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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의 과제는 ‘독도를 지킨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특히 ‘제1차도일(납치)’ 사건과 ‘제2차도일’ 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독도 관련 연구 중에서 안용복 관련 연구는 단연 독보적으로 많다. 그러나 『숙종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그의 공적을 분석한 연구는 많으나 그의 신분과 생애, 구체적 활동 등을 분석한 연구는 드물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발굴된 사료와 새롭게 연구된 결과 등에 근거해서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였다. 안용복의 신분은 1693년의 납치 사건에서는 ‘외거노비’로, 1696년 도일사건에서는 ‘통정대부’로 되어 있으며, 부산 수영구의 수강사 등에서는 ‘순흥안씨’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안용복의 나이와 신분은 1693년 납치사건 당시 소지했던 호패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며, 그는 1658년생으로 당시 36세였고 1696년 에는 39세이며, 서울 거주 오충추의 ‘외거노비’이다. 안용복은 동래 부산 좌천1리에 사는 외거노비로 서울에 사는 주인과의 관련으로 울릉도로 출어를 나갔었고 울릉도로 도항한 선단에서는 나름 힘이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잠상대고(潛 商大賈)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안용복의 납치 사건은 한일 양국의 울릉도 를 둘러싼 분쟁인 「울릉도쟁계」의 실마리를 제공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696년의 2차도 일은 울릉도 · 독도 영유권과는 무관하다. 현시점에서 안용복이 일본 에도에 가서 막부 장군의 서계를 받았다는 정황은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돗토리번으로부터 모종의 문서를 받았을 수는 있다. 이제는 안용복과 관련된 일본의 왜곡 논리를 하나둘 밝혀내고 영웅화된 우리의 안용복상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는 일본의 안용복 상을 사료와 기록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일본의 거짓과 허구성에 대해 명확하게 그 논리를 역사적 사료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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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 후반에 발생했던 안용복의 피랍․도일사건이 갖는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데 있다. 안용복의 피랍․도일 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점을 살펴보고,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첫째, 안용복이 1693년 요나고의 오야가 소속 어부들에게 피랍되었다가 표류민 송환의 절차에 따라 귀국할 때 비변사에서 안용복이 진술한대로 서계를 수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1695년 막부의 질의에 대한 돗토리번의 답변이나 1696년 2차 도일 당시 작성된 일본측 조사기록 등을 통해서 미루어 안용복은 돗토리번의 家 老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모종의 문서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의 도일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재확인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진행된 울릉도수토정책으로 계승되었다. 안용복의 도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현재까지 한국이 동해의 해양주권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정부는 적극적인 교섭 을 통해 막부의 일본인에 대한 ‘竹島渡海禁止令’을 끌어냈고, 울릉도 해역을 포함한 조선정부의 도서정책의 변화를 끌어냈다. 조선정부는 ‘울릉도쟁계’교섭 과정 중이던 1694년 9월 張漢相을 삼척첨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조사하게 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시 중단되었던 울릉도 搜討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99년부터는 邊將의 정기적인 수토를 제도화하였다. 세째, 안용복이 쓰시마번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일본에 간 것은 대조선통교권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로 하여금 조선이 일본 幕府 등과 직접 통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쓰시마번의 儒者로 대조선교섭 전문가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언급한대로, 안용복의 도일로 시작된 ‘울릉도쟁계’는 조일간의 외교교섭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안용복의 도일로 촉발된 울릉도쟁계 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조일관계가 비정상적인 외교적 관행이 고착되어 있던 상황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면서 처리된 사건으로 조일외교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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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안용복의 2차도일의 성과와 일본정부의 안용복 업적을 폄훼에 대해 논증하였다. 안용복은 2번에 걸쳐 도일하여 호키주태수에 고발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 토임을 확답받았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정부는 안용복은 관직을 사칭하고 월경한 범법자이고, 조선국의 대표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조정에서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받았다고 하는 안용복의 진술은 신뢰할 수 없다고 폄하했다. 또한 도해금지령은 울릉도에 국한된 것으로 독도에 대한 도해금지령은 내리지 않았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사실은 안용복의 1차도일은 일본어부들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조선과 막부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 를 둘러싼 영유협상을 하도록 했고, 최종적으로 막부가 돗토리번에 소속을 확인한 후 일본어부들의 도항을 금지시키고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였다. 2차도일은 1696년 1월 막부가 조선영토임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루고 있는 대마도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조선정부에 알리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안용복은 1차도일로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받았고, 2차도일로는 대마도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역할하였음을 논증하였다.
