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신학회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1991년에 준비모임 후 1992년에 창립되었다. 학회 연도 구성은 두 단계로, 1991-2000년까 지 태동과 준비기, 2001-2022년까지 도약과 안정 그리고 학회의 세계화 현장으로 정리된다. 외형적으로는 첫째, 학회 내실 있게 한 시기로, 회원증가, 논문발표, 회원들의 저술 활동 나아가 교재 개발이 있었다. 둘째, 연합활동으로는 국내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와 해외 선교단체들과 연대 학술대회, 특히 세계선교학회(IAMS)와의 교류이 다. 내형적으로는 「선교신학」 학술지 특집 발간으로 학회의 전문화, 등재학술지로 확대, 그리고 다양한 학술대회 등이 연 4회 이상 전문화와 특성화를 갖춰 개최되었다. 앞으로 한국선교신학회는 선교의 무수한 외형적 변화와 선교 본질의 내부적 단결과 단합으로 복음이라는 울타리 를 넘어 증거하며, 본질적 선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확증해 가야 한다.
본 논문은 한국선교신학회가 「선교신학」 학술지를 통해서 지난 30년 동안 다룬 선교학적 주제들을 고찰한다. 「선교신학」에서 중점적으 로 다룬 주제 중에는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 “이민, 다문화, 디아스포라 선교” 이렇게 세 가지 중심주제들이 있다. 각각의 주제들은 선교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해당 주제들이 갖는 선교적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고, 「선교신학」에 실린 논문들의 저자와 제목을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해당 주제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연구한다. 이를 통해 한국선교신학회가 지난 30년 동안 「선교신학」을 통해서 선교신학 연구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 보고, 앞으로 어느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지 고찰하고자 한다. 보다 발전된 선교신학적 연구를 위해서 연구자는 앞으로 「선교신학」에 선교지역별 연구, 선교역사 연구, 그리고 국내선교단체 및 NGO 단체에 관한 연구를 제안한다.
한국선교신학회는 1992년 설립되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30년 역사의 초기에 대한 발전역사를 세 가지 방향에서 정리했다. 먼저 한국선교신학회의 기원을 기술하고, 초기 학술대회의 발전과정을 정리했다. 여기에는 학회설립을 위한 토론과 준비과정이 포함된다. 다음으로 학회의 학술지 「선교신학」의 기원과 발전역사를 기술했다. 학술지는 1997년 창간호가 발행되었으나 학술 진흥재단에 등재되지 못했고, 2002년 등재를 다시 추진하여 2005년 등재후보지, 2008년에 등재지가 되었다. 끝으로 학제 간 협력과 학술교 류의 발전을 연대기 순서로 정리했다. 세계선교학회를 비롯한 국제적 학술교류와 국내의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와 연합학술활동 등을 기 술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자주와 인권이 짓밟혔을 때 천도교와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이에 적극 참여했다. 세계사와 구속사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만세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구원받은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교회사뿐 아니라 전체역사를 그 영역으로 삼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참여한 만세운동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하나님 의 선교 관점에서 3·1운동과 익산4·4만세운동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의 관련성과 선교역사적 의미를 준비과정과 피해상황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이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를 책임 진 조지송의 산업선교 활동을 제시하고 그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의 선교로부터 얻는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는 평신도를 통한 산업전도, 노동 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소그룹 활동으로서의 산업선교로 전개되었다. 그의 산업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십자가의 길로서의 산업선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현존으로서의 산업선교, 디아코니아로서의 산업선교, 노동의 신학과 산업선교, 산업선교와 돈, 노동조합 교회론: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산업선교와 구원 론, 바보들의 행진, 어릿광대 공동체로서의 산업선교이었다. 그의 산업선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무자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 실무자와 노동자 및 학생, 목회자,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교육의 언어는 몸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언어, 산업사회에서 현존으로의 선교 등이다.
