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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Coastal eupseongs, which are mainly built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are essential materials in studying the history of Joseon period eupseong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nect the annexation of local districts with the relocation of local government office, so as to categorize the types of coastal-eupseongs and examine the background of their constructions and relocations. Coastal eupseongs are mainly divided into 'maintenance type' and 'Mergence type' according to the annexation of local districts, and maintenance type is broken down into fortress type and non-fortress type in accordance with the existence of old eupseongs(fortresses). Coastal eupseongs can also be categorized into 'application type' and 'relocation type' depending on whether ex-local government offices were reutilized or relocated. Maintenance type is 'fortress-application type'(Gimhae·Gosung·Old Ulsan-eupseong), 'non-fortress-application type'(New Ulsan-eupseong), 'fortress-relocation type'(Dongrae․Kijang․Geojegohyunseong․ Ulsan(Jwabyeongyoung)-eupseong), 'non-fortress-relocation type'(Sacheon․ Hadong·Jinhae-eupseong·Geojesadeongseong) are differentiated by type. Mergence type is divided into 'Merger of Villages after Castle Relocation Type(Changwon·Namhae·Gonyang-eupseong)', 'Merger of Villages before Castle Relacation Type(Ungcheon-eupseong)'. Coastal-eupseongs are moved to other places in need of more affluent water supply(Gimhae·Gijang-eupseong) and wider usable area(Namhae·Gohyunseong-eupseong). Eupseongs were enlarged owing to the population growth, caused by annexations of local districts.(Ungcheon-eupseong) 'Seonso'(navy yard) is a unique feature which cannot be seen in inland eupseongs.
        4,900원
        2.
        2012.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주 지역의 약 40개소 이상의 성보(城堡)들의 존재 양상을 분석 정리하여 축성 계획의 연속적 발전과정을 추구하였다. 소규모의 목책과 토축의 성보가 축조되는 단계에 백제왕국의 영역 내로 편입되어졌다고 여겨진다. 가장 많은 수의 성보들은 분포양상과 유물들에 의한 편년으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삼국이 마주치던 국경지역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고, 10세기 초에는 후삼국의 분열시기가 되면서 수축되어 다시 사용된 국경지역의 양상을 보인다. 안정된 지역 중심지로서의 성곽도시의 첫 단계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의 석축 산성 축조에서 시작되고, 평지나 낮은 구릉을 이용한 읍성 성격의 토축 도시성곽과 도시 배후의 산성을 동시에 가지는 성곽도시는 통일신라 지배시기와 관련된다. 문헌상의 서원소경이 서원경으로 승격되는 시기에 변화가 시작되어 고대적인 성곽도시의 최종형태는 10세기 고려왕조 초기에 나성을 가진 도시로 변화하였다. 이후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관할구역 내의 가장 험준한 곳에 대규모의 입보농성을 위한 피난용 산성이 추가되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읍성이 석축으로 개축되어 행정 중심도시가 되었다. 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전반의 호란을 겪은 뒤인 17세기 후반에 지역 육군을 총괄하는 병영이 읍성에 자리하면서, 그 배후의 토축 옛 산성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상당산성을 경영하였다. 이 읍성 내지 영성(營城)과 산성이 하나의 짝을 이루는 형식의 성곽도시가 최종 형식이었다.
        8,400원
        3.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10,100원
        4.
