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상고기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동해안 진출, 悉直谷國과 悉直國의 실체, 또 중고기 신라의 동북방 진출과 悉直州 설치, 異斯夫의 해양활동과 于山國 정벌군의 출항지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척의 실직국이 안강의 음즙벌국 인근에 실직곡국이라는 변진과의 무역중계지를 운영하다가 영토분쟁이 생겨 상실하였다. 하지만 음즙벌국은 신라의 공격을 받 아 멸망하였고, 영일만 일대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러자 실직국은 해상활동과 함께 영일만 일대를 활용하고자 신라에 자진 항복하였다.
실직국이 항복한 이후 신라는 이 지역을 재지세력이 독립성을 유지한 채 통치 하는 간접지배 방식으로 계속 통치하다가, 5세기 말에 직접지배단계에 들어갔으며, 505년(지증왕 6) 실직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삼척지역은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 진출의 중요한 군사적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중고기에 이르러 동북방으로 진출은 동해안 연근해 해로를 최대한 활용 하여 북방의 거점 확보에 노력하면서, 동시에 육로로 진격하여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육해 양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군주에 임명되자 중앙 정부에 선박 이용의 중요성을 건의하여 관련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또 지증왕대 낙동강유역 금관가야 지역을 점령한 공로로 받은 가야계 사람들을 동북방 지역으로 사민시켜, 그들이 보유한 선진 해양기술을 접합시키고, 실직지역에서 군대를 양성 하여 수군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512년 하슬라군주로 옮긴 뒤 우산국을 정복 하였다. 우산국 정벌군의 주력 부대가 출항한 곳은 삼척지역이다.
결국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그곳의 토산물 수취와 동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경제적 부를 확보하였고, 그 결과 정치군사적 영웅이란 명망과 함께 곧이어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된 삼척지역의 대표적인 철기시대 유적·유물과 묘제[무 덤]을 정리·분석하여 이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을 파악하고, 문헌자료를 함께 검토하여 삼국시대 이전에 삼척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해 나갔던 실직국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삼척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양상은 ‘중도유형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예[동예]의 문 화양상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척지역 내 철기시대 주거지는 해안사구 지대에 집중적으로 입지하며, 凸자형·呂자형·(장)방형의 평면형태를 띠고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양한 노(爐), 바닥 점토다짐, 벽체마감시설 등과 화재로 인해 폐기된 집자리가 다수 확인된다.
주거지 유적 내에서는 중도식토기[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와 함께 외래계토 기[영남계·낙랑계토기]와 이를 모방한 새로운 토기양상도 확인된다. 그리고 진· 변한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옥장신구와 청동세환[소환] 등이 출토된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을 볼 때,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주변지역의 정치세력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면서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재지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 으로 보인다.
한편 삼척지역을 포함한 강원 영동지역 내에서는 철기시대 묘제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실직국이 삼한의 정치체와는 달리 옥저의 지상식 목곽 묘의 장례문화를 공유하여 지상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흔적이 남아있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와 삼척지역 내 주거지와 신라고분을 살펴본 결과,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와 실직국은 신라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5세기를 전후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해체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삼척의 철기시대 문화는 신라화 과정 속에서 해체되어 갔지만, 고고학적으로 영동지역 최대의 마을유적인 동해 송정동유적에서 다양한 외래계유물과 철기생산과 관련된 단야공방지가 다수 확인되는 점, 이후 실직주가 설치되어 군사적 전략기지 [수군기지]의 역할을 담당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 역사·문화적 위상은 높게 평가된다.
