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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18

        1.
        2023.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서서평(徐舒平)의 22년 선교활동과 그의 전도부인들과 의 동역 관계를 통해 선교전략과 활동들을 분석하였다. 호남지역을 중심의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지금까지도 그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남장로교 선교부 간섭을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그는 ‘걸어다 니는 하나의 선교부’처럼 의료선교를 위한 병원간호사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간호사양성 및 국제무대 진출, 여학교사업, 순회전도 및 교회개척, 확장주일학교, 사경회, 부인조력회활동, 사회사업 등을 하였다. 이렇 게 그가 단독으로 엄청난 사역의 양을 감당하고 전문적 역량을 사용하며 비전을 상당히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 강점 식민지 아래서 생존의 욕구가 강했던 현지 한국여성기독교인들의 계몽의지와 순수신 앙으로 그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동역했기 때문이다. 성육신적 선교를 이행했던 그의 물음에 구원의 희망으로 응답한 전도부인들로 인해 한국교회의 부흥, 기독교문화 형성, 여성지위향상, 사회개혁의 기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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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1.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선교역사에 대한 기술이 서구의 입장에서 점차 비서구의 수용사 (受容史)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장로교 알렌이 내한한 1884년 혹은 감리교 아펜젤러가 내한한 1885년 을 기준으로 1984~1985년에 걸쳐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 내한 이전에 중국에서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성경번역까지 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자생적 ‘소래교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더구나 내한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누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추동력과 내부로부터의 흡인력을 모두 고려하는 중도파 ‘역사기술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선교사 내한 이전에 일어난 최초의 선교사건까지 포괄하는 선교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관점에서 한국선교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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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3·1운동이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이 었다면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교분리라는 교리를 넘어서야 했고, 천도교라는 이웃종교와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극복해야 했다. 3·1운동에 나타난 신앙유형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니라 두 진영을 넘어서서 하나 되는 통전적 신앙유형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양태는 초월적 신비주의와 계몽운동으로 분열된다.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으로는 자주독립, 민주주의, 평화, 에큐메니칼 정신, 종교간 협력과 연대 등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교회간 코이노니아와 남반부 교회를 강화시키는 선교, 교회내 민주화와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에 기여, 평화교육과 평화문화 배양과 평화통일에 기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로 양분된 교회를 통전적 신앙양태로 회복, 위의 과제들과 지구생명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간 협력과 연대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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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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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융합사회의 도래라는 사회변동에 대한 종교, 특히 불교 의 대응 방향을 포교 체계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다. 이 논문의 구 체적 내용은 융합사회의 특성, 융합사회와 불교의 만남, 한국 사회의 종교 및 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융합사회에 대한 불교의 대응 방향 등이다. 융합사회는 이질적 요소들의 수렴, 혼합, 변형, 분화 등을 통한 재 구성이나 창발적 출현을 기본적 속성으로 하고 있고, 사회 전반에 걸 친 유연화 현상을 추동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합성의 원리, 조화의 원리, 융합적 소통합리성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해 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또한 현대 한국 사회의 종교 및 불교는 성장 지상주의, 기복성, 종교인구의 중산층화, 종교간 갈등 심화, 종 교에 대한 불신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점들은 융합사회의 특성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에, 융합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발전의 단 계에서 종교와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결국 융합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포교 체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지향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포교 주체의 비판적 성찰과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둘째, 콘텐츠 차원에서 융합사회에서 강조되는 개방성, 다양성, 호혜, 협력, 공존 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리적 재해석과 수행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 요하다. 셋째, 융합사회의 포교 환경에 부합하는 제도 개선과 포교 매체의 효율적 구축 및 활용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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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6.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목적은 초기 이북지역 개신교 선교의 특징인 한국인의 ‘자생적 수용’에 존 로스의 한글 성서가 주었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존 로스는 현지 문화를 존중했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사상이 그의 성서번역 과정에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인의 선교수용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그에게 나타나는 현지인 중심의 선교 사상과 방법은 그의 유교 이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유교를 종교로서 인식하였던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로서 이해하였다. 그는 현지문화 가운데 유교문화가 전 계층에 걸쳐 매우 강했음을 인식하였고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도 유교가 존중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존 로스 이전의 많은 서구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를 시도하려고 한문 기독교 문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문이라는 언어의 특성상 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계층은 제한되었기에 선교문서가 모든 이들에읽혀지지 못했다. 이는 모든 현지에게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의미했다. 