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俛宇 郭鍾錫의 「入德門賦」가 어떤 시대상황과 배경 속에 서 창작되었으며 글의 전개방식과 주제의식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 으로 접근한 글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선 시대상황과 창작배경을 살피고, 이 글의 구성방식을 굴원의 「어부사」와 비교해 분석하였으며, 이 글의 내용전개에 나타난 작가의식을 몇 가지 특징으로 포착하여 드러내었다. 그리고 경상우도 지역에 면면이 전승된 남명의 도학자상 이 이 글을 지은 작가에게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는지를 함께 살폈다. 이 글의 요지를 간추려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적 전환기에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학자 면우는 21세 때 晦窩라 자호하고서 「晦窩三圖」를 그렸는데, 요지는 주자학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면우는 10여 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가 28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이 구도적 의지를 다짐하여 「沙 上賦」를 지었고, 그 이듬해 정월 초 남명의 도학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에 있는 입덕문에 이르러 「입덕문부」를 지었다. 이 글은 면우가 구도적 의지를 새롭게 다짐하던 시기에 남명의 도학을 새롭게 인식하고 表章 하여 남명정신을 이어가고자 지은 것이다. 「입덕문부」의 구성방식은 외형적으로 屈原의 「漁父辭」와 닮아 있다. 그러나 내용전개의 측면에서 보면 문답의 주체가 바뀌고, 주제의식이 전혀 다르다. 「어부사」는 혼탁한 시속에 휩쓸려 사는 어부와 홀로 청렴 하고 홀로 깨어 있는 굴원의 가치관이 대립적 구조로 설정되어 있다. 반면 「입덕문부」는 어부가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남명의 도학, 남명학 의 전승, 구도의 방법 등을 상세하게 일러주는 전개방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입덕문부」는 序에 작가의 憂道意識을 말하고, 결어에 작가의 求道 意志를 드러내고, 본문에 어부가 남명학 및 구도방법에 대해 일러주는 삼단구조로 되어 있다. 어부는 남명의 도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은자의 모습, 난세에 학자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 다. 이를 보면 「입덕문부」의 주제의식이 남명의 도학을 표장하고 그 도를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다짐한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입덕문부」에 나타난 作家意識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序에서 憂道意識을 말하고 本文에서 남명의 도학을 말하고 結語에서 求道意志를 천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도가 무너진 시대에 남명을 본받아 구도의지를 새롭게 다짐한 작가의식을 투영한 것이다. 둘째, 본문에 남명의 도학자상을 부각시켜 우리나라 도학을 연 인물로 본 점이다. 특히 퇴계와 나이도 같고 道도 같고 德도 같고 淵源도 같다고 한 점은 남명의 도학을 퇴계의 도학처럼 正脈으로 본 것이다. 셋째, 남명의 도학이 후세에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온 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부각시킨 점이다. 이는 남명의 도학이 남명학파가 와해된 뒤에도 경상 우도 지역에 그대로 전승되어 내려온 점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을 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거론함으로써 영남 도학 이 晦齋·退溪·南冥 세 선생에게 발원한 점을 부각시킨 것, 남명의 도학 세계로 들어가는 입덕문 주변의 낙락장송을 남명정신을 상징하는 것으 로 핍진하게 그려낸 것 등이 돋보인다. 넷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 덕천서원이 훼철되어 남명의 도학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된 시대 의 위기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다. 이 「입덕문부」가 1874년 정월 초에 창작된 점으로 보면, 덕천서원이 훼철된 직후 참담한 정신적 공황 상태 속에 다시 구도의 의지를 곧추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작가의 절박 한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이 「입덕문부」는 19세기 후반 경상우도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남명학에 대해 어떻게 재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며, 도가 무너지는 시대에 남명정신을 고취하여 새롭게 구도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지어진 글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남명학에 대한 인식이 이 지역에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조선 후기 경상우도 남인계 학자들은 남명과 퇴계의 도학을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남명학파는 그 성립 초기, 즉 남명이 생존하던 시기와 그 문인집단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인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는 우리나라 학계와 정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 형을 당하고부터 상황은 急轉直下하였다. 