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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웨슬리에게서 나타나는 루터 신학의 흔적을 원자료를 중심으로 추적한 연구이다. 그동안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상반된 강조를 했다고 서술해왔다. 그 결과 루터를 칭의의 신학자요, 웨슬리를 성화의 신학자라고 칭하고, 이 둘 사이에 커다란 신학적 괴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루터는 이신칭의를 발견한 공은 있으나, 성화에 대한 강조가 없다고 평가절 하하는 반면,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를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와 웨슬리는 다름이 아니라 같음의 카테 고리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사회적 성화에 대한 단초는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1520),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 등 여러 글에서 충분히 발견된다. 성화에 대한 루터의 언급도 『교리문답서』(1529)에 충분히 개진되어 있다. 웨슬리에게서 발견되는 칭의와 성화에 관한 신학적 출처는 그 단초가 종교개혁, 특히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루터와 웨슬리 사이에 매개물을 찾고, 웨슬리 신학에 등장하는 루터신학적 접점을 찾는데 있다. 접점이란 만나면서 살짝 스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터와 웨슬리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고, 제한된 지면은 모든 것을 다루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라는 주제로 제한했다. 사실 루터의 칭의론은, 웨슬리 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죄, 인간, 은총 등 기독교 신학의 핵심 영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소논문에서는 또 다른 신학적 영역으로의 확장을 자제하고 칭의와 성화의 이해만을 다루었다.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같은 틀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반면 웨슬리에게는 순간적 요소와 과정적 요소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칭의와 성화를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둘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다. 논문의 의의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 신학을 이해하는데 루터와 연관된 통전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점에 있다.
        2.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 S. 엘리엇 시의 텍스트를 이루는 구절들은 여러 겹의 다른 목소리들로 중첩되어 그 두께가 두껍다. 『재의 수요일』도 예외는 아니다. 그 목소리들은 단테, 셰익스피어, 종교의 경전 등 역사적 맥락에서뿐만 아 니라 그의 내면에서 온 메시지들이다. 텍스트의 화자이면서 청자인 엘리엇은 40일간의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에 이 목소리들과 함께 내면여행을 시작한다. 돌이킴, 성녀와의 만남과 육의 죽음, 어둠 속 그림자와의 대면, 장미정원에서 성녀와 합일, 말씀과의 합일, 새로운 차원의 돌이킴 등 여섯 단계의 내면 여행은 결국 하느님과의 합일을 통한 성스러움을 이루는 성화과정이다. 이 여행은 또한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개성화과정이기도 하다. 개성화과정은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해가는 과정이다. 의식세계의 자아는 무의식에서 보내온 꿈이나 적극적 상상을 통해 무의식세계의 원형들, 즉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등과 대면 하고 화해하여 최종적으로 정신의 총합이자 중심인 자기원형과 합일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성화과정을 개성화과정과 병치하여 읽어 보면, 그가 왜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앵글로 가톨릭교로 개종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 핵심적 이유는 그의 영적 내면여행의 안내자인 아니마, 즉 성녀의 존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중심적 구원론에 반 대해 신중심적 구원론을 제시했다. 그 결과 루터 신학은 인간의 전적타락 과 노예의지(인간론),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과 예정(신론), 그리스도의 의 의 전가를 통한 칭의와 성화(기독론), 성령의 계시에 의한 영적 시련과 위 로(성령론),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구원론), 구원에 토대를 둔 소 명의 삶(기독교 윤리) 등 신학의 제반 주제에서 구원의 원인과 공로를 오 직 하나님께 돌리는 일관성을 나타냈다. 동시에 루터는 신중심적 신학이 인간의 책임성 약화를 초래하는 것을 방 지하고자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한 자극과 동력이 되는 성화의 장치를 종 교개혁 신학 체계 안에 마련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 순종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 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자발적 성취로, 성령의 은혜는 칭의에 대 한 깨달음 뿐만 아니라 실제적 변화로서 성화로, 또 구원의 믿음은 행함의 열매로, 영적 구원은 세상에서 소명을 다하는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이 믿음과 행위 사이, 피안적 천국과 이 땅 사이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이 루터의 신중심적 신학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가 강조한 성화의 장치는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으로 분석한 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화의 장치에 대한 주의깊은 이해와 수용은 한국 개신교의 도덕성과 영성, 사회적 책임성 제고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길선주의 저작과 생의 보적(寶蹟)을 통해 그의 성화론을 고찰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현 한국교회의 정황은 교회의 거룩성과 성화 차원에서 볼 때 불행하게도 비관적이다. 한국교회가 심각한 고질병을 앓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본연의 사명을 상실했다는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다방면에서 난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길선주의 경건성과 삶을 분석하여 성화론을 연구한 사례는 부재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 모두를 살펴보았으며 특별히 길선주의 사상과 삶을 한 지평에서 통합하여 조망했다. 길선주가 자신의 저작들과 보적에서 보여준 성화에 관련된 중요한 관점들을 다음 두 가지 차원에서 정리했다. 첫째,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그의 거룩성과 경건성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가 보여준 성화의 원리와 중요한 용어들을 고찰했다. 중요한 개념들은 ‘그러므로의 신학’, ‘하나님 형상의 회복’, ‘확산의 원리’, ‘현세와 천국 사이의 아직으로서의 개개인의 천국’, ‘예수 그리스도의 칠보적(七步跡)’등이다. 둘째, 길선주는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적 성화를 보여주었다. 실천적 차원은 평양부흥운동, 애국적 계몽운동, 애국활동, 교육사역 등에서 고찰했다.
        5.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John Wesley’s eschatology and sanctification. It begins with the recognition that eschatology is at the heart of Wesley’s doctrine of entire sanctification or Christian perfection. Although he did not systematically develop his eschatology, John Wesley dealt with the eschatological themes such as death, resurrection, final judgement, and the kingdom of heaven and hell. His eschatological thought was much influenced through German pietist Johann Abrecht Bengel’s works, “Gnomon Novi Testamenti” and “Erklärte Offenbarung.” However, John Wesley declared that he had no opinion about Bengel’s chronological speculations on the Christ’s millennial kingdom, which would begin in 1836. In fact, John Wesley showed so little sympathy and had so little patience with eschatological fervor, which was generated among his Methodists. He tended to identify it with enthusiasm. The reason was that these eschatological enthusiasts stimulated opposition to entire sanctification or Christian perfection. Wesley’s concern for protecting and promulgating this doctrine of perfection may provide a key for understanding his reservations about eschatological fervor. John Wesley insists that it is possible in this life to be brought to entire sanctification and Christian perfection, which is equivalent to a perfection of love for God and neighbor. This doctrine is distinctive from notions of sanctification in other Christian traditions in that it expects the finite equivalent of eschatological fulfillment (i.e. entire sanctification or Christian perfection) as something which can happen in history rather than beyond it. By differing with those who taught that Christian perfection occurs only after death, at the point of death and by holding out for the possibilities of divine grace to perfect us in love in this life, John Wesley was making room for an eschatological hope that could become more than a hope, but rather a gracious reality in the here and now. Moreover, John Wesley, as a sacramentalist, had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the sacrament of the Lord’ Supper, which is able to sustain the believers in growth and grace and to lead them through a lifetime of the pursuit of entire sanctification or Christian perfection. “Hymns on the Lord’s Supper” published under the names of both John and Charles Wesley show Wesley’s ‘already’ and ‘not yet’ eschatological thi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