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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9

        1.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Kang Soon Myeong did not live a life of hermit nor show extreme and mystical understanding of Bible, but he made efforts to show a practical life as Jesus did facing up the reality of country at that time.In the same time, he lived a life of serving the alienated, the old, the weak, the children and the lepers just as taking care of his own body. He also stayed in the organized church(church community) including his family life(a married life). He dreamed of the pure church of Christ which has no human authority and Christian country through evangelism by "Celibacy Evangelism Board." He strived for evangelism of rural community and agriculture promotion, social reformation movement by" Farmer's Practice School" which was looked upon as a pioneer of the Sae-maul(New Community) Movement.He also practiced a life of relieving the poor as well as developing a movement against the Shinto shrine worship. He did not compromise with a life of ease but he fought with ecclesiastical authority which resulted rejection by denominations. When he was regarded as heresy by denominational church, he started to work with the church of Christ which looked same as his thought, spirit and teaching and kept working with Lord's church for the rest of his life in spiritual peace doing his best effort. Kang Soon Myeong lived this kind of life because of the influence from Gagawa Doyohiko, a Japanese saint, Sadhu Sundar Singh, a Indian saint, Kim Goo, Kim Seong Sil, a hermit of Gum-gang-san, Kim Kyo Shin, a nonchurch leader, Bae Eun Hee, Christian socialist, Dong Suk Kee, a preacher of church of Christ, and Lee Sae Jong, an saint of Do-Am whom he respected as teachers in his lifetime. Christian Mystic, The Church of Christ, Restoration, A secession from the world, Apathy to family, Relief to the poor, Serving the outsiders, Self-control, Transcendency to denominationalism, Reverence for Life, Prayer, Celibacy Evangelism Board, Farmer's Practice School, Hersey.
        6,700원
        2.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집󰡕의 간행이 언제 처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이미 전병윤과 오이환, 김윤수의 논문에서 1602년이냐 1604년이냐의 논란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해 이 상필이 󰡔南冥學硏究󰡕 30집(2010.12.31간행)의 「󰡔南冥集󰡕 初刊年代 辨證」이란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간은 남명의 문인 정인홍이 그 서문을 쓴 1604년 8월 이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뒤 목판이 불타 관찰사 柳永詢의 도움으로 다시 판 각되어 간행되었다는 그 판본을 병오본으로 명명하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은 바로 그 병오본으로서, 제1권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고, 제2권과 제3권(부록)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다. 제1책은 서문 3장, 남 명행장 9장, 남명비문 6장, 제1권 37장 등 모두 55장으로 되어 있다. 제2책은 제2권 88장, 제3권 36장 등 모두 124장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명 집󰡕으로서는 最古本이며 完帙本이다. 이 병오본과 기유본을 대조하여 병오본의 내용을 기유본에서 어떻게 고쳤던 가 하는 점을 낱낱이 살펴본 결과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는 병오본에서 기유본으로 바뀌면서 112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이다. 전병윤과 오이환은 28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같은 곳에 서 84곳이 더 발견되었고, 그들이 보지 못했던 2권 마흔다섯 장에서 28곳을 발 견함으로써, 그 사이에 변화된 곳이 모두 112곳임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는 단순한 오자 수정이 72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은 대체로 수정될 만한 것을 수정했다고 하겠으나, ‘先乘霽日’의 경우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胤孫’의 경우는 잘못 수정한 것이었다. 셋째로 시 형식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 가운데 ‘全身五十年前u’의 ‘五十年’은, 이 판본을 근거로 기존의 ‘四十年’을 수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확정할 만하다. 넷째로 문맥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만하다. 이 가 운데서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신명사명의 뒷부분을 완전히 삭거한 것 은 退溪의 指斥을 염두에 둔 결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退溪에게 ‘獨立之地’라고 한 것이라든지, 權應仁에게 五柱를 보내어 자신의 임종 시기를 알아보게 한 편 지라든지, 異姓養子를 분명히 기술한 것이라든지, ‘江樓’ 시를 보각한 것 등은 앞으로 연구의 한 부분으로 인용될 만한 것이다.