이를 위해 존 로스는 한국인과 함께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는 번역과정에서 이북지역 한국인의 이해와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서구 선교사의 입장에서 번역이 잘 되어도 현지인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를 수정하였다. 이것은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한문성 서에 단순히 발음만 한글로 토를 달았던 이수정 역본이 온전한 번역이 아님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번역은 단순히 글을 번역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지인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잘 드러낸다. 이런 번역의 결과로 당시 존 로스의 한글 성서가 이수정 역본보다 수요가 더 많았으며, 이는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수요의 결과는 성서의 한글화가 주는 의미가 번역의 차원이 아니라 존 로스의 번역 사상이었던 현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선교지에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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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5.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나라는 임금노동자의 30%-50%(600만-1,000만)이 비정 규직 노동자이지만 사회복지 체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실업의 공포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비정규직 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 아픔, 좌절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한국교회는 비정규직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우선 비정규직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정규직에 대한 다양한 정의, 비정규직의 규모에 대한 정부 통계와 민간연구소가 추정하는 규모의 차이와 이유, 비정규직이 발생하는 배경을 케인스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의 경제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찾고, 비정규직의 현황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비정규직의 문제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불안정한 일자리이 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제도적 문제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노조에 가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비정규직의 사회적 문제 로는 계층 구조의 양극화와 사회적 양극화로 인간 사회 분위기의 악화를 들 수 있다. 비정규직의 대안으로 정책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 책으로부터 경제민주화로의 정책의 변화, 기업 중심 노동유연화 정책으 로부터 노동자 중심의 노동시장 정책으로의 전환, 정규직 중심의 사회 보장 정책으로부터 비정규직과 실업자 중심의 사회보장 정책으로 전환 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비정규직을 포함하도록 개정하고,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해야 하며,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를 만들고, 노동자와 비정규직에 대한 시민의식이 개선되도록 학교교육과 시민교 육에 노동자와 비정규직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기업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것은 저성장기 자본의 축적논리의 일환으로 대자본의 핵심 산업 이외에는 거의 전부 외주화, 비정규직화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업 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만들어 운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선교를 위해서 깔뱅은 인간의 회복과 사회회복의 밀접한 관계, 물질적 삶과 영적 삶의 긴밀한 관계, 부자와 가난한 자사이의 영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재화의 순환, 인간 본질로서의 안식과 그로 인한 해방적, 창조적 노동, 재화의 순환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국가의 책임,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임금 등을 제시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위한 교회의 선교과제로서 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신학적 이해와 기독교교육에 적용해야 하고, 교회가 재화를 가난한 자에게로 흘러가도록 미소금융이나 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전개해야 하고, 고난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 예배, 교회가 노동자의 교육 공간, 상담 공간, 치유공간이 되어 주님 안에서 안식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회복하고 치유 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최저임금을 준수하고, 생활임금을 지급하며, 이웃종교인들과 시민사 회단체들과 함께 국가의 불의한 법을 개정하고 제도와 의식을 개혁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를 중심에 두는 사회보장제도와 경제민주화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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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5.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올해 2015년은 헨리 게어할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당시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예를 들어 언더우드의 31년 사역, 1885-1916) 비록 17년(1885-1902)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졌지만,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았을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발전과 한국 근대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아펜젤러의 삶과 사역을 주로 다루었는데, 그의생애는 두 개의 특성으로, 그리고 그의 사역은 총 일곱 개의 특성들로설명하였다. 우선 아펜젤러는 중생을 경험한 후 감리교인이 되었고,그의 아버지는 아펜젤러가 장로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감리교선교사가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초기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선교 초기 미국과 한국 정부의 조언을 수용했던 착한 사람이었다.아펜젤러는 쌀(rice)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사역했다. 물론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운 초기 설립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교육의 발전을 위해 공헌했던교육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을 포함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이끌었던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중요한 점은 아펜젤러가 계몽운동가와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아펜젤러는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던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들, 한국인들과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있었던 착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수용과 저항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만한 준비가 될 때까지 미국과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미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의 한국 점령을 암묵적으로 허락하거나 고종이 근대민주국가로의 변화에 대해 거부했을 때는 미국과 한국정부에 당당히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할 때, 한국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반드시 그의 열정적인 영성,따뜻한 사회성, 냉철한 분별력에 관해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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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선교의 결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민족적이며 시대적인 큰 선교적 사명을 맡겨 주셨음을 확신한다. 