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우산국이었던 울릉도가 512년 신라에 귀속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기술은 있으나 우산도에 관한 언급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일양국의 많은 자료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지리적으로 인접한 섬이며, 우산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다”라는 것을 기록을 통해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우산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종물은 주물의 처분에 따른다는 부종성의 원칙에 따라 우산도는 울릉도와 운명을 같이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울릉도가 이사부에 의하여 신라에 복속되었다면 우산도 또한 신라에 복속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두 섬이 별개라는 주장은 타당한 근거에 의한 주장이 아니다. 울릉도와 우산도가 신라에 복속되는 과정에서 신라의 영토 취득 형태는 정복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의 영토취득 방법 중 하나로 정당하다. 그러나 오늘의 국제법 상은 인정되는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현대 국제법 이전의 역사적 권원은 현대 국제법에 의하여 대체되지 않으면 현대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로 인한 신라의 영토취득은 역사적 권원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라의 영토취득이 현대 국제법에 의하여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권원의 대체가 필요하다. 여기에 관해서는 신라의 우산국의 복속 및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대한제국에 의해 순차적으로 승계되어 오던 중 1900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공포로 권원의 대체가 이루졌다고 본다. 이는 현대 국제법에 의해서도 독도를 우리 땅이라 주장할 정당한 근거이다. 따라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
신라왕조(BC57∼AD935)는 초기의 느린 발전과정을 극복하고 독특한 성벽을 축조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5세기 후반에 성립된 새로운 성곽축조의 기법은 이후 6세기 중엽에 낙동강 유역과 한강유역까지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보급되고, 7세기 후반에는 한반도의 서남부와 이어 북부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 남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신라의 산성들은 대략 5세기 후반 독특한 석축 기술에 의한 가장 견고한 구조의 석축성벽의 축조 이외에도, 독특한 양식의 치성, 성벽의 중간을 통과하도록 만든 배수구조, 뿐만 아니라 성문의 바닥 높이를 높이고 출입 차단시설을 이용해 방어력을 향상시킨 독특한 현문양식을 채택하였다. 이 글에서는 현문구조에 대한 중세의 문헌기록부터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 초기와 고려왕조의 현문과 현교 등의 자료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소급하여 고고학적 자료에 나타난 현문구조의 성문을 유형별로 구분하고, 그 분포양상을 살폈다. 신라의 석축 성벽과 함께 축조된 현문양식은 동일한 형식의 성문이 신라 영역의 전 지역에 걸쳐 선택적으로 채택되어 확산되었다. 그 시기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미 이웃 백제왕국의 변경에도 적용된 사례가 있다. 대략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이후에는 더욱 분포범위가 확대되어 병합된 지역의 일부에서는 종래의 성문이 현문양식으로 개축되어 사용된 사례들이 조사되었다. 신라에서 성립된 현문양식의 성문구조는 그 변형된 모습이 공간적으로 더욱 확대된 분포로 나타난다. 시간적으로는 신라왕조에 이어 다시 지속된 중세의 고려왕조로 이어졌다.
신라왕조의 석축 산성에서 조사된 성벽을 관통하는 배수장치에 대한 기왕의 연구를 보충하였다. 조사된 사례가 3개소에서 12개소 이상으로 증가된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를 반영하여 형식적 구분을 다시 하였다. 성곽에서의 배수장치로서의 수문은 교량형(橋梁形)과 암거형(暗渠形), 누조(漏槽)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글에서는 특히 성벽 통과형 암거형식을 다루고, 그 시설된 숫자에 따라 단구식(單口式)과 다구식(多口式)을 구분하였다. 다구식은 성내의 수위 변화에 대비하여 수위(水位)에 따른 배수가 가능하게 만든 것들이다. 종래 출수구(出水口) 외면의 형태에 따라 형태를 구분하였던 점을 고쳐서 입수구와 출수구를 잇는 수로의 횡단면 형태에 따라 오각형, 사다리꼴, 사각형에 추가하여 삼각형의 유형이 있음을 새로 추가하였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방형 단면의 것들이며, 이런 형태는 신라 하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나머지 형태는 신라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축조되었다. 이들 여러 형태 가운데 단면 사각형은 중세와 근세의 산성까지 가장 오랫동안 시설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tandard scale of measuring a block of Kyongju(慶州), the Capital of the Silla Dynasty(B.C.57~A.D.935). Through the study, it is clarified that 1). the block of Kyongju city is planned and divided by using the eight-Zhou-foot(周尺) as a standard scale, which is equivalent to the length of one-bo(보(步); 2). the distance between the center of the streets is around 100 bo and the width of the block is around 90 bo; 3). the distance between the streets is very near to the distance 167.054m of Jing-tian-zhi(井田制), which supports the use of Zhou-foot as a standard scale. As a result, it can be maintained that the city planning of Kyongju is related to that the Jing-tian-zhi of the Zhou Dynasty and the standard scale of measuring a block of Kyongju us executed by using the eight-Zhou-foot standard sc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