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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일 경건주의는 그 시기나 활동영역이 넓고 포괄적이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세 기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도전과 급격한 사회변화 가운데서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와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 논문은 할레 경건주의의 성경해석학을 다룬다. 할레대학은 보편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이 다양한 학자들의 사상과 논쟁을 거쳐 이후 18세기에 해석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해석사의 관점에서 할레대학은 과도기신학-신신학(Neologie)-신학적 합리 주의의 제단계를 밟았다. 이런 출발점에 할레대학의 설립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성서해석을 위한 논문들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기에 이를 중심으로 논문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결론적으로 다양한 개념과 사상들이 난무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인 논리정연성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해석학의 새로운 구상은 전통적인 개신교 성경원리가 문화적으로 변화된 기본조건에 부합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 다. 그래서 경건주의적인 신앙심의 개혁과 대학의 철학적인 합리주의 또는 근대의 역사적인 인식의 기원은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와 세계 속에서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보아야 한다.
        2.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79년 6월 창간호부터 2019년 8월까지 「한국교회사학회지」에는 40편의 근대교회사 분야 논문이 실려 있다. 그 40편 가운데 경건주의와 관련된 연구가 15편으로 근대교회사 연구의 38%를 차지하고, 웨슬리와 관련된 연구는 18편으로 45%나 된다. 본 연구는 “「한국교회사학회지」에 실린 경건 주의와 웨슬리 연구를 통해 학회지의 근대교회사 연구를 분석 평가하였다. 경건주의 연구논문들은 대부분 개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타락과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 신교의 타락을 통렬히 비판하며 등장했던 경건주의에 대해 신학자들이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웨슬리 연구는 웨슬리안 교단 연구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으며, 그 주제도 다양하게 연구되어왔다.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그간의 본 학회지 근대교회사 분야는 너무 특정 분야와 지역에 연구가 쏠려 있다. 근대교회사 내에서 보다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다루는 연구들을 통해 학문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경건주의 연구에 있어서도 교회개혁뿐 아니라 예배, 성례, 소그룹과 평신도 중심의 교회 조직 등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연구가 많아져야 한다. 무엇보다 그간의 연구가 지나치게 남성만을 대상으로 연구해 왔다는 점은 문제이다. 가용한 자원 안에서라도 여성들을 재발견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3.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에 등장했던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그 의도와 지향점에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구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종교개혁이후 도그마 중심의 교조적인 정통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막 대두되고 있던 초기 계몽주의에 내재된 이성절대주의의 한계성(혹은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신앙(영성)의 고 유한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당시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 계몽주의 이후 이성적 합리성과 객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영성을 형성하고 자 했던 종교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종교적 인식론과 새로운 영성의 관점에서 경건주의와 오늘날의 포스 트모던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구명했다. 더욱이 낯선 타자와 사회적인 약자와 주변인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환대를 강조하는 데리다나 레비 나스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들과 회심한 이후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을 성화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던 A. H. 프랑케와 같은 경건주의자들 사이에는 그 의도와 지향성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경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상황에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이후 교파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던 서구 기독교 사회에 총체적인 위기와 파국을 가져온 30년 전쟁에 대한 신앙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19세기 말엽 서구 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몰락을 예감한 니체 같은 예언자적 인물에서 시작하여, 세계 1, 2차 세계 대전과 전체주의의 야만적 폭력과 폐해를 통해 이성 절대주의와 낙관적인 역사관에 대한 절망과 회의 속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항 문화적 성격으로 대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회적 위기와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시도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4.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8세기에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는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의 방향전환’(Frömmigkeitswende)을 시도한 운동이었다. 경건의 방향을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삶에 둔 경건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경건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다만 거 룩한 삶의 윤리적 완전성(Vollkommenheit)을 지향한 사람들이었을까? 그 들은 이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도덕주의자 혹은 율법주 의자였을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경건주의를 율법주의적인 도덕주 의와 비슷하게 생각하곤 한다. 경건주의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경건주의자들이 구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루터처럼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만이 다른 모든 교리가 흘러나오는 근원이라고 말하면서도 소위 ‘거짓 믿음, 죽은 믿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더불어 생명력 있는 믿음 생활, 거룩한 경건 생활을 강조하면서 능동적 선행만이 오직 참된 믿음의 표지라고 이해하였고,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법정적 ‘칭의’ 보다는 ‘중생’(Wiedergeburt)을 더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자 중에서 이러한 경건주의의 중생 개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새롭게 해석한 사람이 위르겐 몰트만이다. 몰트만 신학에 대한 경건주의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전개를 함에 있어서 진젠도르프의 기독론으로 부터 중요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어의 사상과 유사하다. 또한 몰트만은 종말론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슈페너, 벵엘, 외팅어의 종말론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롭게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 중생과 같은 구원론적 사상과 관련해서도 몰트만은 루터교 정통주의의 법정적 칭의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경건 주의적인 중생 개념으로 보충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몰트만의 구원론에 대한 경건주의의 영향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슈페너와 몰트만의 중생 개념을 비교·분석하여 경건주의 적인 중생 이해를 몰트만이 어떻게 수용·변화시켰는지, 양자 사이에는 어 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은 이 과정을 통해 몰트만 신학에 대한 경건주의 영향사 연구에 중요한 학문적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5.