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우선적으로 노벨문학수상작『노인과 바다』로 상기되는 작가로서 그의 글쓰기는 많은 학술연구자들이 언급했듯이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 하다. 반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스타일은 다소 복잡하다. 그것은 인간이 전쟁에 처한 극한 현실과 내면의 세계에서 겪는 도덕적·종교적인 딜레마를 시사한다. 이에, 그간 그의 작품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연구들이 있지만, 본고는 스페인 내전에서 인물들의 행동과 사상을 지배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종교적 딜레마를 고찰해 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전쟁의 실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의 취미인 낚시와 사냥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 중에 다리 폭파의 임무를 위해 모인 소그룹 내의 다양한 계급과 인종들 간의 종교적 대립과 타협을 보여준다. 또한 각자 지니고 있는 가치관은 전쟁으로 인해 퇴색되어 생존을 위한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도덕적 즉, 종교적 딜레마에 사로잡힌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과 안셀모가 윤리적·종교적인 선택의 기로에 처할 때마다 독백과 기도를 통해 살인을 합리화 시키는 장면들은 이론과 실재의 간극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종교적 딜레마의 단면이다.
본 연구는 짐 쉐리단의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중심으로 아일랜드 와 영국 간의 갈등관계와 영국의 의도된 조작으로 인해 아일랜드인이 어떻게 테러리 스트로 낙인찍혔는지에 대한 과정을 살펴본다. 쉐리단은 ‘길포드 4인’ 사건으로 알려 진 실화사건을 형상화 함으로써 영국정부가 아일랜드인을 테러리스트로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테러 사건과 무관한 평범한 아일랜드인까지 테러리스트로 조작한 불합리한 상 황을 전달한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로 누명을 쓴 ‘게리 콘론’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영국이 아일랜드를 억압한 역사뿐만 아니라 테러리즘의 양가적 의미 역시 상기시키고 있다.
슬라이고 근처 드럼크리프 시골 묘지에 매장되어 있는 예이츠의 묘비에 는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그리고 죽음에/ 말탄 자여 지나가거라”라는 싯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말탄 자가 단지 위대한 시인 예이츠의 묘지를 방문한 방문객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이츠가 구태여 자기의 고향인 슬라이고로 돌아와 자기 조상이 교구목사로 지냈던 시골 교회의 묘지에 매장되기를 원하고, 벌벤 산 아 래 라는 말년의 작품에서 자신의 묘비명까지 지정한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 이츠가 사망할 당시에는 비행기며 자동차가 보편화되어 있었기에 관광객을 “말탄 자” 라고 지칭할 필요가 없었다. “말탄 자”는 아일랜드 신화상의 인물들을 일컬을 뿐만 아 니라 예이츠 자신이 신화상의 인물로 되었음을 보여준다.
췌장암의 5년 생존율은 아직도 극히 저조한데 그 이유는 췌장암 발견 당시에 완치 목적의 수술적 절제가 가능한 환자 의 비율이 10-20%밖에 되지 않고, 근치적 절제술 후에도 5년 생존율이 약 10-20%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장암이 선 별검사를 통한 조기 진단으로 생존율의 향상이 잘 증명된 것 처럼 췌장암의 생존율을 향상시키려면 초기 상태 또는 전암 성 병변을 조기 진단을 하여 근치적 절제술을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췌장암의 선별검사는 생존율 향상에 효과가 없음이 알려져 있어 췌장암의 고 위험군을 대상으로만 췌장암의 선별검사를 시행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추천되고 있는 췌장암 선별검사의 대상은 직계가족에서 2명 이상의 췌장암 환자가 있는 가족성 췌장암, Peutz-Jeghers syndrome 환자, 유전췌장염 환자, p16, BRCA2, HNPCC 유전자 변이 보유자이면서 직계가족 에 췌장암 환자가 있는 경우 등이다. 내시경초음파와 자기공 명담췌관조영술이 가장 좋은 선별검사 방법으로 알려져 있 고 시작 시기는 50세 이전 그리고 가족 중 췌장암 환자의 발병 연령보다 10년 일찍 시작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주기로 언제까지 선별검사를 할지 언제 수술을 해야 할지에 관한 정확한 지침은 확립되어 있지 않아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
대전시 하천변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은 조깅이나 운동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대부분 하천과 도로에 접한 한적하고 협소한 공간에 임시시설의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공중화장실의 크기는 대부분 작고 위치는 하천변 보도 옆에 설치되어 있어서 어린이, 장애인, 노약자 등 사회적약자의 접근성이 좋지 않으며 이용자들이 적은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여성 이용자들이 범죄에 노출될 우려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중화장실을 누구나 이용 가능하도록 유니버설디자인 개념과 배리어프리 지침을 적용하고 여성이용자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셉테드 개념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대전 하천변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의 중 수세식 화장실 14개소를 선정하여 유니버설디자인 7원칙, BF인증기준, 셉테드 기법을 참고하여 조사서를 만들고 외부디자인, 설치위치 적정성, 이용자 접근성, 화장실 단차, 경사로, 출입구 통과 유효 폭의 적정성, CCTV, 안심벨 설치여부 등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외부디자인은 대전시 표준형디자인의 모티브, 형태, 색채적인 측면에서 통합디자인이 적용되지 않았고 공중화장실의 접근성은 도로와 하천변을 기준으로 경사로, 단차 제거 등이 완벽하지 않았으며, 신규로 설치된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휠체어사용자의 출입문 통과 유효 폭, 회전 공간 등이 부적절하였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참고하여 외부 디자인은 대전시 표준형디자인의 모티브를 적용하고 내부는 휠체어사용자, 시각장애인 등 사회적약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고 여성이용자가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지능형 안심벨 설치를 제안하였다. 하천변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을 이용함에 있어 누구나 편리하고 여성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의 설치 및 관련 시설의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기대해본다.
