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동역자로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무슨 선교를 행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적 연구가 필요하다. 본 글은 우선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게 한 선교신학적 근원을 검토했다. 이는 한국장로교 회가 강조한 영적 교회 설립과 개인주의적 영혼구원 선교였다. 이 정책은 초기 한국인과 갈등을 빚었다(1884-1910). 뒤이어 본 글은 영혼구원 선교에 더하여 사회선교를 강조한 통전선교를 행한 쉐핑 (Elisabeth J. Shepping, 서서평, R.N. 1912-1934) 선교사의 선교 를 검토하고, 그녀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한국인지도자들의 선교와 특징을 분석하였다(1910-1960). 이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통전 선교와 예수 제자도 선교를 하였다. 본 글은 이 특징들이 오늘날 복음주 의 로잔 문건과 WCC 선교문건에서 어떻게 논의되는가를 살폈다. 이들은 주변부 선교, 변혁적 통전선교, 성육신적 제자도 선교인데, 본 글은 이들의 한국교회 적용을 논의했다.
『깊은 강 』은 엔도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던 문학적 테마인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을 탐구한 역작이다. 마음의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받기 위해 인도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힌두적 환경과 갠지스 강을 통하여 개별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고통을 무화시키는 갠지스 강은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전생까지도 함께 포용해 흐르는 신적 실재로 나타난다. 어머니로서의 강은 영혼을 정화하며 초월을 지향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엔도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서양의 하나님을 체화하지 못하고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예수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고통을 위무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인간의 모범을 보여준 성자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성을 고양시키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관점에서 은유적 성육신에 해당하고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성육신은 반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예수를 본받은 오쓰의 성육신은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의 원형으로 떠오를 수 있다.
본 논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성육신의 의미와 그 분을 통해 나타난 선교적 삶의 모습을 근거로 통전적 선교를 위한 현대교회의 성육신적 모습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그 모습을 정리하면, (1) 사도적 리더십으로 한 몸된 ‘모이는 교회,’ (2) 메시아적 영성으로 존재하는 ‘공생하는 교회,’ (3) 그리스도적 성품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열린 교회,’ (4) 복음적 침투성으로 파송된 ‘흩어진 교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택함 받아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이시다. 때문에 예수와 한 몸된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고 파송된 선교적 교회로 존재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략적이고, 마케 팅적이며, 공격적 형태의 일방적 선포방식에 메여 있는 현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를 깊이 깨닫고 실천함으 로서 올바른 복음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고, 일상에서 나타나는 언행, 성품, 태도와 같은 삶의 전 영역을 통한 통전적 선교의 선교적 교회와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성육신된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참된 인간 그리고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육신적(incarnational) 방식의 종교이다. 그러나 교회의 탈육신적(excarnational) 경향 — 특히 찰스 테일러의 책 『세속의 시대』에서 처음 제기되었던 이슈 — 은 21세기에 디지털화, 사이버화, 가상화, 그리고 사이보그화의 요소들로 인하여 더욱 문제화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 제안하는 것은 특히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의 영역들 안의 탈육신적 철학과 응용들을 반하는 방식으로 성육신된 그리스도가 본이 되신 참되고 “육신화된 혼”(embodied soul), 또는 “영혼화된 몸”(ensouled body) 패러다임의 기독교로 귀환하는 것이다. 선교적 함축은 사이버공간을 가상의 영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사이버공간 안에 소외되고 또는 사로잡힌 현세대의 탈육신된 마음과 혼, 특히 의식을 건져내기 위하여 사이버공간 안으로 전략적 침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의 선교적 동인과 선교주제를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고찰한다. 복음전도를 기록목적으로 명시한 요한복음은 비르카트 하-미님과 성전파괴가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의 동인이 되어 선교문서로서의 지향점을 갖는다. 1-4장의 하나님의 선교 주제는 예수의 지상 활동을 선교신학의 관점으로 이해하게 한다. 성육신은 창조와 구원의 사건이자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자녀삼기 위한 전인격적 섬김과 증언이 핵심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는 구원의 무대인 세상에서 사랑으로 경계를 해체하여 믿는 자마다 구원으로 초대하는 죄와 구원의 보편성을 제시한다. 예수의 선교는 아버지의 선행적 주도권을 인정하고 보내신 이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선교의 지속성을 담보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교제와 협력은 예수 시대의 제자들과 교회에게 추수의 참여자가 될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신 성육신 사건은 신자들을 위한 구원론의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사역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왜곡된 삶의 태도와 사역을 비판하고 진정한 삶과 사역의 원리를 제시한다. 본 논문은 선교적 교회의 실천원리로서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한 뒤에 상황화의 관점에서 성육신적 사역의 구체적인 실천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육신은 기독교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구원론의 근거로 인식되었 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 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교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의 성육신 은 인간의 삶의 현실 안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경계를 넘어 상대방의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선교를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선교의 내용과 이유와 방법을 알려준다. 