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성경의 일부 혹은 전부가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바울의 자기 고백을 수사학적인 도구로 본다. 로마서 해석의 역사에서 바울의 개인적 고백이 담긴 7장 7-25절은 율법을 논하는 다른 부분의 내용과 문체적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여담, 삽입, 낯선 내용으로 여기거나 혹은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시각이 존재해왔다. 사도의 권위로 어렵고 중대한 율법을 다루는 담론에 지극히 사적인 고백이 들어간 것은 바울적이지 않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것을 본문에서 벗어난 내용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난해하고 논란이 많은 율법이란 이슈를 1세대 크리스천 커뮤니티가 이해하도록 생생한 일인칭 내러티브로 설명한 문학적 도구로서 필수 불가결한 본질로 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보강하려고 사적인 고백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의 문학적 전략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믿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포용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율법이 죄냐?”는 그의 물음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로 대립하고 있던 교회 안의 두 그룹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고백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율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문학적 도구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정함과 관련해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 는 위선과 기만이라는 태도를 검토한다. 그러나 이때의 비판은 개인마다 상이한 기준과 수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명은 사실 특정한 행위와 모습에 대한 인식, 판단과 평가를 거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함을 해쳤 다고 평가되는 위선자는 어쩌다 타인을 속이게 된 이가 아니라, 의도를 지니고 공정함을 가장하는 인물로 비난받게 된다. 따라서 실제 위선과 기만은 그 자체 가 독립적인 대상으로 실재한다기보다는 사회구성원 각자의 인식, 판단과 평가 가 집합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위선과 기 만이라는 평가의 발생을 먼저 한 개인의 ‘고백’이라는 행위에서부터 살피려 한 다. 진정성 평가의 대상이 되는 고백 역시 단순히 개인의 양심이나 심정을 드러 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특정하게 주지하는 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셸 푸코가 지적했던 것처럼 고백의 과정은 개인 주체들과 사회적 기준과 구조들이 관계를 맺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일괄적인 공정함을 논하지만, 이는 각 구성원들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기준 에서의 판단임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고백의 형식으로 진술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루소 및 근현대 소설 텍스트들을 확인한다. 이는 위선, 기만 과 관련하여 고백이라는 기제가 개인의 내면적 진정성 표출과 그에 관한 규범 화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양상들을 함께 보여줄 것이다.
고백성사는 교회에 입문한 신자가, 세례성사에서 타고난 원죄와 이미 지은 죄를 통합적으로 사죄 받은 이후, 세례성사 이후로 지은 죄를 스스로 통회하고 사제에게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에게 용서받고 교회와 화해를 이루는 성사이다. 또한 고백성사는 성체성사와 연계된 성사로서, 성체성사는 비언어적이고 무의식적인 죄의 사죄를 포함하는 보다 종합적 성격의 성사인 반면에, 언어적 형식의 고백성사는 비언어적 성체성사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백성사의 존재의미를 본 연구에서는 한 실존적 개인의 죄의식의 문제와 해결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본 연구는 언어적인 담론 형식으로 이루어진 성사로서의 고백성사의 치유적 효과와 효용성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심리치료와 교회의 성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본 연구는 정신분석의 말하기 치료와 고백성사의 죄의 고백이 유사한 치유 효과를 나타냄을 보인다. 그리하여 고백성사는 한 개인이 죄의식에서 해방되어 그의 행동의 정당성을 획득한 후 선택의 주체로서 책임지는 실존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초기 단계에 개입하는 언어적 형식의 성사임을 규명한다.
본 연구는 체육교사로서 회의감의 근원적 문제를 찾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이준호 체육교사를 연구 참여자로 선정하고 생애사 연구방법을 활용하였다. 그 결과, 1) ‘스테레오타입과 문화’, 2) ‘훈육의 변화’, 3) ‘혼란과 자책’, 4) ‘참교사가 아닌 보통교사’의 내용이 도출되었다. 그 결과, 이준호 교사를 괴롭혀온 회의감은 ‘변화의 아이러니’로 설명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근원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결국, 학교 내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모순으로 인해 이준호 교사의 감정적 소진은 필연적 귀결이었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이 시대의 평범한 체 육교사임을 보여주고 한국사회 평범한 체육교사들의 삶과 고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판단된다.