선교역사에 대한 기술이 서구의 입장에서 점차 비서구의 수용사 (受容史)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장로교 알렌이 내한한 1884년 혹은 감리교 아펜젤러가 내한한 1885년 을 기준으로 1984~1985년에 걸쳐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 내한 이전에 중국에서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성경번역까지 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자생적 ‘소래교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더구나 내한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누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추동력과 내부로부터의 흡인력을 모두 고려하는 중도파 ‘역사기술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선교사 내한 이전에 일어난 최초의 선교사건까지 포괄하는 선교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관점에서 한국선교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은 선교 명령이 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말씀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이 주어진 때와 상황을 미루어 본다면 선교가 얼마나 기독교 신앙과 교회 사역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논문은 먼저 초기 기독교 시대에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역동성과 방식이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형성된 국가교회 체제에서 어떻게 변질되었 는지를 설명하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도 국가교회 체제를 수용했 던 관료의존적 개혁 진영은 선교의 개념과 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점을 지적한 뒤에, 동시대에 국가교회 체제의 청산을 주장하면서 등장한 아나뱁티스트 개혁에서 초기 기독교의 선교 개념과 방식이 회복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글은 ‘콘스탄티누스 전환’이라는 현상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선교적 원천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본 논문은 1990년부터 베트남에서 활동해온 장요나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특히 장요나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교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장요나 선교사는 해당 국가가 복음전파를 금지 하고 있는 법을 어기고 복음을 전했다는 점에서, 본국에서 교단을 초월한 협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반면에 언더우드와 달리 장요나 선교사는 베트남 현지에 있는 선교사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을 의사로 사칭하며 선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과 자신의 질병을 돌보지 않고 선교사역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인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지속해온 장요나 선교사의 선교사역은 교회, 병원, 학교설립 등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는 점과 그가 추구하는 베트남을 포함한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인도차이나반도 선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본 논문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남북통일을 향한 선교역사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컬(ecumenical) 입장과 복 음주의(evangelical)의 입장에서 북한선교와 통일을 다루었는데, 거 기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선교는 북한의 복음화에 집중하고, 반면에 에큐메니컬 입장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통일 자체를 선교라고 본다. 이런 두 진영의 차이에도 남북 간의 통일에 대한 문제는 선교신학적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적인 문제이며, 한국교회 의 선교적인 책무이다.
본 논문은 통일에 대한 관점을 통전적인 시각으로 전개하였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남북통일 문제는 에큐메니컬 입장이나 복음주의 입장, 어느 한쪽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관점에 서 다루고자 한다. 본 연구는 통일을 향한 선교신학적인 관점으로서 북한선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다루었고, 통일에 대한 선교역사 적인 관점을 설명하였다. 또한 남북 간의 통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이해하면서 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접근과 제언 을 시도하면서 한국교회의 과제를 논의하였다. 현재 남한에서는 통일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계속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북한선교와 통일을 다루었다.