본 연구는 캐나다 국적의 아빠와 한국 국적의 엄마를 둔 다문화가정의 자녀, 9살 David가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관하여 심 층적 이해를 수행하였다. David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내면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내러티브 탐구방법을 활용하였으며 3개월 동안 7번의 1:1 심층면접을 실시하였다.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David의 자아정체성은 타고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사 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타인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협상의 과정을 통하여 유동 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David의 자아정체성 형성은 그가 사용하 는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자신의 다중 언어 사용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 인할 수 있다. 셋째, 어린 학생도 자신의 자아정체성에 관한 생각, 관점, 가치관, 느낌 등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연구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를 분석한 결과 다음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통 계적인 숫자나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내러티브 관점으로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는 성숙한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둘째, ‘다문화’ 용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지닌 다양성을 어떠한 카테고리에 범주화시켜 편견이나 차별이 아닌, 그 자체로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개방적이고 수용적 사회 인식이 필요하다. 셋째, 학교 현장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들 뿐 아니라 일반 학생 모두를 위한 통합적 다문화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수행되어 온 다문화가정 자녀의 정체성에 대한 통 계적 연구에서 벗어나, Bakhtin의 대화주의 방법을 활용한 질적 사례 연구로 한 다문화가정 자녀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통하여 다문화교육 분석방법에 대한 새로운 방향 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일원인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정체성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학교 현장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성숙한 세계시민의식 형성과 함께 유연하고 다양 한 다문화교육을 마련하는데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2009년 한국인간식물환경학회에서 개최하는 ‘다문화가정(이주여성)의 현황 및 이들을 위한 원예치료’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위해 준비되었다. 학회의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 인류학, 여성학, 사회학, 사회복지학 등의 인문사회과학분야가 아닌 영역에서 다문화가정과 이주여성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한편, 얼마나 우리 사회가 다문화로 인해 다양한 사고와 행위의 주체가 되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1991년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이주노동자의 합법적인 입국을 허락하기 전까지 전형적인 인력 송출국이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주하였던 최초의 조선인 미주이민단 212명을 비롯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기 동안 만주와 사할린으로 이주한 수많은 동포들, 1960년대와 70년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전의 군인, 중동지역의 건설노동자, 일본으로 간 여성결혼이민자 등 정치적 · 경제적 이유로 이주한 우리 국민의 규모는 엄청났다(김영란,2008:106).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 중에서 정치적 망명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국내로 돈을 벌어오기 위해 이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자녀교육을 위한 이민이나 혹은 더 나은 선진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한 이민 등 생존을 위한 이주가 아니라 자기발전을 위한 자발적 이주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지금 국내에서는 과거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주해 온 외국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체류 중인 외국인의 수가 드디어 100만명을 넘어섰고,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2%를 차지하였으며(정귀순,2008:203), 현재까지도 그 수는 증가하고 있는 등 우리나라는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지역을 대표하는 인력송입국으로 급격히 변모하였다. 더불어 국내 체류 외국인 중 일정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계약직 외국인 노동자와는 달리, 혼인이라는 법적 과정을 거쳐 평생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살기로 결정한 결혼이주여성의 등장으로 인해 단일민족의 순수혈동의 우월성을 믿어왔던 사람들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렇게 급속한 다문화사회로의 변화를 준비하지 못한 한국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우리와 자신과 동질적이지 않은 타인을 존중하는데 서투르며, 오히려 소외, 무시, 갈등 등 왜곡된 관계맺기를 하였다. 따라서 곳곳에서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만한 폭력사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기사를 넘어 연구자들과 정부에 고민을 안겨주었고, 결국 대대적인 실태조사와 구체적 사안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국가의 법과 제도를 바꾸거나 새로이 만들며,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각계 각층에서 급격히 대응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들을 모아서 다문화가정과 결혼이주여성에 대해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준비되었다. 