으며, 2주후 학생들의 역사용어 이해도의 향상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탐 구형 평가(개념확인평가)와 지필고사 성적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교사가 활동지, 동영상 등 다양한 학습자료를 제공하여 수업하고, 학생들은 학습과 제를 통해 선행지식을 갖추어 학생활동중심으로 수업이 이루어질 때 역사용어에 대한 이해도 가 향상되어, 학업성취도도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자는 2년 동안 본 연구를 통해 자신의 수업을 되돌아보고 반성함으로써 수업을 개선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8.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순수상업작품에는 창작자의 생각과 사상이 은폐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감성 혹은 사용성, 기능성이 작품에 포함되어 감상자나 사용자에 의해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 제품과 사용자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인위적인 방해요소가 가미되되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사상적 동질감과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지는 십자가는 예수의 순수한 희생이라는 상징보다 크리스트교 포교라는 정벌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었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십자군의 십자가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대상에 은폐화 되었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디자인과 건축은 순수한 기능적, 감성적인 내용 이외에 독일 제3제국의 정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화 되어 다른 목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 고찰을 통하여 독일 제3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건축과 디자인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29.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울릉도는 개항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불법 입도하여 거주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도 이를 방조하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철환을 위해 두 차례나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실행하고 일본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내부 조사관 우용정(禹用鼎), 부산 해관 세무사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와 일본인 관리 주 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 아카츠카(赤塚正助)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에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종래 강원도 울진현에 속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이번에는 독립시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울도군”으로, 격상시키고, 울도군의 관할지역을 울릉도와 죽도(죽서도)와 석도(石島, 獨島)로 법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관제 개정 사실을 중앙정부의 󰡔관보󰡕 1900년 10월 27일 자에 국제고시하였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국제고시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石島, 獨島)의 대한제국 영유가 서양국제법으로도 다시 한번 더 세계에 공포된 것이다. 물론 이 때에 일본측은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이 때 독도를 종래의 명칭 ‘우산도’로 호칭하지 않고 “石島(독도, 獨島)”로 표기한 것은 공도정책이 폐지되어 1883년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온 울릉도민들이 사투리로 돌(Rock, Stone)을 “독”이라고 발음하여 독도를 돌섬(Rock islet)이라는 뜻의 지방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돌섬”은 뜻을 취하면 “石島”가 되고 음을 취하면 한자로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는데, 뜻을 취해 “石島”로 표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때 국제법에 밝았던 조사단의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는 독도의 “Liancourt Rocks”라는 서양 호칭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도 “리앙쿠르 石島”가 되므로 겸하여 石島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행한 『일·지·한 항로이정일람도(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우산도”를 “리앙꼬르드石”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제국의 石島표기는 리앙쿠르 石島(Liancourt Rocks)가 바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국제법을 빌려다 거듭 밝힌 것이었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독도에 일본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려고 계획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가 주장한 것은 독도가 임자없는 無主地라고 주장해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有主地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 정부의 독도영토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로서 1905년 1월 이전에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에, 1905년 독도를 일부러 “무주지”로 억지 전제한 일본의 독도침탈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효”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침탈 사실을 중앙 『관보』에 고시하지도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은 국제법상 불법의 도탈(盜奪)을 시도한 것이고 완전히 무효인 것이다. 한국은 1910년에는 일제의 강점으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패망 후에야 한반도와 함께 회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30.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s designed to demonstrate reorganization of the social and religious time in the later Roman empire through legislation of Christian feasts by the Theodosian Code. It first examines the social rhythm of Roman society in the middle of the 4th century with recourse to the Codex-Calendar of 354. Then it proceeds to demonstrate how the imperial laws in the fourth and fifth centuries had changed traditional Roman time into Christian time. The legislation of Sundays/Lord’s days as feriae publicae introduced weekly holidays into Roman society. Subsequent laws designated Christian feasts such as Easter, Epiphany, and Christmas as public holidays, while they abolished feriae connected with pagan gods, thereby making them workdays. Creation of many imperial anniversaries may be understood as a process of modifying a pagan Roman society into a Christian one. Reorganization of the social time can also be seen in imperial legislation which prohibited spectacles on Christian feast days. Many imperial laws which abrogated pagan cults and superstitions and strove to preserve and keep spectacles demonstrate secularization of public entertainment. Furthurmore, prohibition of spectacles, even those linked to imperial anniversaries, on Christian feast days as well as conceptual distinction between “time for prayer” and “time for entertainment” displays a process of separation between religion and festivals. Other imperial laws emphasized humanitarian concerns on Christian feasts. They demanded Easter amnesty, prohibition of tortures during Lenten seasons, and visitation of prisoners on every Sunday. This study corroborates that the process of Christianization of the later Roman empire included reorganization of the social and religious time through imperial legislation.
        31.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 major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s, A Modern History of Korea for High School (Seoul: Kumsung Publishing House, 2007) described that Protestantism in Korea supported Japanese invasion to Korea. The text book has been used for many years by more than 50% high schools in South Korea. The argument of this book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might influence over high school students who think that the text book should always be correct. However, Protestantism in Korea was not the supporter of the Japan Empire in the turn-of-twentieth century Asia. In reality,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appeared by Korean people as defender of Korean people against Japanese power. At that time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closely related to America which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and helped its modernization. When Japan tried to put Korea in her power, King KoJong sent his envoy to the president Roosevelt of USA for help to maintain his independence. In reality, Japan government had considered Korean Protestantism as big obstacle for its rule over Korea. Japan had always be afraid of Korean Christianity and spied over it. Japanese army in 1911 arrested 105 important Christian leaders to destroy Korean churches. Also, in the last years of Japan imperialism, Japan governor-general of Korea expelled American missionaries from Korean peninsular to disconnect Korean Christian relationship with America. Finally, missionaries tried to maintain the principle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in Korea. They did not involve in political matter either on Korean nationalism or Japanese imperialism. This attitude of missionaries could not be satisfied with Japanese as well as Korean. However, they thought that their original mission in Korea is evangelization, but not independent movement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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