남북통일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부여하신 주님의 명령이며, 사명이며, 중요한 과제이다. 남북통일을 이루어 가는 길은 샬롬의 평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남북통일은 북한의 복음화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 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경을 메시아의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으로만 해석한다면, 구약의 내용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사에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언약,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와 이스라엘의 역할 등을 간과하는 것이다. 가령 메시아 예언의 핵심인 구약의 하나님의 ‘종’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가리키고 있어서 ‘종’을 철저히 개인으로 해석하는 기독 교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종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공히 선교적 사명을 가진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종’에 대해 선교적 해석을 할 때 그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열방의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언약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실현하는 다윗의 언약이 약속에 따라 보냄 받은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하나의 이야기(메시아적 해석)는 결국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선교적 해석)와 합류된다. 그러므로 성경전 체를 읽는 해석학적 방향은 메시아적이면서 동시에 선교적이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성취한 예수에게로 모아진 초점은 예수로부터 온 세상으로 파송(Missio Christi)되는 해석학적 체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모세 오경을 ‘선택,’ ‘출애굽,’ ‘율법’이라는 주제어를 가지고 선교적 해석을 하고, 구약의 역사서를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이라는 주제어를 가지고 선교적 해석을 시도하 고 있다. 이것은 구약에서 선교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 선교의 기초를 놓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선교’의 이야기라는 해석 학적 틀로 성경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본 논고는 기독교 선교 전략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다민족, 다문화 지역에 대한 선교 전략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에 합당한 전략을 모색할 것인가를 러시아연방 내의 북카프카스 지역을 사례로 들어 논증한다. 즉 하나의 국가 내에서 다문화 이해를 통한 선교 전략에 대한 논의를 러시아연방 북카프카스 지역의 인문지리, 역사, 정치적 상황을 통해 통찰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다. 본 논고에서는 북카프카스의 다민족 국가의 선교 접근 전략을 북카프카스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북카프카스에 속하는 체첸 민족을 북카프카스 민족 그룹의 대표 주자로 선정하여 체첸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 정치, 사회적 관계를 다루고 있다. 하나의 소수 민족을 연방 내에서 분석하는 것은 다민족 선교에 매우 주요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판단된다. 체첸이 소연방 해체 이후 독립을 추구하였는데, 이 사실은 다민족 국가에 속하는 민족 그룹의 역사적, 정치적 특성들을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민족, 다문화 선교전략의 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 본 논고는 북카프카스 인문지리 특성, 그리고 체첸공화국의 인문지리, 역사적 기원, 러시아 민족과의 관계, 체첸 전쟁 등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다민족 국가의 선교전략을 도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본 논고에서 필자는 다민족 국가의 선교전략은 치밀한 지역연구를 통해서 그 전략적 방향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으며, 민족의 종합적 상황을 통해 구체적인 선교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역사는 주어진 사료(史料)을 기술하는 것(history)으로는 충분하 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해석된 역사(Geschichte)일 때 진정한 역사 이기 때문이다. 초기기독교는 박해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 이유를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그린은 확산의 저해요인을 들어 설명하였 다. 이와 반대로 페스틴저는 ‘인지적 부조화이론’을 들어 심한 박해가 도리어 열정적인 선교를 하게 했다고 보았고, 이를 수정한 게이저는 임박한 종말의 기대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로 대체되었고 하였다. 이에 비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지금까지의 수용사(受容史) 중심의 선교역사에서 벗어나 전달자와의 관계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의 객관적 사실을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이를 초기기독교 확장사에 적용하면 복음의 확산에 기여한 흡인력으로서 내적요인과 추동력으로 서 외적요인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흡입력으로서의 내적 요인은 선교 를 위한 신학, 순교자로서의 증인, 강력한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라 고 할 수 있고, 추동력으로서의 외적 요인은 세계를 통일하고 있었던 로마의 정치와 문화, 당시 문명이 서로 교차하는 세 개의 대륙이 서로 만나는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복음과의 만남은 영적 회심과 더불어 지적 전향을 유발시킨다. 회심이전의 한 개인의 생애이든, 혹은 그가 속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 문화적 전통이든, 기독교도래 이전의 역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어떻게 재조명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역사인식의 전환을 이룬다는 것이다.
