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헌법상 정교분리는 1789년 인권선언, 1802년 화친조약을 거쳐 1905년 법률의 제정으로 전개되었으며, 1905년 법률의 제정을 통해 전투적 정교분리 원칙의 정점에 다다른다. 즉, 17세기 및 18세기의 계몽 주의자들은 관용의 정신을 기반으로 종교적 영역에서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같은 주장은 1789년 인권선언 제10조로 규범화된 이래 헌정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한편, 그 당시의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02년 나폴레옹과 교황이 체결한 화친조약은 ⅰ) 가톨릭을 사실상 국교로 인정한 점, ⅱ) 프랑스 교회가 국가교회 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 ⅲ) 가톨릭 신앙이 공역무로서의 성격을 가진 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1802년의 화친조약체제는 현대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의 원칙의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으며, 더구나 가톨릭의 교회구조와도 일치하지 않는 모순점이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법적 모순과 상황적 요청 으로 인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하는 1905년 법률이 제정되게 된다. 1905년 법률은 양심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규정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였으며, 교구결사를 통해 종교단체를 조직하고, 교회재산의 이전, 교회건물의 유지 및 보존, 종교에 대한 질서유지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투적 정교분리의 원칙의 정점에 해당하는 1905년 법률에 대해 교황청은 강하게 항의를 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입법자와 법원은 1905년 법률의 효력을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변경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다. 즉, 입법자는 1907년 1월 2일 법률, 1907년 3월 28일 법 률, 1908년 4월 13일 법률을 통해 1905년 법률을 종교의 자유를 보다 강화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개정하였으며, 국사원의 또한 동일한 방향으로 판례를 형성해 나갔다. 이에 따라 1920년에는 교황청과 외교적 관계가 회복되게 되고, 그 뒤에 교황은 새롭게 교회를 조직하는 교구결 사제도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정착된 평화적 개념의 정교분리의 원칙은 프랑스 제 4공화국 헌법의 제정과정에서 특별한 반대의견이 없이 헌법에 규정되게 되며, 이와 같은 태도는 현재의 제5공화국 헌법에 계승되게 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suggest a method for improving writing skills of foreign students through elaborating word definition. We took a position that brand-new teaching methods of writing are needed for specific learning groups, especially for students who study in Korean universities because they are supposed to develop and prove writing skills in order to perform their studies successfully. First, in chapter Ⅱ, we examined the current state of teaching writing in Korean as an L2 in context of teaching tradition and made sure that practical methods of teaching writing for academic purposes are still insufficient. Next, in chapter Ⅲ, we analyzed previous research results focused on word definition and found elaborating word definition useful for improving writing skills for tertiary level students. Finally, in chapter Ⅳ, we presented a practical teaching method for writing through elaborating word definition by showing the results which 15 foreign students (from China and Japan) produced while participating in writing class. In this paper, we introduced a new method for teaching writing in Korean as an L2 related to word learning, and expect much more teaching methods of writing to be developed and presented.
본고는 서로 이질적인 종교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 즉 다민족, 다문화권에 대한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할 때 그 민족 고유의 역사 적, 정치적 상황을 면밀히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은 특히 이슬람 선교에 더욱 중요하다. 피지배 민족의 역사 및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도 주요한 선교전략 요소이 지만, 지배민족인 러시아의 정신적, 종교적 정체성인 러시아정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다문화권 선교전략을 모색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연구 주제다. 이에 따라 본고는 비이슬람으로서 지배민족의 종교적 정체성과 이슬람 사이에 역사적, 정치적 관계를 파악하는 일에 집중하 고자 한다.
