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개명산(開明山)에 위치하는 청련사(靑蓮寺)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대표 사찰이다. 청련사는 원래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988번지 종남산(終南山) 무학봉(無學峯)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근ㆍ현대기 불교 종단의 갈등과 해결책으로 2006년 왕십리에서 양주로 이건(移建) 결정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2010년 6월부터 경기도 양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청련사에 봉안된 불화는 12건이 현전되고 있다. 현재까지 청련사 불화에 대해서는 학위논문을 비롯한 여러 보고서에 일부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필자가 2017년 청련사 소장 불화를 전수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청련사의 역사를, 불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청련사에 소장된 불화는 1866년 <치성광여래도>로부터 1970년대 <팔상도>에 이르기까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성된 불화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의 기록을 보이는 <치성광여래도>는 화기에 복장시주(服藏施主)로 두 명의 상궁 이름이 확인된다. 이어 1880년에 조성된 <아미타불회도>, <현왕도>, <감로도> 세 점은 여러 상궁의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로 의미가 있다. 짜임새 있는 구도, 세밀한 필치, 표현 기법 등에서 불화승 축연의 기량을 살필 수 있는 불화로도 주목된다. 이 외에도 민간인들이 시주와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도 봉안되어 있다.
청련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청련사지(靑蓮寺誌)」에는 1849년 중창에는 시주를 권면하는 상궁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어 5년 뒤에는 왕실의 인척인 홍현주와 영의정을 역임한 권돈인이 불사를 시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화의 조성 기록에서 1880년 조성 불화 이외에 상궁이나 왕실의 인사가 후원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청련사는 왕실 인척이나 당대의 권력가, 왕실과 관련된 상궁들의 불사(佛事) 후원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불화와 불전(佛殿)의 구조상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특징을 보인다.
청련사 불화는 19세 말~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련사의 역사를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19세기~20세기까지 불화의 도상과 양식적 특징, 후원자와 화승을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로 의미가 깊다.
본 논문은 양주 청련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가운데 1670년에 조성된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과, 1651년에 조성된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을 다룬 것이다. 이 두 조각상은 2017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친 복장 조사를 통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강희 9, 庚戌)에 수조각승 녹원(鹿苑)을 비롯한 인종(印宗)ㆍ도운(道云)ㆍ유경(唯敬)ㆍ사운(思運)ㆍ성심(性諶) 등 6명이 참여해 조성한 1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으로, 확실한 조성 연도와 조각승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청련사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에 조성된 이후 1913년과 2000년에 개금불사가 이루어졌으며, 1940년에 복장품 일부는 도난되었다.
청련사 관세음보살상은 1651년(효종 2, 辛卯)에 전라도 흥양현 팔영산(八影山) 지장암(地藏庵)의 좌협시보살로 조성된 사실이 조성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성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아미타삼존상 가운데 좌협시보살로 조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40년에 개금ㆍ중수하였던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다.
청련사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이 어떠한 이유로 청련사로 이안(移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 말기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실 관련 사찰에 여러 지역의 불상들이 이동된 경우가 많았던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양주 청련사의 관음보살상도 화계사와 흥천사처럼 왕실과의 인연으로 고흥능가사의 지장암에서 청련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양주 청련사는 2010년 이전까지 서울 하왕십리 무학봉 바위절벽 아래에 있던 사찰이다. 태고종에 속한 청련사는 조계종과 소유권 분쟁 과정에서 조계종의 승려가 하왕십리의 사찰 구역을 건설업자에게 매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양주로 이전 건립하게 되었다.