반정 이후 남명학파적 성격을 유지한 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명목과 실상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연유로 해서 17세기 중후반부터 차츰 退溪 學派化 내지는 栗谷學派化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내심 북인 세력으로 존재하던 남명학파의 일부가 1728년에 ‘戊申亂’을 일으키다 궤멸됨으로써 설상가상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 다. 이즈음에 이르게 되면 남명학파의 목숨은 거의 끊어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진주 인근에서는 河世應·河必淸·李甲龍·李志容·李佑贇 등의 인물이 꾸준히 학맥을 이어왔던 것이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정조가 남명에 대한 제문을 직접 지어 사제케 한 뒤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기가 올랐음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 李源祚·張福樞·李震相·朴致馥 등 을 이어 金麟燮·許愈·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 등의 저명한 학자가 대거 굴 기하게 되었다. 특히 俛宇 郭鍾錫(1846-1919)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서 우도 지역은 물 론 좌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 명망을 한 몸에 받는 대유가 되어, 고종의 지 우를 입었으나 망국의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경술국치 이후 1919년 파리 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유림의 대표로서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는 일을 주도한 뒤 일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저술이 너무 호한하여 근래에 이 르도록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우 곽종석의 여러 면모 가운데 남명학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더듬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면우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남명학파적 요소가 뿌리 깊은 곳이고, 혈연 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의 가계에서도 남명학파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학연의 측면에서 보면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퇴계학파적 요소 가 두드러진다. 둘째, 면우는 남명 정신의 핵심을 그의 ‘敬義’ 사상에서 찾고, 이 사상이 우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가야 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면우는 「신명사부」를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하여 신명사의 유래, 靜的 居敬의 상태, 處事接物時에 私欲과 邪念이 일어나는 과정, 이를 廝殺하여 이른 바 ‘復其初’하는 과정 등을 신명사가 겪는 治亂의 역사로 상정하여 매우 역동적 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남명이 내세웠던 경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앞의 두 단락은 敬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義를 드러낸 것이다. 敬義를 직 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敬義의 의미를 매우 심도 있게 드러내었다. 넷째, 면우는 南冥을 매우 尊慕하였지만 退溪와 함께 崇尙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이 희미해지면서 남인의 경 우 퇴계학파의 학문이 서서히 그 자리를 대체해 온 결과라 할 것이다. 남명의 사상 가운데 그 핵심이라 이를 ‘敬義’에 대한 계승 의지는 면우 또한 매우 투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있는 엄정한 출처와 실 천 지향의 측면은 다소 약화되고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있었으 니, 이는 대체로 퇴계학파적 면모의 확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학 자로서 사우의 연원은 결정적이므로 면우의 문집에 퇴계학파적 면모가 두드러 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명학파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대한 지향성이 뚜렷하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본고는 면우 곽종석의 문학사상을 고찰한 것이다.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기본 적인 사고들을 문학사상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내용별로 본질론·창작론·비평론 으로 분류하여 검토하였다. 