이 글은 한국전쟁이 한국 개신교 교회에 준 영향을 규명하고, 이러한 규명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 교회의 평화선교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의 범위는 한국전쟁이 한국 개신교 교회에 준 영향이다. 이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 연구와 메츠(J. B. Metz)의 위험스러운 기억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희생자이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결과를 제시한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전쟁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교회 재건과 국가 재건, 개신교 교회의 구조와 성격, 개신교와 국가의 관계, 교회분열과 사이비이단 발흥 등을 다룬다.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의 특징으로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의 보루, 기복적 신앙, 신학적 성찰 없는 교회성장주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개신교 우파의 등장과 정치참여, 신학적 영향을 제시한다. 한국 개신교의 평화선교 과제로 죄고백, 회심, 전쟁 기억 치유를 통한 민족화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올바른 한일관계 수립, 희년을 이루는 교회 10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평화신학과 평화선교신학 수립, 평화교육, 민족의 코이노니아, 군축과 평화체제로의 전환 등을 제시한다.
몰리노스의 정적주의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의 핵심메시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과 회심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 적주의 테마를 설명하는데, 자신의 삶속에서 겪은 여러 사건들을 성찰한 후 그 리스도교인의 삶에 관하여, 특히 내적인 삶과 기도에 관한 명상을 했다. 고백 록 은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몰리노스는 아우구스티누 스 영성의 직속 후계자로서 그의 영적안내 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반향을 짙 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안에서 쉬도록 되어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어떻게 몰리노스의 내적인 삶 가운데 작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몰리노 스에 의하면 신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일은 그 분께 해야만 할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로서 신과의 통교는 자기 부정과 신안에서의 휴식의 중요한 측면이 다.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며, 또 신이 전 하는 뜻을 듣고 들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후계자 몰리노스 가 제안하는 신앙여정의 결론은 신에 대한 신뢰, 자아포기, 명상이며, 그럼으로 써 크리스천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약속한 성령 안에서 휴식과 쉼을 얻도록 그들 을 초대하고 있다.
이 논문은 대한장로교회 신경의 변천과정과 장로교회 각 교단의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1907년에 제정된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로 이름이 변경되고, 1934년 수정과정에서 문구의 수정 및 단어의 추가나 삭제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해방 후 장로교회 각 교단은 대부분 1934년의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저본으로 해서 현대철자법에 맞게 수정한 후 헌법에 수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예장 고신 교단은 2011년 개정, 공포된 헌법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을 삭제했으며, 예장 통합 교단은 1971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서언을 축소하고, 승인식을 삭제했으며, 제12조의 내용 중 불신자가 최후 심판 때에 형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역사적인 기원과 개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헌법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제정한 후에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사용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종교개혁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환(Alloeosis)” 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반박되어지고, 그에 의하여 “속성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로 주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속성간의 교류에 상응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신학에서 삼위의 “순환”(“사귐”)으로 전해지면서 신학용어의 오용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양성이 상호내재, 침투하여 연합 하는 신학이해가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원 의도를 약화시켰다. 교부들이 즐겨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사귐(communio κοιν ωνία), 참여(participatio),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함께 나누다’(socio), ‘관계’(societas 교제, 사회)를 사회적 삼위일체신학을 위해 사용했으면 훨씬 나을 뻔했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류와 삼위일체신앙 이해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속성간의 교류를 위하여 ἀντίδοσις ἰδιωμάτων, περιχώρησις가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연합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속성 간의 교류, 상호내재, 상호침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신 학은 보나벤투라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과 인식, 이성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고백은 한 순간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발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1세기 초기 단계의 신앙고백부터 공의회의 결과물로 나온 4세기 발전된 신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계속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정통신앙고백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각 시대마다 존재했고, 초기에는 대부분 사도적 기원으로 판단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기준이었지만, 다양한 성경해석의 문제 앞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사도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성경해석과 그들의 신앙은 정통이라 인정받았고, 이러한 사도성에 기준을 둔 신앙고백은 발전해서 4세기 공의회를 통한 신조까지 이어졌다. 본 논문은 성경에 나타난 신앙고백 이외에 사도들로부터 인정된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들의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그 범위를 성서시대를 넘어선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중반 ‘신앙규범’(regula fidei)이 등 장하기 전까지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초기단계를 살펴보았다. 이에 클레멘스 제 1서신과 이그나티우스의 일곱서신과 아리스티테스 저서와 순 교자 유스티누스의 저서를 다루면서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를 분석했다.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ain outline of Sujeong Lee’s thoughts of Christian faith and passionate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rough his two articles,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Sujeong Lee who became an associate member of the Korean delegation to Japan, headed by Younghyo Park(朴泳孝) arrived in Japan on September 29, 1882. He met Dr. Tsudasen(津田山), a Japanese scholar of agriculture. And he was much impressed by Tsudasen’s deep-rooted faith and sincere piety to God. As a result, he had so much interest in Christianity and dedicated to studying the Bible and various Christian books. By studying these books, he sought after the essential truth of the Christian faith. Through Japanese faithful Christians he was brought into contact with George W. Knox, Robert S. Maclay and Henry Loomis who were pioneer missionaries in Japan. And on April 29, 1883, he was examined by Yaskawa(安川亨) and baptized by George W. Knox. While he was in Japan, he devoted himself to various Christian activities and studied Christian doctrine to increase his knowledge of Christian truth and faith. As soon as Sujeong Lee found a new truth and sublime faith in Christianity, he was eager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When he believed in Jesus Christ he confessed his faith to the missionaries and Japanese Christians through the famous article(“Confession of Faith”, 「信仰告白書」) that he wrote with all his heart and soul in May 1883. And then, seven months later, he wrote another remarkable article (“Conditions in Korea”, 「宣敎師派送呼訴文」) on December 13, 1883 to appeal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the main thoughts and principles Sujeong Lee left behind us through “Confession of Faith” and “Conditions in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s:
① the principle of ‘internal combustion & extension’: There is organic corelation between Sujeong Lee’s internal faith and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② triple methodology of effective mission for Korea: ‘Bible translationestablishment of church-inviting missionaries’
③ conservative faith: Sujeong Lee stressed the belief of apostolic faith, sola scriptura, sola gratia, and sola fide.