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독일 경건주의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경건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며 병을 얻었던 라이프치히에서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어머니의 친구 인 클레텐베르크 부인과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살던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롭고, 감각적이며 영감어린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특별히 이 시기에 괴테는 친젠도르프가 세운 헤른후트 형제단 회 원들과의 강렬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 괴테는 그들에게 매료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과의 신 학적인 입장의 차이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원죄를 긍정하 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들의 입장에 괴테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괴테의 입장은 그들에 의해 이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란 정죄를 받았다. 마 음의 큰 상처를 입은 괴테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아 버지의 서재에서 아놀드의 󰡔불편부당한 교회와 이단의 역사󰡕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입장의 정당성을 확인하였다. 그는 당대의 기독 교회가 교권에 의해 교리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초대 교회가 지녔던 신앙의 생동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이란 결국 각자의 신념의 문제로 파악하고, 특정한 기독교 신앙 전통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아놀드의 저서의 영향은 괴테의 문학 이곳저곳에 배어 있는데, 특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떤 지역의 목사가 어떤 지역의 신임 목사 에게 보내는 편지」, 「두 가지 중요한, 이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물음들」, 그 리고 「영원한 유대인」이다. 괴테는 아놀드의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도출된 개념과 모티브를 다른 삶의 영역과 작품에 적용하고 일반화시켰다.
        6.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루터파 정통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훈련을 받은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는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요 법학자로서 그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또한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거쳐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아 강의하면서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한편 제도적 교회와 대중신심에 자리 잡고 있던 미신과 무신론적 성향에 맞서 투쟁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의 “도덕론 입문”과 “도덕론 실행”은 당시의 비이성적 종교생활에 대한 답변으로서 토마시우스는 참된 종교란 내적인 예배와 신앙에 기인하는 것이며, 음욕과 명예욕 그리고 물욕이라는 부정적인 격정(정감)이 이성적인 사랑과 예배를 왜곡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신과 우상 그리고 무신론은 이성과 신앙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며, 참된 경건은 바로 이 점에 달려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세속화와 탈세속화라는 양극화를 걷고 있는 한국교회도 무신론과 미신이라는 도전 앞에서 토마시우스의 태도를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7.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nvestigate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universal Salvation) of the radical pietists, J. W. and J. E. Petersens.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had existed before the traditional view of twofold eternal destiny(blessedness and damnation) was established.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was systematized by Greek Father Origenes who was condemned as heretical at the Fifth Ecumenical Council in Constaninople in 553. The Reformers such as Martin Luther and John Calvin also condemned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as heretical. Despite its problematic nature, the idea has intermittently attracted speculative minds. During the Reformation, certain spiritualist and Anabaptist group advocated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Therefore the Confessio Augustana and the Reformed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also condemned the idea. In more recent times it was especially Radical Pietism that strongly propagated the idea that was abandoned. J. W. and J. E. Petersens as Radical Pietists were the unique and fascinating figures who reignited the pilot light of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in the Protestant world. They were in the initial stages influenced by the Pietist Father Ph. J. Spener’s eschatological view represented through “Hoffnung besserer Zeiten für die Kirche auf Erde.” They went further and without hesitation accepted and enthusiastically widespread the idea of apokatastasis panton. They argued that the idea of twofold eternal destiny after the last judgment contradicts the loving God who created the world as something very good and has through Christ redeemed the whole creation without any exception. They believed that evil cannot prevail against God’s original blessing and that “where sin increased, God’s grace increased much more”(Rom 5:20). They tried to ground their arguments upon the Bible. They agreed that the last judgment will take place and the unrighteous who don’t accept the gospel to the end and reject it, are destined to eternal punishment. However, they understand “eternal” in the sense of limited span compared to that of God. J. W. and J. E. Petersens did not agree that the teaching of apokatastasis panton would destroy not only the seriousness of sin, but also the urgency of repentance. Rather, they thought that the teaching of apokatastasis panton makes all humans realize the universal love of God and move them to live a grateful better life.
        8.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칸타타는 합창, 아리아, 레치타티보, 그리고 코랄 등의 다양한 편성 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각 악장이 제시하는 음악 역시 무척이나 다양한 양식과 작곡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칸타타의 가사도 그것의 음악 못지않은 다양한 층위의 역사 적, 신학적 의미의 결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별히 바흐의 칸타타에는 당대 의 신학적 흐름을 반영하는 정통루터교와 경건주의의 신학언어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서 로 다른 신학적 지향점을 지닌, 서로 다른 시인들에 의해 구성된 가사는 따라서 음악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 글은 바흐의 칸타타 가사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층위의 신학적 의미 를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칸타타 가사의 분석을 통해 정통 루터교와 경건주의의 신 학적 견지가 어떠한 언어로 등장하는지 설명할 것이다.