본고는 러시아의 정복 대상지였던 이슬람권 지역에 대한 이해를 통해 러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전략을 모색하며, 이를 위해 피지배 민족인 러시아연방 내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역사적, 종교적 부분, 그 중에서도 러시아정교와 이슬람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고는 러시아권에서의 러시아정교와 이슬람의 역사적 이념을 러시아와 오스만 튀르크와의 역사적 관계를 통해서 규명하며, 소비에트 체제 이후 러시아정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통해 이를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현재의 러시아연방 내에서 러시아정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 정체성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러시아연 방 내의 무슬림권에 대한 선교 전략을 도출하는 학적, 방법론적 내용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탐구는 학교과학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학교에서 주어지는 문제는 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부딪치는 문제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학생들이 문제에 대한 인지도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을 때, 과제에 대한 태도와 사고력이 문제해결과정, 특히, 문제공간의 형성과 정교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미국의 한 영재센터 여름방학 프로그램 중 4-6학년 영재학생 대상 '레고 로봇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문제해결전략을 추적하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과제의 선택과 파악방법, 작동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 과제에 대한 태도는 서로 다른 문제공간을 형성하게 하였다. (2) 분석적 사고, 융통성, 효율적인 정교화 기술, 기존 인지도식의 적용 등의 사고력의 수준 차이는 문제공간의 정교화 차이와 문제해결의 성공여부로 이어졌다. (3) 초기의 문제공간의 차이는 문제해결전략의 형성 차이를 가져왔지만, 사고력 없이는 효과적인 문제해결전략의 정교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위의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탐구를 증진시킬 몇 가지 사항이 제안되었다.
This dissertation was embarked upon for the historical examination and the missiological academic analysis of ‘The state-political character of the mission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which has been mentioned widely without any academic examination. This kind of study is necessary to understand rightly the Eastern Orthodox world which was drawn to the Korean church immediately after the collapse of USSR, and to establish the proper relationships between the old USSR and the Eastern European people as well as how best to evangelize them. The researcher analyzes the Russian archives in relation to the missions of Russian Orthodox Church. He carefully examines and analyzes closely the historical materials from 1860 till 1917(Bolshevik Revolution) including the mission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to the immigrant Koreans and those between 1897 and 1925 in relation to the mission to the Koreans i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result of this analysis, it could be said that the mission of Russian Orthodox Church was a reverse movement to the mission of Trinitarian God transcendent to man-made boundaries. It was mission as an instrument not for serving the interest of God toward the whole world, but for serving the interest of his or her own country alone. It was a distorted mission far from demonstrating the love of God because of absolutizing the nationalistic political ideology ‘russiani-zation’ As a result, it became heterogeneous apart from the right motif, goal and method of God’s mission. In the result of this study, it became possible to describe concretely the character and mode of the state-political mission of Russian orthodox church which has been vaguely mentioned and to have a theoretical prospect the general results which might happen in the process of the state-political missions. This study could probably be an available knowledge not only for those who are participating in missions to the people who has lived in the state-political mission world, but also for those who wish to evangelize it, cooperate with the Eastern Orthodox churches as well as offer invaluable suggestions to the mission scholars around the world.
Nach dem Zerfall des Warschauer Paktes und dem Ende der Sowjetunion wird das missionarische Engagement der orthodoxen Kirchen durch die neue Moeglichkeiten der Zusammenarbeit stark gefordert. Es gilt naenùich die geographisch einst von der Orthodoxie dorninierte Welt wieder zum Christentum zuruckzufuehren Wie einst bei der Christianisierung Russlands der entscheidende rnissionarische Impuls von der Liturgie ausging, so stellt Ion Bria das von den orthodoxen Kirchen bei der “ Komrnission fuer die Weltmission und Evangelisation"(KWME) in Bangkok 1972173 als Antwort auf die Anfrage und Anregung des Weltkirchenrates(WCC) entwickelte Konzept der “ Liturgie nach der Liturgie" vor. In diesem Konzept widerspricht er ausdruecklichder falschen Ansicht der Christen anderer Traditionen (sowohl der protestantischen Kirchen als auch der roemisch-katholischen Kirche), die orthodoxen Kirchen “wuerden nicht rnissionieren". Er betont, dass die orthodoxen Kirchen jedoch sehr wohl missionarisch taetig seien. Als Kern des Konzeptes deklariert er schlicht die Aussendung der feiernden Gemeinde . Die Versammlung der Gemeinde zum Gottesdienst sei die Vorbereitung auf die Sendung zur Weltmission und zur Evangelisierung. Es gehe darum, das Reich Gottes in der Eucharistie symbolisch anzukuendigen und zu zeigen. Dazu seien “Inkulturation" und verstaedliche Sprache unerlaesslich. Die Christen