        2010.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한국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倭가 개입하여 축조한 성을 말하며, 그 축조 배경에는 일본군의 남해안 거점 확보가 주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행좌소와 보급기지 역할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 왜성은 1592년에 가덕, 웅천, 영등성을 시작으로 1593년에는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골포, 거제도 등지에도 축조되었다. 이러한 왜성은 현재 남해안 일대에서 이미 확인된 것만 해도 30여 개소에 달하며, 내륙 곳곳에서도 유구는 자세하지 않으나 왜성의 기울기와 축조수법을 가진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김해, 울산, 구포, 순천, 사천 등지에서 간헐적인 고고학적 조사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최근 한일 양국에서 왜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조사 예가 늘고 있다. 왜성이 토목이나 건축사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성곽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 의하여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왜성에 대한 전기한 기존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본인이 직접 현지답사에서 얻은 자료를 집성, 분석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축조기술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일본성곽요소와 우리나라 성곽요소가 혼합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석성의 발전과정은 사원계 석원의 성립→安土城→舊 大坂城→ 남해안 倭城→肥前 名護屋城→근세 석성→江戶期 개수성 등의 순서인데 그 중간에 왜성이 위치하고 있다. 둘째, 왜성 입지는 강이나 바다의 돌출한 곶에 위치하고 본곽, 2곽, 3곽으로 둘러져있고 그 형태는 연곽식, 별곽식, 제곽식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왜성에 사용된 성석은 자연석, 절단면석, 다듬돌, 장식석 등으로 구분되며, 그 변천과정은 자연석→절단면석→다듬돌→화장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말기에 보수된 성에서는 이들 3단계가 혼용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 근세성에서도 장식석까지 혼용되고 있다. 성석 가운데는 성문 입구에 게시용으로 배치한 방문석을 일본 근세성에서는 立石, 裝飾石, 記念石, 鏡石 등으로 명칭하고 있으나 그 시작은 왜성에서부터 이며 조선읍성의 방문석이 그 시원이었다. 넷째, 초기 왜성은 축조 기법상으로 우각부는 축성집단에 따라 기울기를 63°, 60°를 기준으로 하는 곳과 50°이상을 전후한 기울기를 기준으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에는 70°, 80°에 가깝게 급한 기울기를 갖는가 하면 성고를 높이기 위해 협축 성벽을 구사하면서 전기한 2가지 기울기를 겸용한 분절형 성벽이 나타나며 전쟁 말기에는 곡선 성벽도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 왜성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알수가 있다. 다섯째, 성곽의 구조적 측면으로 보면 왜성에서 시작된 치성, 적대, 등성로, 해자, 고식 고려문 등이 일본 근세 석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하는 왜성은 기본적으로 일본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축성기술 요소가 혼합되어 발생기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가, 수축기에는 점차 한국적인 요소가 증대되고 발전기에는 왜성 축조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근세 석성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기울기의 변천, 경석의 배치, 성석의 채택, 천공에 의한 절단방법, 성곽석과 채움석 쌓기수법, 협축과 분절형 성벽, 치와 적대, 해자, 고려문 설치 등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적으로 축조된 산성, 읍성, 진보루 등 관방성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술 중 일부임을 감안할 때 일본 근세성은 물론 우리나라 석성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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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paejang system of the castle constructions in the late period of Chosun dynasty. Moreover, this study aimed to examine effects and influences of its constructional productivity. The results are as follow ; 1. Paejang was originally a sort of military positions. Thereafter it had been adopted to the various fields like soonrapaes. Pae, which was a regular working unit organized with 30~50 laborers, took charge of the works allocated with its own chargeable section. 2.The first adoption of paejang system was found at the construction of Ganghwa-oyseong in 1690. Since the period of King Yeongjo and Jeongjo, it was generally used as a working system. 3. Yoo Hyeongwon had early suggested that this system should be adopted as a reformative system because it had a perfect command system like Soko-je, the provincial military system. 4.At the constructions of Dongnae-upseong, Jeonjoo-upseong and Daegoo-upseong in the period of King Yeongjo, paes were organized to 40~60units, and worked in the fields of masonry, carriage and picking of stones. 5.At the construction of Soowon-seong in the period of King Jeongjo, a large number of various paejangs participated in all of working fields. Especially masonry-paes were usually organized with over 100 units. 6.It was estimated that paejang system surely could guarantee saving labors and term of works. Moreover, it was a basis for the further development form of dogup-je, a contracted work system. 7. Paejang system was applied in the constructions of Buddhist temples since the middle period of 1700s and later, it was widely used in the constructions of palaces.
        5,700원
        7.
        199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From the early 1980's, when Chinese government decided to take an Open-Policy. Chinese society faced a new turning point to be changed from traditional-society to modern-society. As a result her outstanding phenomena of civilization is to be seen in many points, like the oid styled traditional street is rapidly replaced by the modernized high-rise buildings. Like the other cities in China, Beijing(北京) also is on the step of modernization, and it's changing speed is faster time by time. In this paper, I'll discuss about Beijing's policy of reservation of Old castles(古城), some problems what they have though the procedure of China's Movement of Old Castle Reservation(古城保護運動). And through this case study, I'd like to focus on the way how we solve some problems what we have now concerning to the reservation and development of traditional cities.
        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