④ plea for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since he had showed strongly his earnest desire for American Christians to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⑤ indignity of mission: Sujeong Lee, the native Korean fully committed himself to the ministry of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
⑥ attempt to provide efficient policy for early mission to Korea: Sujeong Lee put a strong emphasis on Christian education.
⑦ mission initiated by Korean: Sujeong Lee was the pioneer Korean Christian.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 his great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es:
First, he translated the Bible into his native language. When Henry Loomis, the American Bible Society directing manager in Japan had asked Sujeong Lee to undertake the translation of the Gospels into Korean, he was pleased to accept it. He then began, with the help of Chinese and Japanese Bibles, to translate the Scriptures into Korean such as ‘Hyeon To Han Han Shinyak Seong Seo’(4 Gospels and Acts, 1884), ‘The Gospel of Mark’(‘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1885), ‘The Gospel of Luke’(1885), ‘Romans’(1885) and so on. He believed with absolute certainty that the Korean Bible would be an effective means for extending the true Gospel to Korea without distortion. And he also expected that the Korean Bible would provide an effective tool for the early missionaries to propagate the Gospel to Korea. Horace G. Underwood, Henry G. Appenzeller and William B. Scranton, coming to Korea through Japan, had in their hands ‘Shinyak Maga Bokeumseo Eonhae’ in the Korean language.
Second. he shared the Gospel with Korean students in Tokyo and opened the Korean Sabbath School in 1883 for Christian education. He taught them the Bible and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Third, he appealed to American Christians for mission to Korea. He showed actively his ardent desire to send American missionaries to his motherland as soon as possible. So he was called a Korean Macedonian. As a result of his efforts, the first ordained American missionaries, Horace G. Underwood and Henry G. Appenzeller came to Korea on April 5, 1885.
These practical efforts for mission to Korea show that the early Christian mission activities in Korea was started by Sujeong Lee, the pioneer Korean Christian.
The paper analyzes the concept of love in St. Augustine’s De Confessione, in which Augustine makes use of an analogy of human love in to describe the ineffable nature of the divine love. Augustine presents a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phenomena of human love: sin and concupiscence. Augustine demonstrates how he could overcome such spiritual desperation and sinful desire. Augustine could not solve the problem of sexual passion by way of Ciceronian philosophy, Manichaean dualism or Platonic philosophy until his heart surrendered to a full determination (at the garden of Milan). Although Augustine expresses remorse about the depravity of his erotic love, he utilizes the language of sexual love to express the divine love.
Augustine confesses that concupiscence is the prevailing aspect of the misdirected love. Augustine could not escape from the tyranny of concupis-cence. and experienced a self-disintegration because of addiction and despair. Augustine reached the true face of evil. Augustine claims that evil is not merely evil acts but the very will to violate God’s goodness. Evil begot habit; habit produced necessity. Augustine could not free himself from the necessity: the compulsion of two opposing wills. The sick heart must be healed before enjoying the divine love. All modes of love should surrender before the divine love, because the latter is the creator of the former.
The divine love is beautiful. It is the source of satisfaction. Augustine’s rhetoric depicts the beauty of the divine love with the images of fire, flower, and other created things. The divine love is the healer of a human soul which is sickened by desiring the created things such as money, sex, and power. Augustine’s soul found rest in the bosom of the divine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