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래 영미권에서는 근대적인 역사지도집이 다수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이 결과 영미권에서 발간되는 역사지도집은 한국을 포함한 다수의 국가에서 역사지도집 발간 시 주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사지도집은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지도학적 및 역사지리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대표적인 영미권 내 역사지도집인 「더 타임스 세계 역사지도집」 과 「돌링 킨더슬리 세계 역사지도집」 내에 수록된 동북아시아 지역 관련 역사지도들을 대상으로 지도학적, 역사지리학적 분석을 통해 문제점을 확인 하였다. 분석 결과 지도학적으로는 축척, 방위 등 지도학적 기본 요소의 부재, 해안선 및 하천 등 지형요소의 부적절한 표현, 국경선 표시의 부적절함, 한반도 형태의 부자연스러운 점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역사지리학적으로는 한군현의 과도한 영역표시, 발해 명칭 표기 문제, 한반도의 중국 영토 표시 문제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독도는 1993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분쟁지역이라는 표시가 사라지면서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고 있음이 파악되었고, 동해표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병기가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본 논문은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Social quality가 높은 국가일수록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발달된 곳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회지도층에게 대표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마치 서양에서 생겨나고 발달된 것으로 보이지만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역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없었다면 이미 이민족의 역사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의 천년 왕국과 국제 무역국가를 이룬 고려시대와 조선 오백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살아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의 화랑정신, 고려의 귀족정신, 조선의 선비정신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사례들이 개발되어서 한국 사회의 계층별 위화감이 사라지고 다른 국가들이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할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자리잡기를 바란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출간된 역사지도책에 반영된 한국의 영토, 일본의 의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역사지도(日本歷史地圖)」와 이 책의 증보판인 「신편일본역사지도(新編日本歷史地 圖)」의 편저자인 시바 카츠모리(芝葛盛), 당시 시대상 및 간행 배경 등에 대해 알아보고, 두 역사지도책의 내용 구성방식을 비교·분석 하였다. 이어서 두 역사지도책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두 역사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의 스케일이 확대되었으며, 일본이 역사지도를 통해 한반도 지배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추구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 연속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인식하였는데,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조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서서 개인용 컴퓨터 및 그래픽 프로그램 이용의 확산과 함께 비전문가에 의한 지도 제작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역사지도의 경우 역사학자와 일러스트레이터가 협업을 한 형태의 지도 제작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지도 이용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지도학적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부정확한 지도가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본 연구에서는 지난 8년간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동북아역사지도’를 역사지도 평가 기준안을 개발하고, 이에 따라 분석하였다. 그 결과 투영법, 도곽 범위 및 축척, 고도와 수심의 표현, 기호와 범례, 지도 가독성, 대한민국의 위치 ․크기 ․형태 ․범위의 적절성 등의 지도학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지명의 한글표기, 독도 ․동해 표기 등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역사지도 제작시 준수되어야 할 지도제작 원칙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일찍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북한도 2007년에 출간한 바 있는 역사지도집이 한국에는 아직 없다. 최근에는 역사지도 역시 디지털맵으로 제작되는 추세이다. 디지털맵은 역사지도를 단순한 지도에서 거대한 정보체로 전화시켰고, 역사지리학자와 역사학자 에게 GIS 프로그래머와 웹디자이너가 아주 중요한 파트너가 되어야함을 알려주었다. 이 글은 역사지도 제작론에 입각하여 역사지도와 관련된 주요 개념과 특성을 정리하고, 역사지도에 수록될 정보들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정보, 즉 시대와 주제를 초월하여 마치 밑바탕 그림처럼 수록되어야하는 정보를 행정구역, 자연환경, 교통망, 지명데이터베이스 네 영역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네 영역 각각의 수록 범주와 내용, 그리고 그 방법론에 대해 기술한다. 역사지도는 역사지리정보의 집합체적 성격을 갖는 점에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DB를 어떻게 표출하고 계속 생성되는 역사지리정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된다. 이에 본고 말미에 역사지리정보의 표출과 관리 방안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제시한다.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role of Giovanni Marinioni during the formation of the modern cartography and cadastre during the 18th century. Initial study began with Giambattista Nolli's Roman map noticing not much information was available to acknowledge his activities during his Milan period before the departure to Rome. It became evident that Marinoni was a key person to understand the complex circumstances in which the professional training and formation of Giambattista Nolli took place as later worked as an anonymous intern during the elaboration of Theresian Cadastre of Milan. The other important figures are Leandro Anguissola and Giovanni Filippini. Anguissola's position and precedent work facilitated Marinoni's multidisciplinary activities that he had performed in Vienna and Milano in the field of making urban maps of those two cities. On the other hand, Filippini not only collaborated with Marinoni but also introduced Nolli in the field of cartography. These activities show transitional and dual aspects that characterized the period in which important irreversible changes that occur during the reign of Habsburg empire and in the rest of the Europe toward the formation of modern society and state. Marinoni's theories and praxis greatly influenced Nolli's later commitment under the Savoia and later on the elaboration of the 'Pianta Grande di Roma' in 1748.
중국이 역사지도를 제작한 것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북송AC.1094년에 석각으로 제작된 우적도에서부터 력대지리지장도 (AC.1099년), 장안지도(AC.1342년), 명조말기 금고여지도(AC.1648년)로 이어졌으며 청대에 이르러 행정구역연혁을 위주로 한역사지도가 제작되었다.이 시기 청대 학자들은 여지고증 결과를 끊임없이 흡수,확장하며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지도 편폭이 증가하고 내용을 수정 확장해갔다.특히 청대 중기 건륭 가경연간(AC.1736-1820년)은 중국에서 전대의 역사지리를 연구한 황금시기로더 깊고 자세한 역사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놓았다.이렇게 청대에 여지연혁도(AC.1804년), 력대지리지운편금석(AC.1937년), 력대여지연혁험요도(AC.1879년), 수경주도(AC.1905년), 력대여지도(AC.1911년) 등의 역사지도가 제작되어으며 이중 수경주도와 력대여지도는 청대 건가시기의 순 학술성 역사지리고증학과 도광 함풍 이후 경세치용의 여지지학, 이 두 갈래의 학술풍조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이다.
과거 오르델리우스가 지도를 제작할 때에 비해 현재의 오픈스트리트맵은 위성사진의 촬영으로 인해 현실과 매우 흡사하게 만들수 있게 되었다.오픈스트리트 맵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적 정보에 언제,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도는 평면에 제작되기 시작하여,디지털 공간에 공간 정보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다.지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공간 정보를 더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