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maining Joongjaesil(中齋室)-type pavilions in the eastern part of the Jirisan Mountain area showed more complex characteristics than those in the western part. The front number of kan(間) had two, three, and four kan (間) types, but the number of kan on the side was consistent with two regardless of the number of kan on the front. The pavillion is classified into 'central type', 'towards the backward type', and 'expanded by backwards type' according to the location of Joongjaesil. Joongjaesil's size, which characterizes the characteristics of Joongjaesil-type Pavilion, is related to the building's front number of kan. Front number of kan. When this space was increased by one space to four spaces, Joongjaesil must have two spaces. The pavilion with four bays in front showed the characteristics of being concentrated in Sancheong and Jinju, the eastern part of the Jirisan Mountain area. In the eastern region, many high pavilions remain, and the upper structure of the pavilion was insignificant, but the flat shape and public construction showed strong locality.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2007년 9월부터 10년 동안 인문한국(HK)사업으로 지리산권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근현 대사 영역에 한정하여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과제와 방향을 모 색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근현대사 영역에서 사업단 실적은 자료집 발간 총 7권, 사업단 소속 연구 자 논문 9편이며, 사업단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 외부 연구자로 참여하여 그 성 과물을 사업단 저작물에 실은 논문은 5편이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자료집과 연 구논문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연구논문은 주 제별로 검토할 경우 유형화할 수 없는 논문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근대시 기와 현대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근대사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집중된 편이다. 이러한 논문은 지리산권 동학 농민혁명의 구체적인 전모, 지역별 확산과정과 향촌사회의 대응, 남원지역의 동학 포교와 조직화 과정 등을 파악하였다. 또한 한말 의병장 고광순의 지리산 근거지론을 탐색함으로써 지리산이 의병의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주목을 받았 다는 사실을 조명하였다. 이밖에도 지리산권 지식인 황현의 연구사 정리, 지리 산권의 근대학교 설립 등을 다룬 논문이 있다. 현대사 연구는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여 순사건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의 대립 양상이나 수습방안, 여순사건의 주도층이 었던 14연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 그리고 지리산 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전모, 빨치산 활동에 영향을 받은 지역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드러난 한계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전망하였다. 먼저 연구 시기의 편중성을 들 수 있다. 앞으로는 일제시기, 해방 3년기, 한국전 쟁 이후 시기, 산업화시기로 넓혀 연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연구 대 상으로써 지역공간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리산권역을 지리산과 인접한 지역 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 시기에 맞게 적절하게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셋째, 연구 주제가 운동사에 집중된 편이다. 지리산권역에서 펼 쳐진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그에 따른 문화 양상의 변화상을 탐구한 연구는 거 의 없다. 따라서 지리산권역이 담아내고 있는 정체성과 다양한 가치를 파악하 기 위해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사회변동이나 문화 양상을 탐색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생활사, 일상사 연구가 필요하다. 일상사 연구는 주변화 되거나 배제된 지역민의 경험과 실천을 재현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다. 넷째, 기초자료의 정리‧분석과 발간 작업을 보다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 지 역사 연구의 활성화, 체계화를 위해서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기초자료의 수 집과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글은 HK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의 연구성과를 총결하면서 지리산인문학이라 는 새로운 범주의 학문으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씌어진 것이 다. 이를 위해 우선 지리산권문화연구라는 HK사업의 아젠다가 갖는 ‘징후’로서 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10년전 징후읽기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한 HK사업 은 10년 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로 본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HK사업으로서의 지리산권문화연구와 지리산인문학은 한국사회에 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급박한 대응으로서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글에서는 먼저 지리산권에서 산출한 고전문학 작품들이 어떤 것 이 있는가부터 살펴보았다. 고전문학은 전통시대에 산출한 국문문학과 한문서 사를 총칭하는 것이며 여기에 구비문학인 민요와 설화를 포함한다. 지리산권 고전문학 작품들을 쭉 열거해본 결과 전기소설이나 판소리, 동학가사 등 고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 이 지역에서 산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지리산권고전문학이 제4차 산업혁명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제4차 산업혁명의 한국적 전개에 시사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작품세계는 기본적으로 증강현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작품과 사람들을 엮 어 하나의 장르가 생성되는 현장의 운동 논리는 기본적으로 지능과 연결로 대 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前驅的 특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글에서는 일 단 지리산인문학과 지리산권고전문학, 제4차 산업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켜 아젠다로서 지 리산인문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한 시공간이 지시하는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 한다. 