더 나아가 성육신은 선교의 방법론적 모델이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의 존재론적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성육신적 사역은 구체적으로 상황화의 과정을 통해서 구현된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가 그의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에서 제시한 세 가지 통찰 곧 이해, 연대, 책임적 행동의 개념을 통해서 선교적 상황화의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성육신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게 복음을 들고 가려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가장 먼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 또는 어떤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과 조건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로, 성육신적 사역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과의 연대다. 이런 연대는 먼저 일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며 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용기에 의해 가능하다. 세 번째로, 성육신적 사역의 마지막 과정은 책임적 행동이다. 이 책임은 세상의 실존과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미래”(what is to become of it)에 대한 책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세상을 “갱신”(renewal)해 야 할 책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신 성육신 사건은 신자들을 위한 구원론의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사역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왜곡된 삶의 태도와 사역을 비판하고 진정한 삶과 사역의 원리를 제시한다. 본 논문은 선교적 교회의 실천원리로서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한 뒤에 상황화의 관점에서 성육신적 사역의 구체적인 실천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육신은 기독교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구원론의 근거로 인식되었 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 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교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의 성육신 은 인간의 삶의 현실 안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경계를 넘어 상대방의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선교를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선교의 내용과 이유와 방법을 알려준다. 더 나아가 성육신은 선교의 방법론적 모델이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의 존재론적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성육신적 사역은 구체적으로 상황화의 과정을 통해서 구현된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가 그의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에서 제시한 세 가지 통찰 곧 이해, 연대, 책임적 행동의 개념을 통해서 선교적 상황화의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성육신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게 복음을 들고 가려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가장 먼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 또는 어떤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과 조건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로, 성육신적 사역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과의 연대다. 이런 연대는 먼저 일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며 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용기에 의해 가능하다. 세 번째로, 성육신적 사역의 마지막 과정은 책임적 행동이다. 이 책임은 세상의 실존과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미래”(what is to become of it)에 대한 책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세상을 “갱신”(renewal)해 야 할 책임을 말한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교단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제사가 큰 어려 움 없이 추도예배로 정착된 것 같다. 그러나 제사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모 교회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중 대표기도 하는 분이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성도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예식을 참여함 으로’ 믿음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람직하지 못한 예식’이라 함은 물론 제사를 칭하는 듯하다. 조상제사는 신자의 가정에서 추도예배로 대치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결혼하여 불신자 가정에서 생활하든지 혹은 불신자 가정에서 예수를 믿게 되어 그 집안에 첫 신자가 되었을 때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복음이 전파된 후 한국 천주교는 정부의 극한 박해를 거쳐 조상제사 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제사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 대한 공경인 제5계명으로 이해하여 더 이상 교인들이 조상제사에 대해 고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결과는 나름대로 조상제사에 대한 비판적 상황화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복음이 전파된지 약 1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조상제사에 대한 일치된 해석이 없어 신자들은 불신자 가정에서 행해지는 조상제사 의식 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세계관(worldview)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떤 세계관 을 가지고 조상제사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상제사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상제사의 의미는 신학적인 조명과 함께 그 문화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 가치, 의식구조, 평가 등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결정된다. 그 결정된 조상제사의 의미는 내부자 스스로의 상황화 과정을 통하여 현지문화에 정착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상황화가 삶의 현장으로 이어질 때 가장 바람직한 성육신적인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신학적 접근으로는 조상제사와 상황화를, 문화적인 접근으로는 조상제사와 세계관을, 그리고 끝으로 삶의 현장으 로 조상제사와 성육신에 대해 기술하려고 한다. 