즉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학문적 주장을 펼치기 보다는 정보제공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저자는 가능하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본 글은 저자가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문화와 결혼이주여성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내용-관점, 현황, 연구경향, 실제적 삶, 정책과 서비스-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의 삶은 결혼동기부터 시작하여 결혼과정, 가정형성, 자녀출산과 양육, 일상생활과 사회생활, 국적취득, 디아스포라에 이르는 내용을 포함함으로써 결혼이주여성에 관한 가능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For a long time John Calvin was understood mainly as theologian, but he understood himself as doctor and pastor. To both ministries he believed that he was directly called by God and performed his ministry with honor and sincerity. Against Cardinal Sadoleto’s sharp questioning on his qualifications as pastor, Calvin declared that his calling came from God and believed his destiny to be similar to that of the Old Testaments Prophets, who were personally and unconditionally called by God, and delivered God’s message by the help of the Spirit. Therefore, unlike the Catholic priests, he became a pastor without endorsement from church authority via an ordination ceremony. As Alexander Ganozy contested, Calvin seemed to consider the calling of the local church and his actual function as pastor to be the most effective way to become a pastor. This may be scandalous to some modern Christians who are familiar with grand ordination ceremonies, but omission of ordination can be understood as a sensible choice for Calvin when the Protestant Reformers already broke with the tradition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Upon returning to Geneva Calvin ministered churches with the fourfold ministry system-pastor, doctor, elder and deacon. Among pastoral duties preaching and teaching the Word was a primary responsibility. However, teaching the Word was not enough; the Word has to be realized in the actual life of believers. Calvin espoused the three marks of believers (notae fidelium) - confession of faith, example of life, regular participation in sacraments-and it is noted in this article that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pastor’s role is to assist his parishioners to bear those marks. To make this happen pastors cannot work by themselves. The nature of ideal ministry which Calvin advocated in Geneva was collegial and cooperative. He insisted in forming the Geneva Consistory and worked closely with elders in caring, educating, and discipling newly-converted Protestant Genevans. Furthermore, Calvin also started 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 with the purpose of enhancing pastor’s intellectual and spiritual quality, and further holding each other’s morality in check. In regard to the Company of Pastors this article introduced its five functions largely based upon Robert Kingdon’s observations: (1) examination of pastoral candidates; (2) member’s education; (3) mutual criticism; (4) mission work; (5) almsgiving, especially for French refugees at the time. Although Calvin himself did not go through the ordination ceremony, he devised a procedure and protocol with which a pastor may be examined by the Company and church, and eventually appointed by the city council. Once appointed, the pastor was in close communication and check with fellow pastors of the city and its suburbs. Calvin’s own understanding of himself as pastor and his practices as pastor offer some lessons to modern pastors and churches such as a thorough examination process for pastoral candidates and organized collegial relationships between pastors.
최근 일본에서는 되살아난 군국주의 망령들이 영토 팽창의 야망에 들떠 미쳐 날뛰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의 신성불가침의 영토인 독도를 빼앗아 내려고 온갖 권모술수를 다해 온 일본 반동들은 오늘 독도 침탈책동을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감행하고 있으며, 그들의 해외 팽창야망은 무모한 단계에로 치닫고 있다. 일본 반동들은 최근 8년 동안에만도 일본 국회와 시마네현(島根縣) 의회에서 무려 150여 차에 걸쳐 독도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밝힌 ≪2000년 외교청서i(外交淸書)≫라는 것까지 내돌리었고, 2001년 2 월 일본 시네마현 지사 스미타(澄田)는 현 의회(縣議會)에서 ≪다케시 마(竹島: 독도를 가리킴.)는 역사적으로 보나 국제법에 비추어 보나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고 떠벌리었다. 지어1) 그들은 무력에 의한 ≪죽도(독도) 탈취≫설까지 고창(高唱)하면서, ≪자위대(自衛隊)≫무력을 동원하여 독도 침탈을 위한 상륙 훈련까지 감행하였다. 역사적으로 일본 통치배들이 들고 나온 ≪죽도(竹島) 영유권≫이란 그 어떤 타당한 근거도 없는 파렴치한 날조이고 왜곡이며 억지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과 일본의 옛 문헌들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규정한 것은 없고, 오히려 그것이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늘도 저들에게 불리한 것은 ≪의문스럽다.≫, ≪편자의 오해≫라고 부정해 나서면서 파산된 지 오랜 낡은 넉두리2)를 되뇌고 있다. 40여 년 간의 악독한 식민지 통치로 조선 인민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들씌운 일본이 자기의 죄악에 찬 과거에 대하여 성실히 사죄하고 보상할 대신, 침략적인 ≪죽도 영유권≫을 운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난폭한 침해이며 인류 양심과 정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우롱이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역사학학회는 이런 실정에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조선의 불가분의 영토임을 다시 한번 논술하고 일본의 독도 침탈 죄행(罪行)을 단죄하며 일본 반동들의 파렴치한 역사왜곡 행위를 규탄하고자 이 글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