흔히 소설의 3요소 중 하나인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최척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작품 속의 인물들이 존재 한 작중 배경, 즉 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떤 장소에 있었는가를 작품 속 증거를 찾아내어 고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물이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 곧 특정 한 상황이 전제되면 그때 그 곳에 있었던 인물과 사건은 그때 그 곳의 상황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연구방법으로 따지 면 문학지리학의 맥을 잇고 있고 소설배경론에도 속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최척전>을 보면 <최척전>의 첫들머리에서 최척이 정상사 에게 공부를 하러 가는 시기는 1592년 5월경이고, 옥영이 남원 정상사 집에 오는 시간은 1592년 8월경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월 말경이다. 최척이 변사정 의병부대에 종군하는 시점은 1593년 2월경이고, 두 사람이 다 시 만나는 시점은 1593년 10월 말이다. 옥영의 억지혼사의 뒷배경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 후 남원 남쪽까지 쳐들어왔다 물러간 일본군의 약탈이 있었다. 정 유재란 시기에 구례 피아골 연곡사로 피난을 간 최척 일가는 불과 하루 이틀 사 이로 엇갈리면서 동아시아 세 나라로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져놓고 보면 <최척전>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즉 인물들이 존재 하고 있던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거의 재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작품 속 인물 들의 형상이나 주제의식 등에 대한 좀 더 진전된 형태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 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江右 지역에 유행처럼 일었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을 중심으로 강우지식인의 의식세계를 살펴 본 것이다. 존주의식은 임진란 이후부터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던 지성사의 한 중심축이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이에 매몰되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족쇄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19세기까지도 조선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중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이 지방에 끼친 영향의 상관성 연구가 전무했었는데, 본고가 강우지역의 세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 시기 강우지역에는 수많은 학자가 활동하였고, 그들은 여전히 명나라 毅宗의 ‘崇禎’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도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라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전도 치욕 이후 형성된 북벌론 또는 대명의리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당대의 시대논리로 변모해 왔듯, 이 시기 강우지식인들도 자기 시대의 논리에 맞게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남평문씨 가문의 大明花 현양과 朴震英 추숭으로 인해 강우지역에 일었던 존주의식 현창 활동은, 오랜 기간 소외되어 있던 지방사족이 顯祖를 선양하고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절박함에 의해 도출된 그들 나름의 명분이었다. 鄭蘊과 朴明榑를 통해 某里나 弄月亭에서 갈구했던 지식인의 自意識 또한 그 시대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다. 한말에 몰아닥친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야욕, 이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전통유학의 봉건적 질서 등 내우외환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이 시기에 정온 등의 춘추대의 정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강우지역의 존주의식 현창 양상은 강우학자들이 당대 지식인으로서 자기 시대를 헤쳐 나가는 최선의 선택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南冥 曺植(1501-1572)의 「神明舍圖銘」은 한 인물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다룬 것 으로, 그의 엄격한 수양론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고에서는 남명의 「신명 사도명」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학 작품 5편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 써, 지리산권 가운데 하나인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남명학파의 마음 공 부를 이해하는 일단의 실마리로 삼았다. 대상으로는 삼은 작품은 龜巖 李楨의 「神明舍賦」, 東岡 金宇顒의 「天君傳」, 寒沙 姜大遂의 「神明舍記」, 台溪 河溍의 「神明舍記」, 俛宇 郭鍾錫의 「神明舍賦」 등이다. 이 5편의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재해석의 면모와 시대적 의미를 고찰해 볼 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그 결론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명의 「신명도사명」을 각기 계승하되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중 요성을 저마다의 입지와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편의 작품 들은 자신의 관점과 시대적 필요에 의거해 「신명사도명」의 핵심을 파악하는 해 석의 각도가 차이를 빚게 되었다. 따라서 부각시키려 한 중심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남명학파의 계보상에서 저자들을 구분해 볼 때, 그들의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남명학파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가늠해 보게 된다. 구암과 동강의 작품은 ‘남명학의 계승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한사와 태계의 작품은 인조 반정 직후 남명학파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봉착하여 ‘학 맥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면우의 작품은 외세의 침략과 국 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유학적 마음 수양의 指南으로서 ‘남명의 심학을 천양’한 것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