이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상호간에 연관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본 소고로 불신자 가정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이 조상제사에 대한 이해가 다소 넓어지고 타문화 사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선교적인 교훈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아지는 오늘날과 같은 때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전도법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본 논문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도방법으로서, 선교적 교회론에서 언급되는 성육신적 전도의 한국교회안에서의 적용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변화된 상황 속에서 복음의 소통을 위한 변화된 전도법을 제시하고자 시작되었다. 선교적 교회론은 유명한 선교학자 네슬레 뉴비긴의 통찰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통찰력이 더 많은 선교학자들의 관심을 받게 됨으로써, 최근 들어와서 가장 유명한 선교학적 주제가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선교적 교회론의 시작과 그 주요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에 근거하여, 선교적 교회론이 제공하는 새로운 전도법에 대하여 논한다. 과거의 전통적 교회들이 사람을 불러모으는 전도를 “끌어 들이는 모델”로 이해하는 반면, 선교적 교회론은 전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성육신적 모델”로 제시한다. 선교적 교회론의 성육신적 전도는 더이상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전도는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는 행위이다. 이 교회론에서 전도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에 남아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 이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새로운 전도법이 서구화되어가는 한국사회안에서 진정으로 복음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이 논문은 새로운 전도법을 개발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도의 신학이 필요함을 인식한다. 과거 전도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방법과 기술에 집중한 나머지, 신학적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성육신적 전도법이 근거가 되는 전도의 신학을 제공하고, 선교적 교회론에 기초한 전도법을 제안하였다. 이어서 본 연구는 지역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성육신적 전도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였다. 부산 근교의 신도시 중 하나인 장유지역에 소재한 장유대성교회는 성육신적 전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교회의 모델이 전적으로 성육신적 모델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일반교회들이 지나치게 끌어모으는 모델로 전도방법에 집중하는 반면 성육신적 전도모델을 적극 실행함으로써, 성육신적 모델과 끌어모으는 모델의 보다 균형적 접근을 보여준다. 그 결과 반기독교적 정서가 날로 높아지는 오늘날의 한국사회 안에서의 보다 효과적인 새로운 전도법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회심과 교회개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것이지만 현재에도 임재한다 (마6:10).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항상 의와 평강과 기쁨이 가득차 있다(롬 14:17).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의 선교는 문화, 인종, 그리고 언어상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교회들의 일치를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과 같이 교회가 하나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요 17:21).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신 것처럼 하나 되기 위하여 교회들 간에 일련의 에큐메니칼 운동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회들은 1910년에 개최되었던 에딘버러세계선교사대회 이후 예루살렘대회(1928), 탐바람-마드라스대회(1938), 휘트비대회(1947), 빌링겐대회(1952), 그리고 가나대회(1957-58) 등 여러 가지 선교대회들을 통하여 연합과 일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참가하도록 격려되었다. 특히 휘트비대회와 가나대회는 회해와 일치를 더욱 강조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들에 참가하기를 기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에큐메니칼 교회들이 교회들 간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이름으로 인간화와 세속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화해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일치보다는 화해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화해와 평화를 창조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인가? 마타이어스 자나이져는 창세기를 통하여 화해와 평화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교차문화적 선교사의 모델로 제시하였는데, 그들은 창세기 13장과 26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서 평화를추구하였으며 이삭은 그 자신과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 사이에서 평화를 추구하였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평화를 추구하였다. J. H. 바빙크는 그의 책『선교학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s)에서 화해와 평화 중심의 교차문화적 선교에 대한 엘렝틱 접근을 제시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엘렝틱스는 교차문화적 선교가 진행될 때에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한편 타문화들/종교들에 대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갖는 것을 포함한다. 같은 맥락에서, D. J. 보쉬는 교차문화적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사역들에 참여할 때에 선교활동의 취약성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쉽게 상처를 받는 예민함과 연약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십자가군의 공격성보다는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가리켰다. 더 나아가서 필자는 화해와 평화의 중요한 근거가 용서라고 본다. 아브라함은 롯을 용서하였고 이삭은 아비멜렉을 용서하였기 때문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드라마틱한 용서는 요셉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형들을 너그러운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가족들을 가뭄과 기아에서 구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막 2:5-10). 결론적으로, 현대의 교차문화적 선교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그것을 지금 여기서 세상에 확장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식민주의에서 실행된 제국주의적 모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여진 성육신적 모델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항상 화해와 평화가 영원히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