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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조선 중기 연산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기호학파 사림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연산 돈암서원의 구지와 현지의 입지와 공간구성에 관해 고찰한 것으로 돈암서원의 구지의 입지 및 경관성과 장소성 그리고 서원 일원의 입지및 공간구성을 검토함으로써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에 따른 돈암서원의 진정성을 고양할 수 있는 자료 추출을 목표로시도되었다. 구지에 존재하는 돈암 각자바위를 비롯하여 고지도 및 양성당십영에서 언급되는 조망경관상과 풍물요소는 구지의장소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특히 양성당 주변에 조성되었던 쌍연지(雙蓮池)는 현지에서도 복원이 요망된다. 한편현지의 공간구성은 전학후묘로 응도당인 강당이 수직축 상에 있었지만 건물은 현 위치로 이건시 이미 양성당이 강당의위치로 이건되어 부득이 응도당은 좌측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 공간구성은 진입공간-강학공간-제향공간그리고 관리공간으로 구분된다. 현 부지내 식재된 수목 중 향나무 노거수를 비롯하여 배롱나무, 소나무 등은 보존적가치가 높게 파악되며 입덕문 기단과 꽃담에 표현된 상징미학적 메시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현 부지의 지속적인 보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현 위치에서 가까운 돈암서원의 구지 또한근 250여 년간 서원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 곳으로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돈암서원의 진정성을 강화한다는측면에서도 구지의 보존 및 경관 형성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판단된다.
        4,500원
        3.
        201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ewon was a new type of private academy established by a class landed Confucian scholars known as sarim. During Joseon dynasty, sewon had dual functions as a shrine and a place of learning. The site plan of seowon appeared mainly two types of site plan according to the indications of the age and school. This paper was done to analyze the site plan and construction history of Simgok seowon with historical materials and excavation investigation result. Simgok seowon is dedicated to Jo Gwang-jo(1482~1519). This private Confucian academy was founded in 1605 as a small shrine, which was destroyed in 1636. Thereafter, when the shrine received a royal warrant naming as Simgok seowon in 1650, the new site for the seowon was chosen, which is currently located in Gyeonggi-do Yongin-si Sanghyeon-ri 203. Since then, buildings of Simgok seowon was constructed and repaired couple of times. Through the investigation, it was found that the site plan of Simgok seowon was originally a type of ‘jeonjaehudang’, that is, dormitory building between the lecture hall and the outer gate, or dormitory building is in front and lecture hall is in behind.
        5,100원
        4.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月川學團의 초기 성격을 살피기 위해 조목의 합천지역 교유인물과 조목에 대한 도산서원 종향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목은 1598년 1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합천 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합천이 來庵 鄭仁弘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만큼 정인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교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목이 尤谷齋에서 『心經講錄』을 강학하면서 이 지역에 퇴계의 학문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의 친연성을 월천학단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문제는 󰡔월천집󰡕 판본 비교를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에 해당하는 필사본과 1666년 간행본의 내용을 비교‧검토해 보았을 때 필사본에 수록된 합천과 관련된 기록들이 간행본에는 모두 산삭되어 있었다. 더구나 간행본에는 남명을 추모하는 내용의 「聞曺南冥訃」가 산삭되고 정인홍을 강도 높게 비판한 「偶見仁弘南冥集跋語」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간행본의 정리 과정이 정인홍과 그 문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초기의 필사본은 수용의 입장에서 정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목 사후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啓請과 종향·배향에 대해 향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종향이 지연되다가 金中淸이 조정에 나아가 직접 啓請을 준비하면서 빠르게 추진되었다. 때문에 종향을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대북파의 지원이 있었다고 의심했지만, 또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대북파와 대립 없이 종향이 공론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인홍의 문인들과 친연성을 보이는 조목의 교유활동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조목 사후 초기에 조목의 문집을 정리했던 문인들은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과의 친연성을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향을 추진하여 대북정권 내에서 무리 없이 공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5.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유학 덕목을 실천하는 기초였던 심신관리는 修身이며 이를 養生, 養心이라 하였다. 종래 남명학 연구에 서 남명이야 말로 자기수양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남명과 그 문파들의 수신 즉 심신관리의 지혜에 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 는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관리 지혜의 모태를 남명이 찬술한 성리학 요약서인 學記類編, 또 남명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찾고자 하였 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에서 의학은 도덕적인 수양을 방해하는 잡학 이자 자기 몸을 보존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 위한 일상적인 기술로 취급되었고 이는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 학과 의학은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송 대 신유학에서 신체원리와 병리현상의 개념이 적극 수용되면서 의 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송 대 신유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 성리대전과 당대 유학자 들의 言表들인데 학기유편에서는 주로 이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학기유편에 근거한 생명적・역동적・실천적 세계관은 곽재우, 정인 홍, 김우옹, 정구 등의 예와 같이 행동하는 삶의 바탕이자 보이지 않는 계율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심신관리와 치병에 관한 행적은 주로 남명집에서 확인되었 다. 