근래까지 안정사라고도 불렸던 청련사의 역사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청 련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지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상량문 등의 기록에 따르면 청련사는 신라 흥덕왕대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였다. 흥덕왕대 창건설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는 당시가 중국으로부터 선(禪)이 전래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술하였고, 조선초기 창건설의 배경으로는 무학대사가 종남산 서쪽 계곡에 있던 사찰을 동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청련사는 조선시대에 다섯 번의 중창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두 번의 중창이 있었다. 이때까지의 중창은 홍수 혹은 화재로 무너진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2010년 여덟 번째의 중창은 사찰 부지를 옮기는 대작불사였다. 이때의 중창은 주지로 있던 백우대사가 주도하였다. 이로써 청련사는 천년 동안 이어온 전통을 양주 계명산 자락에서 다시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곤충사육농가는 2012년 기준 전국 325호이며전라권, 경기권, 충북권으로 사육 농가가 많으며 곤충체험학습장 및 곤충생태공원 은 총 84개이며 곤충연구소는 15 개소이며 곤충산업 시장규모는 2015년 3,000억원으로 확대됨에 따라 농업의 새로 운 소득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향후 곤충들이 식용이나 사료용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식생활, 식량안보 및 생태계 유지 등의 중요한 역할이 기대되어 양주시는 유용곤충을 자원을 활용하여 창조경 제의 블루오션으로 육성해 나갈 방안을 찾고 있다. 양주시의 산업곤충 활성화를 위 해 3C 분석을 통한 고객, 경쟁자, 센터 자체분석과 외부, 내부환경을 바탕으로 SWOT 분석으로 통해 전략 방향과 비젼을 설정하였다. 분석 툴을 기초로 하여 곤 충자원의 산업화 촉진을 위해 유용곤충연구개발 확대, 식용‧사료용 신 시장 발굴을 위한 제도개선 추진, 전국민 대상 곤충산업 홍보 및 인력양성을 위한 교육, 실용화 기술개발에 따른 기준 및 규격 매뉴얼화에 중점을 두었다.
본 논문은 18세기 중국회화사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양주화단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휘상들의 문화적 성향과 경제적 영향력이 당시 그림시장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 商幇가운데 휘상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문사적 향유를 중시하는 경제성향에 관해 문헌을 통해 고찰하였다. 아울러 연관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시도하였다. 강남부자를 대표했던 안휘출신 상인들, 이른바 휘상들은 세 명이 상인이면 한명은 유학을 공부할 만큼 문풍이 만연했던 문헌국 출신들로서 賈而好儒란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 유교적 사회제도에서 천한신분의 상인계층에 속하면서도 문사의 풍격을 숭상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은 휘상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과 자부심은 안휘지역의 문화적 정서로부터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타의 상방보다 本鄕의식속에 각인된 地緣중시의 결속력도 남달랐던 휘상들은 소금이나 쌀. 차 등외에도 고향의 특산품인 서화와 문방용품을 취급하였다. 일찍부터 서화상품에 조예가 있었던 휘상들은 명대 중. 후반기부터 서화와 고동품 소장에 참여하는 한편 예술시장에 무리로 움직이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휘상들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 화단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안휘와 지형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양주에서이다. 16세기를 전후하여 양주에 진출했던 휘상들은 청초부터 소금사업으로 축적한 막대한 자금을 문화 사업과 서화시장에 유입시켜 양주화단의 새로운 변화와 활성화에 본격적으로 기여하였다. 그 결과 상류지식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문인화를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시장상품으로 전환시켜 서화시장의 유통구조에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였다. 특히 양주화단에 그림의 상품화가 본격화 되면서 작품가격 공개와 작품 값 흥정 같은 파격적인 현상들이 성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휘상들의 본향에 대한 각별한 자부심은 초일하고 분방한 안휘지역 화파의 화풍들을 자연스럽게 양주화단으로 전이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또한 안휘인들의 문화적 욕구 가운데 문사 숭상의 성향과 서화에 대한 조예는 양주지역에 서화소장과 감상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에 관심이 높았던 휘상들의 심미 취향은 대중적 성향의 서화상품화와 그림시장의 흥행을 조장하여 화가들로 하여금 창신에 대한 독특한 표현방식을 가시화시키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