함석헌(1901-1989)은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성서가 제공하는 하나님의 속성, 역사적 사관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가페이며, 그러한 속성이 역사의 원동력을 이룬다고 보았다. 특히, 성서가 제공하는 사관은 바로 고난사관으로써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를 발견케 하도록 이끄는 신의 의지임을 말해준다. 고난의 과정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바탕위에 함석헌은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 한국의 전(全)역사를 그가 깨달은 성서적 시각에서 재조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의 역사, 종교, 지정학적 위치도 바로 ‘복음을 위한 준비’ (praeparatio evangelica)였다고 본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역사라고 본 함석헌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라기 보단 기독교 역사 철학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의 저술은 선교학적 시각에서 볼 때 복음의 전파과정, 수용과정에서 나타나는 복음과 문화와의 상관성, 상황화, 토착화와 같은 이슈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해는 기독교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역사서술의 한 국면으로 세대적인 추이와 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역사서술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적 시각에서(제1세대), 복음을 수용하는 현지인적 시각으로(제2세대), 그리고 이 모두를 양방향에서 통합하려는 재조명의 시각으로(제3세대) 발전되어 왔다. 그 추이를 보면 더 넓고 깊은 범주의 역사를 향하여 그 맥락이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그가 속한 전통과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의 빛 아래서 그가 속한 전통과 처한 상황을 다시 재조명하려는 3세대적 시도를 하고 있음을 본다. 선교적 시도가 한 영혼의 회심인 것처럼, 역사가 자신의 회심뿐 아니라 역사 자체도 다시 회심된(converted) 역사로 전환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충분히 선교적이라 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 역사에서 선교적 교회를 위한 토론은 계속되어 왔다. 국제선교협의회가 1921년 창립된 이래 교회의 선교적 의무가 주요 토론의제였고,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설되면서 이 두 기구의 통합을 위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이 논문은 1961년 뉴델리에서 IMC로 대변되는 ‘선교’와 WCC로 대표되는 ‘교회’가 기구적 일치를 이루는 역사를 먼저 다루고, 선교적 구조를 위한 토론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근거와 그 핵심 내용을 밝혀서 오늘날 선교적 교회 논의에 기여하고자 한다.WCC 중앙위원회는 두 기구의 일치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하여 ‘선교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소명’이라는 ‘롤(Rolle)선언문’을 채택하고, 일치를 위한 초안을 1957년에 제안하였다. 이를 WCC 중앙위원회는 1957년, IMC는 1958년 가나 총회에서 각각 수용함으로써 두 기구의 일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교회의 선교적 구조’에 대한 에큐메니칼 토론은 각 대륙별로 진행되었다. 먼저 ‘서유럽연구그룹’은 1965년 1차 연구를 마무리하여『구조원리로서의 선교』라는 보고서를 내었고, 이를 바탕으로『선교적 교회구조를 위한 투쟁 안에 있는 타자를 위한 교회』(Die Kirche für andere im Ringen um Strukturen missionarischer Gemeinden)를, 북미에서는『세계를 위한 교회』(Die Kirche für die Welt)를 출간하였다. 아시아 교회는 플레밍과 라이트가 각 지역에서 보내온 일부자료를 토대로 『선교적 교회를 위한 구조』를 1964년 공동집필하였다.선교적 교회를 위한 에큐메니칼 토론의 신학적 기여는『구조원리로서의 선교』이며, 교회론의 핵심인 ‘타자를 위한’ 명제는 본회퍼(D. Bonhoeffer)에서 비롯되었다.『타자를 위한 교회』는 샬롬(Schalom)이라는 성서적 개념으로 집약되며 이것은 후켄다이크(J. C. Hoekendijk)에 의해 발전되어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계’의 구조가 ‘하나님-세계-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outline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ailand and its characteristics, tasks and mission theological issues so that the thesis searches for the wa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o contributing to the unity and empowerment of the Church of Thailand. To achieve this aim, the thesis deals with the social characteristics and value systems of Thai society and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Roman Catholics and of Protestants. Through suggesting the contour of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ailand, some characteristics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are church plant, church-centered passion, project-centered and materialistic mission, and independent seminaries. Tasks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in Thailand are acceptance of Thai Christians' critiques on Korean missionaries, Korean missionaries' understanding of Thai culture in depth, meagerness and lack of mission strategies, halt in mission, missionary kids' education, partnership in mission, acceptance of difference of Thai church culture, understanding of the missionary tasks from the socio-cultural and religious situation of Thai church, and theological issues. The main results of the research are as follows: first of all, there are two kinds of church in Thailand: one belongs to 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the other to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Some Korean missionaries, however, established independent denominations and ran seminaries so that those denominations and seminaries obstructed the unity of Church in Thailand. These activities of Korean Church cannot be regarded as mission. Secondly, Korean missionaries to Thailand should not transplant the culture of the Korean Church to Thailand. Rather with Thai Church leaders, their missionary tasks are looking for the ways of how to communicate and share the Gospel with Buddhist Thais and identifying the appropriate ecclesiology in Buddhist society. Thirdly, the future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to Thailand depends on whether Korean missionaries could expand the model of the partnership in mission done by the missionaries belonged to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o the relation between the Church of Thailand and Korean missionaries. Lastly, such an expansion of the model of the partnership in mission will be possible only when the ecumenical churches and the evangelical churches can reach a common conclusion through coming to an agreement on the theological issues such as human-centered theology, religious pluralism and mission methods and mission theology in the Buddhist country.