이 글은 신라가 최초의 주(州)를 설치한 실직의 고고자료를 검토하고, 실직의 신라사적인 의미를 찾아보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수용하여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고고자료부터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자료 가운데 신라산성과 신라고분을 추출하였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신라사에서 차지하는 실직의 역사적인 역할을 찾아 보았다. 시간적으로는 5~6세기가 중심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이전 시기에 비하여 문헌사료가 풍부한 편이고, 동시에 사료 비판을 통해 삼국의 쟁패와 관련한 역사적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때 고고자료가 사료 비판과 역사적 해석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공간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을 기본으로 하였다. 즉 실직의 고고자료는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군치인 지금의 삼척시와 속현 지역을 포함하여 살펴보 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속현에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인 우계현이 포함되므로 동해시와 강릉시 옥계면을 실직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연구 범위로 삼았다. 그 결과 실직의 고고학적 양상을 정리하면 신라산성으로는 오십천 하구의 곶 (串)에 위치한 오화리산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고분문화로는 5세기 3/4분기인 황남대총 남분 단계 직전에 신라문화가 출현하였으며 5세기 4/4분 기~6세기 1/4분기에 고분군이 급증․확산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분군의 입지도 구릉지대와 산의 사면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여 사구지대에 초기 고분이 분포하는 강릉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 시․공간적인 고고자료와 문헌사료, 역사지리적 자료들을 활용하여 신라의 실직 경영에 대한 신라사적 의미를 찾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오화리 산성의 경우 신라계 지명인 벌 지명이 있고, 건너편인 정라진 일대도 부리(=벌) 지명이 남아 있어 오십천 하구 일대가 신라마을이 형성된 실직의 핵심 지역으로 판단하였다. 나아가 통일신라 중사의 하나인 북해 비례산도 오십천 하구인 정라진 바닷가 일대와 오화리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였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중원(충주)을 거점으로 남한강을 따라 동해안의 강릉이나 삼척을 측방공격하는 고구려군을 막는 방어의 거점성이자 해양의 거점으로 오십천 하구에 있는 오화리산성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인들이 동시대부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일대를 해양의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통일기에도 중사의 사해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본고는 사료의 重層性을 전제로 실직국의 복속 과정과 이에 대한 신라의 지배 형태 변화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실직국의 복속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조는 삼국유사 왕력 지마이질금조와 저본을 달리해 작성되었다. 그 저본의 찬자는 실직국과 음즙 벌국 사이의 분쟁, 그리고 사로국의 중재에 대한 자료를 소재로 실직국의 항복 과정까지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 정리했다. 파사대의 정복기사는 탈해대·지마대의 대외확장을 강조한 기사와 저본을 달리해 重層的으로 봉합되었다. 파사 23년조는 대외확장에서 파사이사금의 업적을 중시한 저본에 토대를 두었다. 왕력 지마이질금조는 신라본기 파사23년조보다 상대적 신뢰도가 높지만, 절대적 신뢰도를 담보하지 않는다. 실직국은 옥계, 하장, 원덕 일대를 지배했다고 전하는데, 실제 지배 범위는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해시 송정동 일대에도 大邑落이 존재했을 것이다. 실직국은 동해안 교통로와 영서 방향 교통로의 결절지라는 입지조건, 동예와 진한의 중간적 위치 등을 기반으로 주변 邑落을 통제했고, 음즙벌국과 동해안의 교역로를 두고서 경쟁했다. 3세기 후반∼말경 동해안의 교역 에서 사로국이 금관국에 대해 우위를 보이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이 주도하는 교역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중엽부터 사로국과 고구려의 교섭이 본격화하면서 실직국은 사로국에 복속했다. 실직국 干層은 공납을 바치고 기항지 이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읍락 간층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실직국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일부 간층은 자치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실직 지역은 何瑟羅城에 비해 방어기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5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남한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압박해 오면서 悉直城의 據點城 기능은 강화되었고, 간층의 자치권은 약화되었다. 실직성 주변의 읍락들은 5 세기 후반경 村으로 편성되었다. 5세기 말 이후 신라는 거점성별로 전략적 기능과 옛 소국에 대한 지배기능을 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실직성이 다수 거점성에 대한 관리 기능을 부여받아 505년에 悉直州가 설치되었다. 6세기 초까지 유력 간층을 대상으로 복수의 干群 外位와 非干 외위가 편성되었다. 간군 외위자는 비간 외위 자의 보위와 非외위자의 협조로 道使의 통치에 협조했다. 그런데 512년 何瑟羅州 설치, 524년 이전 실직주 재설치 등에 따라 외위의 운영은 변화했을 것이다.
