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9

        44.
        1993.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Namul" is a Korean common vegetable food composed of edible young leaves and soft stalks of wild plants or cultivating vegtables and treated with traditional condiments. It has been widly used as not only a regular diet but seasonal foods or special ceremonial foods. In this thesis, the kinds of edible plants for namul were philologically approached by books published in Korea from Koryo to Chosun dynasty. The first historical record about cultivated vegetable as food in Korea was a garlic and a gourd in 「Samkuksaki」. According to numerous records, edible wild plants might have played an important part as food resources, since they have variable edible portions as famine relief foods. Four kinds of namul were first introduced in Koryo age, but in Chosun dynasty over eighty kinds were recorded. The root of ballonflower and white radish were most commonly used for raw namul and bamboo shoot and squash for boild ones. Most kinds of namul were introduced in 「Zeungbosanrimkwungjae」 and 「Limwonsiprwukji」 influenced by pragmatism in later half period of Chosun. The chronic state of famine in later half period of Chosun caused to introduce various edible wild vegetables, and had greatly influenced on the korean people to acquire vegetarian food habits and to favor salty taste. It seems to need a further study on recent nutritional problems including dietary fiber.
        4,000원
        45.
        199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Koryoˇ(918-1392) made a certain progress in her culture and agriculture except the latter part of the era when the development in social economy were retarded due to military dictatorship and Mongol invasion. Despite of these external conditions, cultivations and kinds of horticulture foods were expanded with the help of many king`s agriculture first policy and the advancement in cultivating method. Among the horticulture foods, fruits such as peach, plum, Japanese apricot, apricot, cherry, pear, persimmon, pomegranate, crab apple, jujube, grape, Chinese quince, walnut, orange, yuzu, chestnut, ginkgo nut(silvernut), pine nut, nutmeg nut, and jat were growed, and vegetables such as Chinese cabbage, turnip, radish, garlic, welsh onion, gynmigit, scallion, taro, malva, cucumber, white gourd, bottle gourd, water melon, eggplant, Japanese ginger, ginger and litchi were cultivated, while seri, water shieled and bamboo sprouts were taken in natural. Fruits were taken in natural or through dry, and particularly grapes were used to make wine. Flowers of Japanese apricots, some fruit trees, and chrysanthemum were also made into wine. Certain fruits were used as medicine owing to its medicinal nature. Vegetables were used to make kimchi or to boil soup, sometimes they were dried to be kept in storage to be used in rare season and also used as medicine. Increase in kinds of horticulture foods does not have any direct relation with the reform of social economy, but the fact that so many kinds of horticulture foods were cultivated and used in Koryoˇ era shows that they elevated people`s life and dietary culture.
        4,200원
        46.
        1990.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findings of the historical study of the proprieties of Korean traditional tea ritual, based on documents, are as follows. 1. The proprieties of tea ritual for the Imperial Sanctuary and the Buddhist proprieties of tea ritual for Buddha was celebrated during the Silla dynasty. 2. The proprieties of tea ritual during the Koryo dynasty developed in various types, such as the propreieties of tea ritual for the Imperial government, Buddha, Confucians.
        4,000원
        47.
        198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육대(六大) 차류(茶類)의 전래(傳來) 여부(與否)와 국내(國內)에서의 제차(製茶) 여부(與否)를 고찰(考察)한 결과(結果) 다음과 같은 사실(史實)이 확인(確認)되었다. 1. 연고차(硏膏茶)가 전래(傳來)되어, 국내(國內)에서도 생산(生産)되었다. 2. 향차(香茶)는 백차(白茶)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3. 엄차와 대차(大茶)는 청차(靑茶)였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4. 고려말기(高麗末期)에는 녹차(綠茶)인 엽차(葉茶)도 음용(飮用)되었다.
        4,000원
        48.
        2017.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고려시대 가르치는 자에 대한 호칭은 박사, 조교, 문사, 의사 등 관직명을 비롯, 함장, 사장, 사유, 선생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여기서 문사, 의사, 사장, 사유 등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가르침[敎]의 의미 외에도 다스림[治]의 의미, 능통함 [能]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는 가르치는 자의 임무와 자질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교유를 돈독히 하고 경의를 강론하여 가르치고 이끄는 임무에는 인지적 영역의 가르침 외에도 정의적 영역의 다스림, 활동적 영역의 능통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가르치는 자의 자질로 ‘문학’, ‘경학 우장’, ‘경명’, ‘박학’ 등은 인지적 영역, ‘경행수근’, ‘석덕’, ‘행수’, ‘근민’, ‘효렴방정’ 등은 정의적 영역, ‘박달’ 등은 활동적 영역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과나 포폄의 기준을 보면, 과거응시자가 있는지, 가르침에 성효가 있는지 등 인지적 영역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가르침은 단지 문예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어려운 부분을 서로 논란하게 하는, ‘문난’(問難)하는 교육이다. 경전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밖에서 안으로의 교육’이 아니라, 어려운 부분에 대하여 서로 논의하게 하고 의문점을 토론하도록 이끄는 ‘안에서 밖으로의 교육’은 오늘날 가르치는 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임무라 하겠으며, 앞으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가르침[敎,인지적 영역]-다스림[治,정의적 영역]-능통함[能,활동적 영역] 세 가지가 조화를 이 루어 간절하게 묻고 생각하는 ‘절문근사’,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논란하게 하는 ‘문난’하는 교육 을 열어가야 하겠다.
        49.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단계마을의 역사 변천과 의미를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구명하고자 했다. 먼저 단계마을의 지명은 철광석의 산화철 현상인 ‘붉 은’ 의미가 들어간 ‘적촌’‧‘단읍’‧‘단계’에서 유래했다. 단계의 고대 사회 는 한 가야 소국을 구성하던 단위인 읍락이었으며, 신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 赤村縣으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 때 菁州 闕支郡의 영현이 되었 으며,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의해 丹邑縣으로 개명되었다. 다음으로 940년 단읍현에서 단계현으로 명호 개정은 단계현이 국가 질서 내로 편제되었음을, 토성분정으로 지역 내의 세력 재편이 마무리 되었음을 의미한다. 단계마을은 나말여초의 변화 속에서 단계현의 중 심지가 되었다. 그 치소가 도평[양전]에서 단계마을로 옮겨졌기 때문 이다. 단계현은 1254년의 몽골 침략, 皆品部曲의 山陰縣으로 移屬, 왜 구의 침입으로 위상에 큰 변화를 겪었으며, 단계마을도 그러한 변화로 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끝으로 許邕은 단계마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지명에서 취한 단 계로 호칭되었으며, 토성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마을 역사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허옹은 1337년에 처향 단계로 은거하여 스스로 迂軒이라 칭하였으며, 당시 일반적인 男歸女家의 혼인 형태에 서 본다면 귀향이라 할 수 있다. 허옹은 1345년에 다시 벼슬살이에 나섰다가 1348년 무렵에 다시 단계로 낙향하고 그 직후 법물리로 이거 하였으며, 1357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헌 허옹이 단계에 입향함으로써 불러온 단계 사회의 변화는 결코 적지 않았다. 여말선초 우헌 허옹의 아들 허소유와 許繼道, 사위 안동 장씨 張綱, 외손서 상산 김씨 丹邱齋 金後가 단계마을과 법물리에 은거하거나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이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