        4.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숙종 임금과 영의정 남구만 등 조선정부 관리들은 국방정책과 변방관리에 특별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까지의 논문은 1696년 안용복의 2차 도일에 대해 안용복 개인의 주도적 기획에 따라 실행에 옮긴 것으로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리고 안용복의 2차 도일과 관련하여 『숙종실록』 1694~1697년의 기록을 비롯하여 에도시대 일본 고문서인 『원록9 병자년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와 『죽도기사』 등에서 안용복과 함께 뇌헌 일행 5명을 포함 모두 11명이 도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안용복과 동행했던 순천승(여수 흥국사) 뇌헌 일행은 전라좌수영 소속 의승수군이었으므로 이는 조선 정부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아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도일을 도모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정규군인 관군이나 전라좌수영 수군이 아닌 승려 신분인 의승수군을 파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첫째, 정규군을 파견함으로 써야기될 수 있는 일본과의 군사·외교적인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뇌헌 등 5인의 흥국사 소속 의승수군들은 안용복, 이인성 등 민간인 소송단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호송하는데 적임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군사·외교적인 분쟁을 피할 수도 있는 조선 정부의 절묘한 선택이었다. 셋째, 이들 일행은 일본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자산도(독도)가 조선의 영유임을 확인받기 위한 소송 목적도 있었지만, 일본 국내 상황에 대한 정찰 또는 정탐 목적도 있었다. 1696년 안용복과 함께 도일한 금오승장 뇌헌을 포함한 5명의 승려들은 ‘떠돌이 장사승’이 아닌 전라좌수영 산하 정규군인 의승장과 의승 수군이었다. 결론적으로, 안용복과 뇌헌 일행은 《울릉도·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한 민·관 합동 TF팀》을 구성하여 조선정부의 특별한 임무에 따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도일 한 것이다.
        5.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7세기 말, 안용복이 일본으로 납치된 사건과 그가 재도일하는 사건에서 나타난 성과가 오늘날 우리 영토로서의 울릉도와 독도를 각인시키는 데 기여한 사실을 역사적 관점과 문학적 관점으로 나눠 분석하였다. 안용복이라는 평민이 벌인 대담한 행적 이 지배층의 무관심 속 방치된 울릉도, 독도를 우리의 국토로 각성하게 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살펴보았다. 아울러 어촌의 능로군, 어부로 각인된 그가 남긴 자취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발견한 몇몇 조선 사대부들의 인식이 그러한 안용복의 행적과 의의를 뒷받침해 주고 있음을 밝혀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부여한 영웅호걸이란 명칭과 달리 안용복의 활약상이 민간전승으로 전해지지 않는 이유를 조선의 수토정책과 연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근대 이후 안용복의 본격적인 재발견과 그가 이룬 쾌거를 유포하는 일이 확산되었다는 사실과 그를 영웅으로 소환하려는 바탕에 구전적 상상력이 작동하였다는 사실을 문학적 관점에서 그 의의를 밝혀보았다.
        6.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는 지금 그대로 있는 것처럼 그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던 돌섬이다.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도 있는 그 섬이 장소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섬이다. 독도에 대한 서사, 즉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독도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인물을 형상화하기에는 너무 소재 중심적이지 않은가 하는 회의가 든다. 반면에 문학적 형상화가 잘 드러난 소설의 경우, 독도를 지킨 역사적 인물 안용복에 대해서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개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 사회적 상상력을 펼치기가 용이하다. 한 민족이나 한 나라의 이상적 인간상은 역사적 전통 속에서 다듬어져 내려온 인간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상품처럼 필요에 의해 단시일 내에 만들어지거나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정체성으로는 대치되거나 수입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학에서의 실제성은 과거와 현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은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차용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과거의 사실을 기반으로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작가의 역사적 해석이자 미학적 창작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이 반드시 역사적 기록과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문학은 역사적 사료를 넘어 작가들의 직관력과 상상력으로 사실 이상의 진실을 찾아낼 수가 있다. 작가의 해석이 개인의 독단적 편견이 아닌 동시대인의 관점을 반영할 때, 그때의 문학은 다시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적어도 막연한 바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이 노력을 담는 그릇이 될 때, 문학적 이야기가 또다른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문학작품에 나타난 독도와 안용복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독도는 실존 공간이다. 실존 공간은 하나의 문화 집단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문화와 구성원들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일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우리 문화를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일인 것이다.