세계 선교사에 유례없이, 한국 교회는 지난 1세기 동안 천만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을 보유하고 5만에 가까운 교회를 세우며 매년 수천명이 넘는 신학생을 배출해내어 왔다. 세계는 한국 교회의 이러한 양적 성장을 부러워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저력이 세계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감당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한국 교회도 이 사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는 이와 같은 외형상의 화려한 모습만을 자랑하거나 만족해하고 있을 때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건강한 신앙의 안목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현실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잘못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라고 본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한국교회를 성찰하고 오늘의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성장의 이면에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혼란이 심각한 이때에 한국교회가 민족을 구원하는 교회 본래의 사명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통계자료에 의하면 90년대를 고비로 교회의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교단에 따라 성장 둔화 등 위기의 징후가 현저해지고 있다. 이제 그 원인을 밝혀내고, 그 바른 처방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유럽 교회들에서의 정체와 위축의 길을 답습할까 심히 염려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무엇이 한국교회의 침체 원인의 문제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고유의 선교적 관점에서 문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처방 및 선교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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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0.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objectiv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Western eclectic houses at Ojeong-dong Missionary Village in Daejeon city, focused on the spatial and structural changes due to eclecticism. The consequences of the comparative analysis between the eclectic houses and two reference buildings, Myeongjae residence and Moore house, are as follows. The diverse aspects due to eclecticism can be summarized as two concepts; transformation and simplification. The transformation has appeared in the characteristic spatial elements such as an-madang, entrance and corridor, in the territory organization and the connection between building and yard, and in the roof and wall structures. The simplification has appeared in the layering of the building space, and in the joint of roof and wall. The methods of eclecticism and the resultant aspects from them that are clarified through this study are expected to be referred in examining the new possibilities of the hanok.
        5,200원
        12.
        2010.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8,000원
        15.
        2008.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oday, a lot of schools aim for open education and school. In the same context, Christian university can’t be equal to academy mission, building a high wall of a doctrine. As Paul confesses that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for the Gospel under any circumstances, Christian university must be open for the Gospel. Above all, open school is open for all students and must be always ready for a meeting. Open Christian school is to ask a meaning of life and to meet students asking a question of existence, receiving them with a open mind and help them welcome Jesus Christ in the Holy Spirit. This is possible to be one in the center of Christ. School personnels who work in Christian university are to serve faithfully. They must take part in the faith training program actively and positively as ripe christians. Students who work in missionary organizations and christian groups have to cooperate each other in university. Because of spiritual superiority and arrogance of faith, we must not be separated and repeat past mistakes. On the contrary, we must receive in a humble way the comment that missionary organizations were a obstacle to academy mission. In the case of a part of missionary organizations, officials and core members used to build a wall and blame a church. And so, we have to improve this negative attitude. When members in campus as a God people have to cooperate each other and live in a place of life as the witness of the Gospel, the future of the campus mission will be better and brighter. We will get the vision of the future, conversing past history with present situation. First, we will examine the missionary history of christian university briefly and diagnose the situation of campus mission. On the basis of this diagnosis, we should present several important tasks to practice for mission. This paper will give a direction of campus mission with a limitation of research range. We will examine this paper in the center of Jeonju Univers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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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07.