        9.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er Reformator Martin Luther hat eigentlich die Kirche, die er erneuert hat, nicht Lutherische Kirche, sondern Evangelische genannt. Da wurde das Evangelium richtig durch sie verkündigt. Es ist nicht leicht zu sagen, dass evangelicalism im 18. Jahrhundert geschichtlich auf die Evangelische Kirche im 16. Jahrhundert beruht. Aber die beiden haben die Kontinuität in der Theologie besonders auf dem Felde der Soteriologie, z. B. Gnade, Sünde, Wiedergeburt, Bekehrung etc. Eine solche theologische Kontinuität befindet sich im Pietismus im 17. Jahrhundert. Man denkt daran, dass Luther und die Pietisten in der grundlegenden Thematik der Theologie stimmen. In der soteriologischen Perspektive stimmt die Theologie von Ph. Jakob Spener mit evagelicalism über Gnade, Sünde, Wiedergeburt überein. Spener kennt das System der lutherisch-orthodoxen Theologie mit der Form ‘Loci’. Aber sie sind das dogmatische Lehrbuch für die Theologen nicht für die Laien. Wegen der Schwierikeit zum Verstehen der ‘Loci’ für die Laien braucht man einen neuen Weg zum Erreichen des Verständnisses für die dogmatischen Punkten. Damit benutzt Spener mit einer Reihe von Predigten von 1. Advent 1686 bis zum 26. Sonntag nach Trinitatis 1687 seine dogmatischen Gedanken: die Evangelische Glaubens-Lehre von 1688. In der Evangelischen Glaubens -Lehre zeigt sich, dass das Fundament der Theologie Speners zuallererst in der Heiligen Schrift und in den Schriften Luthers liegt. Spener beruft sich auf zahlreiche Bibelverse, insbesondere aus dem Neuen Testament, zum einen für den Beweis der Lehre, zum andern zur Orientierung für das praktische Leben der Christen. In die Evangelische Glaubens-Lehre beschreibt Spener die Möglichkeit der Harmonie zwischen der christlichen Lehre und dem christlichen Leben. In diesem Sinne kann die Evangelische Glaubens-Lehre als praktisch-dogmatisches Lehrbuch angesehen werden. Sie zeigt die fides quae creditur und fodert gleichzeitig von den Hörern bzw. den Lesern die fides qua creditur. Die christliche Lehre unterscheidet sich nicht vom christlichen Leben, sondern sie muss durch letzteres bestätigt werden. Speners die Evangelische Glaubens-Lehre führt das Wort des Systems der pietistischen Theologie. Auf Sicht der evangelical Theologie und des Inhaltes des evangelicalism im 18. Jahrhundert, man weiss, dass der Pietismus im 17. Jahrhundert nicht zum Ende gegangen, sondern in dem andern Ort und der Zeit weiter existiert.
        10.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Bei diesem Aufsatz geht es um die Untersuchung der Entwicklung des Konflikts zwischen der Hallischen Pietismus Pietismus und dem Herrnhutertum von N. L. von Zinzendorf. Am Anfang war Zinzendorf beeinflußt von A. H. Francke und dessen Hallischen Pietiesmus. Aber die Gründung Herrnhuts began den Konflikt der beiden Seiten zu verursachen. Alle Versuche einer Verständigung scheiterten. Die Gräben zwischen den beiden miteinander konkurrienden Typen des deutschen luthrerischen Pietismus zu tief. Der Prozeß der Trennung zeigt das Zusammenspiel unterschiedlicher Motive und Faktoren, die eng miteinander verflochten sind: 1. Urteil über die Person Zinzendorfs, die durch sein Verhalten mannigfache Bestätigung zu finden schienen, bestimmten das Mißtrauen Halles gegen ihn und seine Unternehmungen. 2. Die kirchenpolitischen Spannungen entzündeten sich an dem Engagement Zinzendorfs bei der Emitionen von Mähren und Zinzendorfs eigenwilligen Gemeineinrichtungen, die von den traditionellen Strukturen einer lutherischen Gemeinde abwichen. Die Rivalität wurde deshalb als besonders bedrohlich empfunden, weil Zinzendorfs Freizügigkeit im Umgang mit Heterodoxen und Separatisten den Pietismus als kirchlich-etablierte Richtung zu diskreditieren und zu gefährden schien. 3. Mit den kirchenpolitischen Spannungen waren die theologischen Differnzen eng verknüpft. Neben den Herrnhuter Gemeineinrichtungen und ihrer unklaren Stellung zur lutherischen Kirche ließen auch unorthodoxe Äußerungen von Zinzendorf und Herrnhuter Brüdern begründete Zweifel daran aufkommen, ob die Bekenntnisgrundlage der lutherischen Kirche gewahrt blieb. Hinzu traten vor allem die Differenzen im Verständnis der Heilszueignung (“Blut-und Wundenkult” versus “Bußkampf”) und daraus resultierenden Frömmigkeit und Ethik, die in der Folgezeit zu einem Hauptunterscheidungsmerkmal wu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