        7.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696년 안용복이 권력자의 밀명을 띠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일했다는 ‘안용복 밀사’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안용복 밀사’설은 남구만이 안용복을 밀사로 보냈다는 설(①)과 남구만과 윤지완이 공조하여 보냈다는 설(②)로 나뉜다. ①의 주요 논지는 조선 정부가 쓰시마번이 아닌 다른 노선을 통해 외교노선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 안용복을 보내 돗토리번에 쓰시마번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으나, 쓰시마번 의 방해로 결국 막부에 보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안용복의 도일 목적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형태로 쓰시마번의 비리를 고발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②의 주요 논지는 당시 정파 간의 인식 차이가 커서 공식 사행을 파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정쟁을 피하면서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파 간 인식 차이가 무엇인지, 밀사 파견의 배경은 무엇인지, 파견을 계획한 시기는 언제 인지, 안용복이 칭한 관직이 밀사로서 적합한지, 안용복과 그 일행의 신분은 임무 수행에 적합한지, 국왕인 숙종은 어떻게 관련 있는지, 일본 측은 밀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 불분명하다. 조선은 밀사를 파견하지 않고도 직접 사신을 보내 쓰시마번의 행태를 막부에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자격이 의심스런 안용복을 보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이 ‘안용복 밀사’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안용복 밀사’설은 사료 인용에 있어서도 개인 문집이나 2차 문헌을 이용했고, 구절의 일부를 뽑아 무리하게 밀사설과 엮은 측면이 있다.
        8.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안용복이 독도교육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에 제작된 안용복의 행적에 관한 자료들이 학술적 엄밀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채 제각각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최신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및 도일 경로를 재구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 첫째, 안용복의 행적에 관한 날짜는 음력이었음에도 양력인 것처럼 인식되었는데, 음력과 양력을 병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안용복의 행적에 관한 용어는 ‘1693년의 울릉도 도해 및 피랍사건’과 ‘1696년의 울릉도 도해 및 도일사건’으로 구분하였다. 셋째,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와 관련된 연구 및 영토교육 시에는 당시의 항해 조건을 고려하여 동해상의 연중 기상 현상과 연계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넷째, 안용복의 피랍사건은 조선 조정의 수토제 시행의 동력이 되었던바,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및 피랍/도일 사건은 중앙의 수토제와 관련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1696년에는 뇌헌이 승려들과 배를 동원하여 순천에서 출발했던 것을 근거로 출발지를 순천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
        9.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安龍福의 존재와 행적은 독도영유권 논쟁의 핵심이다. 안용복은 당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영토를 지킨 인물로 기억되면서 그의 행적이 재현되었다. 민족적 이미지와 결합하 면서 역사적 인물로 재현된 것은 그가 민족의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겼 기 때문이다. 안용복이 1920년대 『逸士遺事』를 통해 민족적 인물로 거듭나면서 호걸의 칭호를 얻은 것은 영토문제와 외교권을 회복시켜 줄 인물을 염원한 시대의 희망과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동광』을 통해 쾌걸로 거듭나면서 올바른 일·통쾌한 일을 한 호걸로 이미지화 되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통쾌한 일을 그를 통해 염원했던 것이다. 안용복은 1930년대 해상의 쾌인용사로 이미지화 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의 인물로 그려졌다. 1940년대에는 늠름한 기상을 지닌 무사로 거듭났지만, 파쇼체제에 맞서기 어려운 조선의 현실과도 같은 무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의 동상건립을 통해 장쾌한 의협을 이어가려는 점에서는 희망이 보였다. 안용복의 다양한 이미지하의 변화는 시대정신, 시대적 과제와 맥락을 함께 했고, 오늘날 안용복이 울릉도·독도와 연계되는 상식이 되게 하였다.
        10.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도 막부는 속종 때에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현재 일본측은 그 당시 조선의 땅임을 증명한 것은 울릉도만이라고 주 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학자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 었음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양측 주장의 괴리(乖離)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 이 당시에 활동을 했던 안용복(安龍福)에 관한 기록이다. 특히 2005년 일본의 시마네현에서 발견된 안용복의 진술문서는 일본 사람들이 마쓰시마(松島)라고 부르던 자산도(子山島)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이 문서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일본측에 남아있는 그에 관한 기록들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것도 아울러 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