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thesis is about John Thom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The coverage of this thesis begins from his birth in the U.K. and his ministries, how he came to Korea and his ministry in Korea from 1910-1911. In total, John Thomas spent 10 years serving in Korea, therefore assessing his ministry is somewhat out of proportion, however this thesis will focus on the background of his calling to Korea and the beginning of God’s divine works. 1. John Thomas had evident experience in the Fourfold Gospel. 2. His devotion and faith made him a clear model as Christ’s servant. 3. He was a man of prayer. 4. Through the successful ministry in the U.K. he demonstrated the blessings of God’s presence. 5. He made a network of supporters for prayer and financial aid. 6. He was a prominent Evangelical leader of his time and was selected as the main speaker at the annual OMS conference in 1911. 7. He had a call to preach the holiness element. This calling began to spread in the other denominations and missionaries also. 8. He not only loved the lost souls of Korea but also cared for the people of the world. 9. His ministry had a harmony of teaching and ministering. Through his character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holiness element gave him authority to impress many people. 10. Although he had difficulty in learning Korean, his input and effort was vital in setting the foundations of the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11. The early records of his ministry which influenced many denominations and other missionaries in Korea and Japan shows how influential he must have been in the later years. 12. He contributed to the printing of 10,000 copies of the New Testament, helped set up administrative procedures for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and his teaching, church founding and faithful mission works show the bright future ahead.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early days of John Thomas’s mission. There are still more research to be done about his character and the latter part of his ministry. However, the fact that a man of God, such as John Thomas was called to serve 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proves God’s purpose toward the KEHC and STU. Furthermore, through this research we need to find the elements that need to be continued and carried out in this day and age. Therefore it is inevitable the existence of holiness is revealed not only in Korea but also worldwide. This is the core value of KEHC and STU’s existence.
        5,100원
        17.
        2022.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스더 쉴즈(Esther L. Shields, 한국이름 秀日斯, 1868-1940)는 미국 북 장로교 파송 한국 간호선교사이다. 쉴즈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1897 년부터 1938년 만 70세로 선교현장인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40여년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 다. 그녀는 “세브란스의 천사”라 불리울 정도로 봉사의 삶을 살았다. 그러 나 그녀에 대한 연구는 그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가 의료 선교사였지만 의사가 아닌 간호사였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기 때문일 가 능성이 높다. 쉴즈는 미국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고 충분한 임상을 경험 한 후 선교사로 자원하여 한국에 왔다. 그녀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정식 간 호사로 사역하였으나 열악했던 당시 한국의 의료상황과 과중한 업무로 인 해 탈진하여 건강을 해쳐 병원 사역에서 벗어나 평북 선천에서 전도와 교 육 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세브란스로 복귀하여 은퇴할 때까지 이 곳에서 간호교육과 간호사들을 위한 사역 그리고 병원에서의 전 도와 사회봉사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쉴즈의 선교사 지원 이전의 삶과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시기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그녀의 선교사역이 갖는 특징을 몇 가지로 정 리하였다. 이를테면 그녀는 조직과 협동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이를 매우 중시하여 사역을 진행했으며 그것이 오늘날 한국간호사협회와 같은 기구 로 자라났음을 알 수 있다.
        18.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espite his popularity, the Rev. James S. Gale has not been given sufficient scholarly attention. How could it be? It appears that while Gale has been known as a missionary and a scholar of Korean studies, this two-fold identity has not been appreciated in a comprehensively way: scholars tend to interpret two aspects of his identity as contradictory ones or simply juxtaposed ones rather than as mutually interacted ones. In this context, in the area of Korean studies, they have seen him mainly as a Korean expert, without paying attention to his being a missionary; on the other hand, in the realm of Korean Christian studies, they have largely viewed him as a missionary, without properly relating this to his expertise in Korean studies. This article aims to overcome this discrepancy in the understanding of Gale in the contemporary studies, secular and Christian, in Korea. The thesis of this article is that the mutually integrated two-fold identity of Gale i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his thought and work; that is, he was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Such characteristics of his being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he prepared himself as a missionary in Korea through cultural identification, through which he gradually overcome his paternalism; second, he equipped himself with expertise in Korean studies, which enabled him to be a first-class cultural missionary, namely, a theologian of missionary indigenization; and last, he bequeathed his legacy as a missionary scholar, which paves the way for Korean studies as mission. Thus, he challenged the understanding of both missionary works and a mission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