남명은 몸을 다스리기 이전에 마음 수양을 기초로 보고 ‘좌우명’, ‘패검명’, ‘혁대명’ 등을 지니고 '‘神明舍圖’를 붙여놓고 평생 ‘銘’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또 남명은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고자 항상 정좌수 행과 猩猩子의 쇠방울 소리, 敬義劍의 날카로운 형태를 통해 수시로 의식을 각성시키는 등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행하는 심신수양의 방 법을 보여주었다. 남명이 일생동안 겪은 질병에 대해서는 9세 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연보의 기록이고 문집에서는 거의 40대 이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다만 20년 가까 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남명의 현기증과 두통이 고질적 지병으로 확인되었다. 남명의 성정은 자신은 물론 일상다반사에 대해 지극히 엄정했다. 이와 같은 그의 성정이 만성적인 피로감과 두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보았다. 남명은 약재를 구하거나 약을 짓는 등 본인과 가족의 질병에 대해 직접 치료를 행했던 것으로 나타나 그의 행장 등에 기록된 다양한 분야 에 관한 능통하고 의약도 섭렵했다는 구절과 다르지 않았다. 남명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학문관과 출사관을 가졌던 퇴계와 심신관 리, 의료행적을 비교해 보았다. 퇴계 본인은 물론 지인들에 대해 행한 다양한 의료 행적이 전하지만 오늘날 유학자의 양생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활인심방의 편저하기도 하였다. 퇴계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 에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양생서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남명 문하에서 는 망우당 곽재우의 양심요결이라는 제목만 전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양생서는 전하지 않는다. 남명의 문인 중 한강 정구는 의서저술과 대민의료시설 재건 등을 통해 修己와 安人의 실천의지를 보여주었다. 한강은 의서 외에도 대민 구제를 위해 성주의국을 설치하였다. 성주의국은 임진왜란 후에 피폐 해진 의료시설로 한강은 이를 재건해 대민의료의 기반을 갖추고자 하 였다. 한강은 60대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73세에 중풍으 로 오른쪽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한강은 중풍 발병 이듬해인 1616년부 터 중풍 치료를 위해 온천기행을 시작하여 이후 3년간 지속하였다. 한 강의 온천치료를 위한 기행은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자세하다. 봉산욕행록은 1617년 7월부터 9월의 기록으로, 45일 동안 의 여정, 한강이 매일 반복적으로 목욕요법을 행하고 제자와 관료를 접대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있다. 남명의 또 다른 문인 망우당 곽재우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으로 나서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망우당은 개인적으로 불우했고 관료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이 과정 에서 망우당은 불로장생과 신선의 세계에 심취하였고 일반적인 유학자 들의 양생이 아닌 수련 양생의 길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이 50대에 이르러 벽곡조식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망우당의 벽곡조 식에 대해 허균과 성여신은 한나라 장량에 버금가는 처세술이었다고 변호하였다. 한국도교사에서 망우당에 대한 평가는 조선단학파의 맥을 잇는 한 사람이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신선을 넘나드는 전설적인 인물 로, 덕천서원의 유생들에게는 남다른 기개의 선배로 남았을 것이다. 남명을 비롯한 문우, 제자의 박학풍은 남명문파들의 공통된 특징으 로 나타나고 있다. 덕천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각재 하항,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의 제자인 함양 선비 고대 정경운 등의 예와 같이 의약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료하고, 대민구휼을 위해 사우들과 의론을 펼치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사상이 재전제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덕천서원은 南冥 曺植(1501-1572)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 문인 寧無成 河應圖가 자신의 田莊을 서원 터로 제공하여서 처음 德山書院 으로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남명의 감화를 받은 여러 문인 들의 스승을 존모하는 마음과 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관찰사와 진주 목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학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파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원장과 원임이 있어서 제대로 운영하여야만, 제향된 인물이 추구했던 학문 정신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교화의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가 하는 문제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만년 강학지에 설립된 것이어서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설립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초기에 서원 운영을 담당했 던 이들은 ‘범남명학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파가 주도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치적 으로 패퇴함으로써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가문으로 단성 지역에는 안동권 씨, 성주이씨, 합천이씨, 진주류씨, 상산김씨 등이 있었고, 진주 지역으 로는 안계‧명석 및 수곡‧단목에 거주하는 진양하씨 사직공파와 시랑공 파, 나동의 태안박씨, 소남의 함안조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가문 이외에도 여러 십여 가문이 있지만 원임에 선임된 숫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가문이 덕천서원의 운영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덕천서원의 창건 및 초기 중건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후손들이거나, 초기 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물들의 후손 들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남명집 훼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서인화와 남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서원의 운영은 남인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모두 남인 가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우의 연원 또한 남인 계통을 따라서, 갈암‧밀암‧대산‧정재‧한주 등과 성호‧순암‧번암‧성재 등을 종유한 인물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