praktizierten ihre J uengerschaft - genaehrt durch die Eucharistie - im Alltagsleben in ihrer Umwelt. Ihre Autorisation bezoegen sie dabei aus der liturgischen Sendung, die in persoenlicher Authentizitaet fruchtbar werde. In diesem Zusammenhang zielt dieser Artikel auf die Untersuchung eines Missionsverstaendnisses der orthodoxen Kirchen mit dem Konzept “ Liturgie". Dazu werden hier die folgenden konkreten Themen behandelt: 1. Die missionarische Tradition und der Charakter der orthodoxen Kirchen; 2. Die Beziehung zwischen Mission und Liturgie in den orthodoxen Kirchen; 3. Die Bedeutung der “ Liturgie nach der Liturgie"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 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래 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 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심지어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그 런 조항은 미국헌법의 절대적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혼돈 속에서, 그런 헌법조항에 근거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 복음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유동적인 정치적·종교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전략 적으로 다루어왔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며 그것에 적응해 온 복잡한 역 사를 추적하는데 목적을 둔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헌법의 규정과 상 관없이 기독교에 특혜를 베풀어준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 기간 동안 미군정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서 한국개신교인 들이 다양한 정치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정책 면에서, 미군정은 다른 종교들을 배제한 채, 한국교회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 특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한국교회는 정부정책에 열정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이자 한국개신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이승만을 거의 맹목 적으로 지지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기간을 통과했다. 그 동안, 한 국교회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즉, 군사정부를 신실하게 지지했던 보 수주의자들과 그 정부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로 말이다. 그 결과, 독재 자들은 두 진영을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했다. 예를 들어, 군사정부는 보수교회들이 ‘액스플로 74’ 같은 일련의 대규모 집회들을 개최하고 ‘전군신자화운동’ 같은 전도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종교적 특 혜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정권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군사정 권에 저항한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정부와 부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보적 정부가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기독교사립학교들의 부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한국교회는 반정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진보적 정부를 종북좌파세력 으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들은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수정했다. 그들은 이전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 저항이 헌법 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부를 위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보다 보수적이고 친기독교적인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정부와 이중적 태 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친기독교적인 이명박 정부의 강력하고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같은 정치적·경제적 신념 에 기초해서, 그들은 이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적극적 정치참여가 정교분리라는 헌법조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정부가 타종교들, 특히 불교와 이슬람 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하자 강력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부 의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배제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 “정교분리”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 그들은 “정교분리”를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 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불편했을 때, 그들은 그런 이 해를 뒤집고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정부로부터 우호 적 지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런 특혜가 정교분리의 헌법적 조항을 위반 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에 의해 차별을 받는다 고 느꼈을 때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반정부적 투쟁에 나섰 다. 이토록, 한국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 정교분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본 연구는 의미 정교화 과업 (semantic elaboration task)을 연습한 후 학습자의 즉각적 어휘 회상(immediate word recall) 과 1주 후 어휘 기억유지 (word retention) 에 주는 효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구를 위해 16개의 목표어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유형의 탈 맥락화된 (decontextualized) 어휘지향의 의미적 정교화 과업으로 연습하였다: (1) 목표어의 L1 주석을 보고 알맞은 L2 정의 찾기 (DG); (2) 목표어가 포함된 구 (phrase) 단위의 적절한 용례 (UE) 찾기; 그리고 (3) 목표어를 괄호에 넣어 하나의 문장 완성하기 (CZ). 한 번의 즉각적인 사후 테스트와 1주 후의 지연된 테스트 결과 분석에 의하면 괄호 채우기 과업 (CZ) 이 즉각적인 수용적 단어 회상 및 수용적, 생산적 장기 어휘 기억 유지에 가장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은 어휘 기억 유지의 비율에 있어서도 나타났다. 즉, 생산적 단기 어휘 회상과 장기 기억 유지에 있어 다른 두 유형의 과업보다 더욱 도움이 많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CZ’ 과업의 어휘 형태와 의미 형성에 필요한 인지적 과정에 도움이 되는 문맥적 요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주 후의 수용적 어휘 기억 유지에 있어서는 ‘DG’ 과업이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L1 주석을 본 학습자의 어휘 인지과정에서 L2 의 의미를 L1 으로 기억하게 하는데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요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