新羅 四海 祭場은 東海 阿等邊의 경우 현재 포항시 영일읍에 소재했던 魚龍臺 로, 南海 兄邊은 부산시 남구 용당동 일대로, 西海 未陵邊은 군산시 경암동 북쪽 해변으로, 北海 非禮山은 지금의 삼척시 葛夜山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들 제장의 성립시기는 동해는 신라가 영일지역을 확보한 사로국 초기에, 남해는 5세기 중반 이후, 서해는 죽막동 제사유적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7세기 이전으로, 북해 비례산은 6세기 중반 신라가 동해안로를 따라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하던 시기로 여겨진다. 북해 제장이 다른 4해와 달리 산에 마련된 것은 悉直州를 포함한 강원도 일대 동해안과 그 주변 해상력 확보과정에서 전통적 산악숭배, 그리고 고구려의 침입대비 및 우산국 정벌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삼국통일 후 북방으로의 영역 확대에 불구하고 북해는 실직에 소재하였다. 실직의 지역토착 해양세력을 국가사전편제를 통해 흡수하려는 목적에서 과거 신라 해상력의 상징이었던 실직에 계속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를 포함한 4해의 제사 형식은 대체로 중국의 예제를 참고하였을 것이지만, 신라의 전통적인 산천숭배 관념에 따라 제례의 순서와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 된다. 그 제일은 신라의 독자적 산천숭배 전통에 따라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도에서 행하는 경우 당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1년에 한차례씩 5郊에서 迎氣日에 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4해의 신격은 각 방면의 해신으로 神像을 조성하여 제사 때 모셨다. 4해에 대한 봉작은 성덕왕 34년(735) 시기까지는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4해 제사의 절차는 ..三國遺事.. 水路夫人조와 高麗 李齊賢의 시를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 구체적 단계는 첫째 제장을 물로 정화하기, 둘째 신이성을 부여한 ‘杖’을 두드리며 용을 불러내기, 셋째 높은 바위에 핀 꽃을 꺾어 술잔과 함께 봉헌하기, 넷째 기우와 풍년 기원 등의 순서로 추정된다. 이러한 절차는 북해 제장에 적용되었다가 점차 다른 4해의 제장에도 확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직국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新羅本紀 婆娑尼師今 23년조에 등장한다. 이후 실직국은 단편적인 기록과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상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으므로 실직국과 관련기록 역시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직국 관련 기록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압축하여 정리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여기에서는 파사니사금 23년조의 기록을 이 같은 입장에서 분석하여 실직국의 정체와 역사적 위상을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영동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신라가 동해안 일대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동해안을 통한 교역과 교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4세기 이후 영남일대에서 급증하는 북방계 문물은 동해안을 통한 교류를 상상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신라가 영동지역에 진출하기 이전에는 동해안의 어느 소국이 동해안 연안해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소국이 바로 실직국으로 추정된다. 사로국이 실직국을 병합하였다는 기록은 3세기 후반경 실직국이 가지고 있었던 동해안 해상권을 차지하였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실직국이 영동지방에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실직국의 지리적 위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일대는 영동지역에서 기항지로서의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실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동해안 연안해로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meaning and essence of concrete and practical experience on a series of debates to reveal factors that could be exposed when middle or old-aged people are in the process of re-employment process when they were unemployed by exploring the phenomenon of experience on the courses for the unemployed focusing on middle or old-aged people for employment support program. Depth consultation interviews were conducted and the structure of this phenomenon was revealed and described by applying Giorgi's phenomenology technical as a procedure for analyzing participants' statements by concentrating on the essence of the experience in this study. The meaning of the experience of the unemployed re-employment process structure as a result of analysis on the nature of re-employment experience on the basis of research participants and the information stated through this study showed respectively such as <Realistic limits seaworthiness>, <re-employment efforts will>, <Desperate economic poverty>, <To find my identity in the process of re-employment>, <In anticipation of the second half of my youth>, and "Reemployment Success Factors>. It is a significant meaning that middle and old-aged people were able to confirm that they experienced Dynamic pursuit of hopes and dreams and got the chance to participate in society Toward a new life By strengthening employ ability skills by undertaking vocational training, obtaining licenses, and regaining confidence and employment determination, and a lot of desire using the card for learning tomorrow, government support 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