        3.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4.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 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 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 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 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 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 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 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 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 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 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 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 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 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 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 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 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 [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 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 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 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 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 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滄洲家는 남명과 내암을 淵源으로 하는 가문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가문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창주가는 인조반정 이후 내암 정인홍과의 인척관계로 인해 집권 세력이 견지했던 태도와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의 남인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 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滄洲 河.이 주도하여 간 행한 ..남명집.. 판본에 대해 1651년 정인홍 관련 문자를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 고, 뒤이어 1665년 진주 유생 崔栢年의 ‘大北餘孼’ 誣告 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하여 창주가는 가문이 멸할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창주가는 당색을 老論으로 전환하게 된다. 河.은 창주의 손자로서 창주가가 老論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명은 내암을 비롯한 大北 관련 문자 및 퇴계 비판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남명의 문집을 淨化하고 퇴계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겸재 하홍도 의 의도에 따라 그의 문인들에 의해 훼판되자, ..남명집.. 釐正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의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의 동향은 하홍도의 입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하홍도를 중심으로 남명학 파의 주류가 퇴계학파의 남인 쪽으로 흡수되어 갔다. 최백년 무고 사건은 개인의 감정 문제로 인해 발생하였지만, 당시 창주가로서 는 河晉寶와 내암과의 인척 관계가 가문의 흥망을 가늠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 였다. 그래서 하명은 최백년의 무고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인홍 집안과 통혼 한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여 대북잔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결 국 서인의 종사였던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를 찾음으로써 창주가의 보존을 추구 하였고, 결국 당색을 노론 기호학파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명은 기호 노 론학파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世誼를 다졌고, 그의 행적은 후손들이 진주지역 노론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지속적으로 기호학파 명사들과 사우문인관계 를 맺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6.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7.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남명사상을 조선성리학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그 성격을 道學으로 규정한 뒤, 남명이 남긴 시 속에 나타난 도학적 성향을 밝힌 것이다. 이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남명은 조선성리학이 발흥하는 시기에 몸으로 공부를 한 道學者다. 그는 反求 自得의 깨달음을 중시했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몸에 실천해 나가는 反躬實踐 을 강조했다. 또 存養-省察-克治의 修養論으로 本源을 끝없이 涵養하였다. 그 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天德을 성취하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 王道를 구현하고 자 하는 이상을 가졌다. 비록 그가 왕도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늘과 합하는 길을 평생 추구한 위대한 求道者였다. 그래서 나는 顔淵의 ‘克己 復禮’․‘三月不違仁’의 경지에 오른 인물로는 후세에 南冥만한 학자가 없다고 생 각한다. 그는 25세 때 顔淵이 되기를 목표로 한 뒤, 끝임 없는 노력을 통해 안연 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남명의 시에는 天德의 成就를 위한 求道的 修行, 王道를 현실세계에 이룩하고 싶은 理想과 그럴 수 없는 현실의 間隙이 잘 나타나 있다. 天德의 성취를 위한 구도적 수행에는 「易書學庸語孟一道」․「神明舍圖」․「神明舍銘」 등에서 살펴본 存 養-省察-克治의 수양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특히 淵黙의 涵養이 본원을 이룬다. 그는 王道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할 수 없었지만, 伯夷나 嚴廣처럼 현실 을 떠나 隱逸自適하지 않고, 연꽃처럼 오염된 현실세계에서 涵養을 통해 이룩 한 천덕의 향기를 퍼뜨리려 하였다. 남명의 시에는 淵黙의 涵養을 통해 고도로 정제된 솔․명월․연꽃 등의 맑고 밝은 常惺惺한 정신세계가 들어 있고, 또 고사리 로 상징되는 伯夷보다는 연꽃으로 상징되는 柳下惠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現實 主義精神이 빛나고 있다.
        9.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is a research on the thinking basis and aspect of adapting reality represented by Nan-myeong(南冥) and Gal-cheon(葛川). I found next tendencies in each of their thinking basis by looking into the gener of 'bu(賦)' written by them, provisionally. 1. Nam-myeong regarded a fundamental problem as important; Gal-cheon considered a practical use in reality as important. 2. Nam-myeong pursued internal perfection of morality ; Gal-cheon pursued external enlightenment of morality. 3. Nam-myeong made an effort to cultivate his mind through practicing the virtue of self-development ; 'jon-yang(存養)', 'seong-chal(省察)', 'geuk-gi(克己)' ; Gal-cheon wished to make 'the reign of peace(太平聖代)' entering to the world with his frugal virtue. 4. Nam-myeong placed more importance on 'su-gi(修己)' than 'chi-in(治人)' ; Gal-cheon placed more importance on 'chi-in(治人)' than 'su-gi(修己)'. And I deduced next characters in the aspect of the adaption in reality considering their 'memorial to the Throne(上疏文)'. About the time when 'eul-myo-sa-jik-so(乙卯辭職宵)' was offered by Nam-myeong in 1555, he criticized severely the tumultuous national situation, and suggested its essential relief measures to King Myeong-jong(明宗). On the other hand, at that time, Gal-cheon pursued 'the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Way(安貧樂道)' after retiring from the official position of 'cham-bong(參奉)', and did not show any criticism for political or social condition in particular. When the government engaged both of them as a Nester at the throne changing era between Myeong-jong(明宗) and Seon-jo(宣祖) about 10 years later from 1555, Gal-cheon served in the government with 'hyeon-gam(縣監)' and 'mok-sa(牧使)'(names of county governor) responding to the recommendation, but Nam-myeong never entered into the official position after all. However, they cried for the reform of politic sphere each other. Nam-myeong pointed out the fundamental problems & principles with memorial to the Throne demanding sovereign must practice 'the rule of virtue(王道)' showing his own initiative, but Gal-cheon emphasized the relief measure concerning public welfare indicating the realistic problems. In addition, the Nam-myeong and Gal-cheon's principles on official position showed different aspect. Nam-myeong was eager to the actualization of 'the rule of virtue' regarding himself as an executer for 'King Yao and Shun's Tao(堯舜之道)', and did not want to get the position by departing from his principle at not proper time. Thus, he made himself as a man of virtue keeping the dominant principle. Differ from Nam-myeong, however, Gal-cheon pursued the life of 'the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Way' after retiring from the official position of 'cham-bong' in 1555, and it was derived from his avoid-make-trouble tendency with peripheral environments. Although it was a fact, Gal-cheon never gave up the will of 'administrating the state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經世濟民)', so he entered into the official position consequently. This is the Gal-cheon's right view of 'haeng-youg-sa-jung「用行舍藏 : If recommended, practicing Tao with taking up position. And if discarded, possessing his own Tao lonel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