본질론에서 면우는 도덕을 갖춘 吉人이나 君子의 문장을 진정한 문학이라 보 았다. 이때 도덕이란 일종의 작가의 내면세계인데, 그것은 전통적 문예이론에 서 말하는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志趣·個性·才能·品格의 文氣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면우는 문학의 본질에서 문학작품이 단순히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알 게 해 줄뿐 아니라 그 시대 정치의 治亂得失과 사회의 문화나 분위기를 알게 해 주는 治世의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즉 知人論世와 移風易俗의 기 능을 담당할 수 있어야 진정한 문학이라고 본 것이다. 또 문학에서 추구해야 할 본질은 文藝性을 고도로 높이는 것이나 명망을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자신 의 인생에서 實質을 추구하여 실천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면우는 文의 實이라 하였다. 문학의 본질로서의 實이란 存心과 立誠의 학문을 통하여 도덕 을 내면에 확충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부득이하여 유출된 말이 글로써 형상화 된 것이었다. 그것을 면우가 인용한 말로 표현한다면 작가의 층위에서는 修辭 立誠이고, 사회적·문화적 층위에서는 經天緯地의 文이다. 창작론에서 면우는 存養省察과 學問講究와 常行以謹과 凡事以理가 축적되어 부득이하여 말에 드러나고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는 창작의 과정이 求道의 과정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求道의 과정과도 같은 創作의 과정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에 대해서 문으로 표현하려는 대상에 대한 깊은 理解와 識見의 올바름과 實踐의 專一함을 들었다. 또 면우는 곧바로 率性의 학문을 닦아 나아가다보면 文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成文章의 경지 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작의 과정에서도 결국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내면의 도덕을 확충하는 存心의 공부이지 文辭의 枝葉을 좇는 공부가 아 니라는 것이다. 즉 求道의 과정으로 표현한 창작의 과정에서 存心의 공부는 그 핵심을 이루는 방법론으로 제시된다. 비평론에서 면우는 이반룡·왕세정이 작품의 실제에 보인 擬古的 실천이 부정 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문장을 전범으로 삼는 것 에 반대하였다. 典範을 상정함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道에 얼마나 羽 翼이 되는가에 기준을 두어 玉石을 가려서 취해야 함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左 傳과國語와 같은 先秦兩漢의 규범적 텍스트조차도 취사선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 文을 비평하는 기준으로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學問과 節槪에 두었 다. 한편 면우는 공령문의 폐해가 심지어 道를 밝히는 말이나 학식이 높은 자의 詩나 聲律에 맞지도 않는 글을 막론하여 퍼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衰世의 文 章에 亡兆가 든 단서를 功令文에서 찾은 것이다. 면우는 文明의 한 기축을 담당 하는 문학이 허물어져간다고 인식하고, 그것을 文明守護의 차원에서 扶持하려 고 노력하였다.
19세기 영남 학계에는 李滉 이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心은 理氣가 합해 있다’는 설을 굳게 지키는 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러한 학계의 경향에 정면으 로 맞서 李震相은 心卽理설을 제창하였다. 이진상의 제자인 郭鍾錫은 당시 영 남학계에서 ‘異端’으로 비판받았던 스승의 心卽理설를 잘 계승하여 변호하고 발전시켰다. 곽종석은 心學의 요체인 知와 敬에 매우 주목하였다. 그는 情(사단칠정)이 發 할 때에 知와 敬이 그 情의 발함을 主宰한다고 보았다. 知와 敬에 대한 그의 깊 은 탐구는 어려운 시대를 구제해나갈 이론을 眞知와 實踐이라는 두 측면에서 확보하려는 학문적 노력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곽종석이 明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명덕을 心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명덕은 心과 身, 性과 行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명덕 을 心이라고만 해버리면, 大學의 八條目 중 ‘正心’에서 ‘明德’을 밝힌다는 일 이 마쳐지게 되어버려 그 뒤에 이어지는 ‘修身’은 혹처럼 붙어 있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그는 명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곽종석은 서구의 公法과 哲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서구의 공법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1919년에 그의 理學은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仁義에 근거한 공법질서와 功利의 私心이 없는 서구의 철학과 그것에 토 대를 둔 서구과학을 인정하며, 하루빨리 조선의 독립과 평화가 성취되기를 바 랐다.
