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Alex Schuessler (2009, 34–39) has articulated, it is difficult to know the real reason for the choice of a particular graphic element within a composite graph. This is often due to “mental or cultural associations” that tend to interfere with the choice. Even with a simple graph it is not easy to discern what we call “graphic design” that must have guided the original scribes to create the graphs to express words. These are important issues in Chinese paleography. We will use terms like “pure phonetic”, “quasi-phonetic”, “quasi-phonosignific”, “etymonic”, “quasi-etymonic” that are not commonly used in the literature (we will define them in the paper). The Old Chinese (OC) rimes comprised of a relatively few words such as *-əp, *-en, and *-ui suffer a shortage of graphs to write the words with such rimes. This implies the existence of graphs with only a segment or segments of an OC syllable that suggest its entire phonological form with a meaning or function. For example, the top portion of (=羊 *jaŋ~*laŋ, i.e., ) seems to serve as quasi-phonosignific in (=羌 *khaŋ~*khiaŋ—cf. 西戎, 牧羊人也, 羊亦聲—SW). That is, 羌 were “sheep herders”, and the grapheme can be taken as partial phonetic, not really “亦聲” it would seem, because only the rime of 羊 agrees (“quasi-phonetic”). When we pay attention not only to the rimes but also to the initials, we may, if cogent analysis can be made, come to understand why a word was written in a certain specific way. This interfaces between paleography and historical phonology, further involving historical lexicology. We shall also assess some traditional paleographical interpretations of nǚ 女= ‘woman’ and mín 民= ‘people’ and try to descry “graphic designs” by the original scribes. Here, however, we first need to figure out the underlying meanings of the words nǚ and mín in their early history. Their semantic fields could range from synonymy, near/quasi-synonymy, antonyms, and near/quasi-antonyms to members of some large word-family. In this paper, we limit our analysis to some “graphic minimal pairs” and the words represented by them. For example, “ (女 ‘woman’) and (卩 ‘joint’)”; “ (如 ‘follow, go’) and (訊 ‘interrogate’)”; “ (目 ‘eye’) and (臣 ‘servant’)”; “ (民 ‘people’) and (見 ‘see’)”; and a few related graphs.
Yang Shen (1488-1559) was born in Si Chuan Xin Dou. 《Ming Shi》 said that Yang Shen is the most famous for the extensive memorization and abundant writings. Yang Shen also contributed to the philology researches. According to Wang Wen Cai’s 《Yang Shen Xue Pu》, Yang Shen had many kinds of writings, such as 《Shuo Wen Xian Xun》, 《Liu Shu Lian Zheng》, 《Liu Shu Bo Zheng》 etc., but most of them are disappeared. 《Liu Shu Suo Yin》was thought that it’s disappeared, it can be found in the library of RENMIN UNIVERSITY of CHINA. It was included in 《Si Ku Quan Shu Cun Mu Cong Shu》. From Yang Shen’s 《Liu Shu Suo Yin-Introduction》, we knows that Yang Shen was based on abundant philology researches to appear his research system. Yang Shen had different academic judgements for each text researchers’s theories to appear Yang Shen’s conceptions of “Zhuan Zhu Gu Yin”. 《Qin Ding Si Ku Quan Shu Zong Mu》 was based on the the text textual content to comment Yang Shen’s 《Liu Shu Suo Yin》 negative. We can discuss the comment is appropriate or not? 《Liu Shu Suo Yin》 is distinguished into rhyme, so it had its own system. These researches are related to Yang Shen’s other research works in Xiao Xue. In philology researches, we can investigate Yang Shen’s contribution to philology researches with 《Liu Shu Suo Yin》 to clarify and analyze.
A Ming Dynasty Book, YuTang LiZheng ZiYi YunLv HaiPianXinJing (玉堂釐正字義韻律海篇心鏡, Vol. 20s), is collected in National Library of Korea. The author Zhu ZhiFan (朱之蕃, 1548-1624) is a minister of the Ming Dynasty, also a famous calligraphist. In 1606, he has been to Korea, left lots of influent poetry and calligraphy works. According to the preliminary investigation, this book is re-adjusted and re-edited, basing on HanLin ChongKao ZiYi YunLv DaBan HaiPianXinJing (翰林重考字義韻律大板海篇心鏡, Vol. 20s) which was rescheduled by Liu KongDang (劉孔當) in 1596.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ly, we introduced content and collection situation of YuTang LiZheng ZiYi YunLv HaiPianXinJing (Korean version), which has not been formally introduced to the academic community; Secondly, we described the structure, the preparation of the whole story and author of this book; Thirdly, we compared this book with various HaiPian, expecially to find the origi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Finally, we concluded its influence on Korean academic and literary circles in the later 17th century.
언어와 문자는 언제 생겼는가?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 언어학자들은 “語先文後(말이 먼저 있는 후 글이 다음에 있었다)” 론을 꾸며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 조차도 서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언어학은 과학적 학문이다. 과학은 이야기 하는 것에 근거가 있어야지 허투루 단정을 할 수 없다. 만약 그 근거가 없다면, 단지 가설이라고 부를 뿐이다. 가설 또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없다. 논리의 증명에 순서가 있어야지 논리적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릇 논리에 맞지 않으면, 또한 역사 발전의 추론 중에서도 그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언어학자는 왕왕 비평가를 반박할 권리를 가지고서, 그들이 언어학의 ABC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그들의 비평을 억압한다. 언어학의 ABC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역사, 규율과 기본개념이다. 본고는 “语先文后”의 쟁론 가운데 깨달은 언어학중의 ABC, 즉 기호와 부호 두 가지의 개념을 이용하여 발전한 역사적 발전 속에서 언어와 문자 발전의 이치를 탐구하였다. 이 기호와 부호라는 두 가지 개념의 분석 중 이 두개의 개념이 뒤섞이게 된 원 인을 찾아내고, 동시에 언어학에서 찾아낸 부호 체계, 기호 체계, 문언, 문장 등의 기본 개념에 대해 진지한 구분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1792년 정조는『奎章全韻』을 편찬한 후 각신 및 초계문신, 검서관을 포함한 9명의 신하들에게 문자에 관한 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文字策文 9편이 제출되었으며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글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윤행임, 서영보의 대책이다. 문자책문의 집필배경이 된『규장전운』의 편집 방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음과 조선음을 구별하여 각각의 규범음을 밝히는 것, 둘째, 俗音을 제거하고 압운 체계를 개정해 전아한 문사 창작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 셋째, 古音의 확정을 통해 古經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6편의 문자책문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문제의식들은 위 세 가지 목적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상이한 견해들이 이 시기 문자학의 논점들을 형성하고 있다.첫 번째 논점은 글자와 소리 혹은 말의 관계 문제이다. 박제가는 문자에서 聲의 요소가 중요함을 일관되게 서술하였으나 중국어 사용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행임은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하여 중화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천하만국에 각자의 글자가 있다는 논의를 통해 기존의 華夷觀을 뛰어넘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논점은 문자학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이서구는 이 시기 六經의 이해를 위해 문자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실제적인 名物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에 문자학의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 논점은 字形의 변천과 異體字 문제이다. 유득공과 이서구, 이덕무는 모두 俗字, 訛字, 조선식 한자 등의 사용을 일절 금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는 시대에 따른 자형의 변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였는데, 이와 달리 서영보는 자형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인지 서영보는 이체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국가 문서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하였다.이상에서 분석한 문제의식들은 18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문자학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논점들이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는지,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문자책문을 작성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파나 가문, 당파 등에 따라 언어문자관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