This paper is to study the missionary reflection of social service mission in Korea church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When reflecting social service of Korea churches according to the historical features, it could be divided as before and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The social service before the liberation could be summed up as ‘un-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had been conducted to Korean people in poverty, diseases and ignorance during the beginning of mission by the missionaries. The other could be summarized as ‘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is recognized the ideological conflict and the suffering from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and the Korean war and ‘holistic service period’ that tried to avoid a crisis into social service mission as Korea churches in quantitative growth were experiencing stagnation. The mission before the l945 liberation was an education and a medical service as the approaching method in Korean society. But those services were one method for evangelism because they were based on conservatism theology of early missionaries. So, there was no missio-theological reflection for the extension of God’s Kingdom that Jesus Christ proclaimed in the world. Therefore early Korean churches are ‘un-structural service period’ that emphasizes only individual's spiritual salvation in the absence of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cial service of Korea church was ‘solidarity period’ that tried to find a clue of national problem solution from a rural community movement. Korean churches in the 1920s began to recognize social salvation and the world’s structural problems. The rural community movement also developed actively for about 10 years from the 1920s to the mid of 1930s, but it should be stopped due to the oppression in and out of church in the late 1930s. Even though there were many believers who died of dire persecution, many main religious associations in Korea found the way to live in sympathy with the visit of Japan’s shrine. After the 1945 liberation Koreans experienced both the joy of liberation from Japan and fratricidal war. In this period the duty of Korea churches was to save Clients in want and received financial support from the western churches because of economical poverty and impoverishment. And the April 19 pro-democracy movement in 1960 was happened due to the political corruption, but the democratization retreated because of the May 16 military coup in 1961.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are promoted as focusing on the economic development, and UIM that helps the human rights abuses of workers origins. In this period Korean churches begin to open their eyes about the evil of social structure and illegality and corruption stemming from the huge gap forming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materialism and the negligence of humanity. So this is ‘structural service period,’ for Korean churches that are focusing on the individual’s spiritual salvation become to recognize the evil of social structure and injustice as mission work. Finally, since Korean churches after the 1970s are interested in the church’s growth and expansion, they are not into social service. The economic growth by the military regime caused trouble such as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environmental disruption and materialism and formed urban slums. And also Korean churches that disregard these problems are contaminated by growth-oriented theology, but they surprisingly growed with the military regime. In this period the large scale gathering and revival are lively held, and churches closely cooperate in turning the concern about human rights and democratization into individual’s spirit salvation and blessing. As a result, Korean churches after the 1990s have been put aside in the society and stagnated constantly. Now Korean churches stand in between temptation of growth and responsibility of social service. The early Korean churches created the way to mission through social service building up many hospitals and schools as a method of evangelism. Therefore, Korean churches should revive a tradition of holistic mission with both 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
This paper is to study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social service mission in Korea church before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The classification of an era for historical analysis about social welfare in Korea church is not only necessary, but also is dangerous. Because it could be depended on subjective classification of the researcher, simplified complicated historical processes, and there would be a possibility to classify it individually or selectively. Nevertheless, a missiotheological reflection about christianity society service in the Korea mission history will be meaningful to many people who study social service mission according to the classification of an era and important to Korea church which is in stagnation. In this context, the summingup to social service mission of Korea church before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according to period features is necessary. There are two kinds of mission service characteristics in the protestant. One of these is Luther, Calvin and Knox as an ‘ecclesiastical’ type, and the other is sure salvation by individual experience of faith as a ‘nonecclesiastical’ type. Mission movement after Pietism mainly took the 'nonecclesiastical' typ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hich preached the gospel to Korea also was offsprings of the ‘nonecclesiastical’ type. The faith of these people, as a type of pious Puritan, thought a concept of church is the same as an ark separated from the world. It shows at the constitutional law of the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 and the guideline of mission agency. Despite their spiritual salvation separated from the world, nonpolitical actions, and irrational and dualistic faith as what is called an ‘evangelist,’ these people began education and medical works as a starting point of mission at the beginning of Korea mission. These were based on the considerate help and charitable service by each missionary. This type of faith made emotional bond with Koreans in unhappiness as a method for propagating the gospel even though there was not an attempt grasping the underlying and structural problems which were causing miserable lives and political suppression to the pioneer missionaries. So, the local section was set up in ‘Christian Council’ in 1925 and the rural section was set up in 1930, but these were only recognized as ‘something for mission works.’ For example, the local section of ‘Christian Council’ in 1930 was limited only for the dormitory foundation, missionary sending, sewage factory demolition, temperance movement and combined execution of help works. This kind of early mission, which was an unstructural service has the same basis with pious ‘Mitleid’ to the lost souls. Pietism against protestant’s legitimism in the 17th century and illuminism in the 18th century was an important movement that awakened stagnated mission work newly, but focusing on an individual’s complacency and conversion it became the important motivation of mission and the important goal of mission only to save each person from corrupted world. Therefore, the mission of unstructural service has some limitations that restrict missionary works only as a province of converted spirit, given Missio Dei erecting the sovereignty of Jesus Christ and expending the kingdom of God in this world. It was from 1920 that Korea church started to recognize the basic cause of social problems systematically. And also this is originated from the development of international missiotheology. As the first World Missionary Conference held in Edinburgh in 1910 predicted the world evangelization hopefully, it was based on mission for a human being’s spirit salvation. Consequently, it did not develop the christianity's influence beyond individual spirit salvation. But after Edinburgh conference the world’s history was changing by contraries because of World War. So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after 1910 was not held. In Jerusalem conference in 1928 the recognition about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gospel, secularism and other religions was on the rise strongly. Thus, Korea church in the 1920s was interested in social welfare mission according to the stream of world missionary and the social change of Korea(Chosun). Since this was the creed copy of church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Japan, this social welfare mission had a problem not to include independency and a demand of the times. Many social service movements such as roll back of tuberculosis, medical work, settlement work and moderation movement, and service for women and children’s welfare, therefore, showed the limita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 church tried to find a clue of national problem solution from a rural community movement because it was based on a type of national church against Japan. The rural community movement also developed actively for about 10 years from the 1920s to the mid of 1930s. However, it should be stopped due to the oppression in and out of church from 1938, for it should choose either religious martyrdom or a conversion to rural community movement. Korea church have experienced a special period in which it practiced society service jointly with Korean people who were in poverty, diseases,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Nevertheless, Korea church separated from the society due to the limitation of its conservative theology that could not catch fundamental social problems structurally and the faith that salvation is restricted within the individual spirit. This is why Korea church is experiencing its stagnation since the 1990s.
If you want to write a mission history, academic dilemmas hinder you to sustain objective perspectives due to your confessional orientation. We mission historians believe that God has a grand plan of salvation for humankind and we are witnessing His story in the history of mission. Secular historians, however, do not believe in this kind of confession orientation. Rather they despise this kind of approach as the lack of academic objectivity. We mission historian must find the third way for writing mission history which could be shared not only with our fellow Christian scholar but also secular historians who believe in the objectivity as the primal condition for writing history. This paper suggests the method of Jacob Burckhardt(18181897) who proposed a flexible approaches in historiography. He criticizes that history is neither logic nor philosophy which is logical framework is firm and decisive. History writing should, according to Burckhardt, flexible because the interpretation of history should be open. The present author shows that this kind of flexible historiography could be accommodated in a new way of mission historiography. To show an example the author interprets the early Jesuit Missionary Matteo Ricci from the flexible mission historiography: Push factor and Pull factor. The author claims that writing mission history in more flexible historiography could be achieved by comparing push factor of missionary sending and pull factor of missionary receiving. Early Jesuit mission history will be more flexible if we approach the Jesuit mission from politics(of missionary sending from 16thcentury Europe and missionary receiving from the late Ming China's political situation), culture, and reli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