곽종석(1846-1919)은 조선이 멸망할 즈음에 살았던 문장가이자 사상가이며 또한 애국지사였다. 곽종석은 사서오경에 대한 경학적 견해를 다양하게 남겨놓 았는데, 특히 그의 논어학은 주목할 만하다. 곽종석 논어학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주자학파의 주석 에 대한 정밀한 검토이며, 둘째는 경문의 독자적 해석, 셋째는 ‘心卽理’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 등이다. 곽종석 논어학의 이러한 세 층위는 그의 논어학이 가지는 특징인 동시에 조선논어학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특징인 주자학파의 주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조선주자학파 논어학의 보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문에 대한 독자적 이해와 심즉리 사상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퇴계학파의 경학적 전통안에서 충분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점이다. 퇴계는 주자 경학의 충실한 계승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경문을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곽종석의 스승인 이진상은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논어』 해석에서 이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곽종석의 독자적 경 문해석과 심즉리설에 의거한 『논어』 해석은 모두 그가 스승으로 삼은 퇴계와 이진상의 논어 해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곽종석의 논 어학을 조선주자학파, 더 좁게는 퇴계학파 논어학의 계승자적 지점에서 그 위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 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 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 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 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 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 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유교문 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한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 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 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 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 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 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 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 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받아 조선 말 최대의 학파라고 일 컬을 수 있는 한주학파를 선두에 서서 이끌면서 ‘개명한 도학자’로서 일생을 살 았다. 곧 그는 이진상의 竪看·橫看·到看의 三看法과 理發一途說, 心卽理說을 계 승하여 옹호하고, 이진상이야말로 공자와 맹자, 주자, 이황을 정통으로 계승하 였다고 주장하였다. 한주학파의 리발일도설과 심즉리설의 핵심은 심과 그 속에 있는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여 주체에 철학적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단순히 이론적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가까이로는 어려운 시 기 도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눈앞의 현실 을 인식하고 참여하는 데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俛宇 郭鍾錫(1846-1919)의 大學 해석 중 특히 ‘明德’에 대한 해석 및 그와 관련해 다른 사람과 논쟁한 것을 중심으로 그 설의 특징과 의미를 논한 것이다. ‘明德’에 대해, 기호학파 洛論은 本然之氣로 보고, 湖論은 心의 光明處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모두 心卽氣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 면 嶺南學派는 朱子가 心統性情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하여 心合理氣의 관점에 서 理를 위주로 해석하였다. 19세기 퇴계학파의 정맥을 이은 柳致明은 명덕을 氣淸理徹이라 하였는데, 그 의 문인 朴致馥은 ‘주자 이래 相傳한 嫡訣이라’ 하였다. 유치명의 견해는 명덕을 心合理氣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李震相의 心卽理를 위주로 하는 학자 들은 氣를 겸하여 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郭鍾錫의 설도 마찬가 지이다. 그런데 곽종석은 대학 삼강령․팔조목의 논의구조에 나아가 明德과 心을 엄 격히 다른 것으로 변별함으로써 하늘에서 얻은 心之本體를 가리킬 뿐만 아니 라, 行事를 통해 얻어지는 孝忠恭重 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점이 스승 이진상의 설 및 동문들의 설과 변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동문 들과 논쟁한 핵심 사안이었다. 그는 명덕을 선험적인 본원은 물론 후천적인 경 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丁若鏞이 후천적 경험만을 중시한 것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갖는다. 대체로 19세기 主理論者들이 主宰性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본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곽종석은 행사를 얻어지는 實得을 모두 명덕에 포함시키고 있어 主宰性과 아울러 實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자들과 변별되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체용론은 본체에 치중하지 않고 該體用의 논리를 갖고 있 다 하겠다.
이 글은 한국유학사에서 면우 곽종석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 그리고 현실 대응 등 그의 삶과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게 살폈다. 곽종석은 조선 말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간재 전우와 함께 조선유학의 쌍벽으 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학통과 당색에서 완전히 초탈하지는 못했지만 일생을 융합주의 신념 아래 살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고 영 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넘나드는 등 보폭 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유림을 세력화 하고 대동단결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문 특성은 ‘집약’과 ‘會通’에 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한 뒤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체계화하였으며, 연구방법론 에서도 여타의 학자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곽종석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가교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개명적이고 시대 를 앞서가는 안목과 시대인식은 후학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은 철학․종교․교육․역사학 및 독립운동 여러 방면에서 큰 구실을 하였다. 유학사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전통의 근대적 계 승을 위해 신학(서구사조)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곽종석의 학문관, 학문 방법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고, 전통 학문의 근대적 계승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방향성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