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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LÜ Zu-Qian, ZHEN De-Xiu, and JIN Lü-Xiang are all renowned Neo-Confucianists during the Song Dynasty. Their viewpoint on literature was built on Confucianism’s Tao and they considered sentences from Liu Jing canon for their sentence structuring. Yet there are differences in compilations they made regarding selection of literatures and writers based on their selection criteria. LÜ Zu-Qian’s Song Wen Jian contained various works and writing styles, adhering to the emperor’s order to select sentences that would do good for politics. However, his compilation is criticized for lack of coherence. His another compilation Gu Wen Guan Jian mainly consists of sentences of archaic prose writers, holding true to its purpose of guide to sentence structuring. Taken together, overarching characteristics of LÜ’s compilations are purpose of guide to sentence building. ZHEN De-Xiu viewed sentence as part of academic pursuit, and argued that literature should identify sages’ findings and teachings. And it should be practically useful for the country, not merely a talk for talking’s sake. Holding true to such belief, ZHEN compiled Wen Zhang Zheng Zong by dividing the compilation into four sections: CiMing (purpose), YiLun (exchange of opinion), XuShi (launch work) and ShiFu (verse and prose) in a bid to teach readers for what the right kind of literature works is. This book, albeit stronger philosophical thought of Neo-Confucianism of the Song Dynasty compared to LÜ’s compilations, is mainly intended as a guide to creation of literature. JIN Lü-Xiang’s Lian Luo Feng Ya, the first compilation of poems written by Neo-Confucianists of the Song Dynasty contains the Lian Luo School’s poems and proses to identify the school’s origin and scholastic mantles. JIN put his painting Lian Luo Feng Ya Tu on the first page to demonstrate his academic tradition as a successor of Zhu Xi, and arranged literature works in the order of this. It has an implication as the first compilation of the Song's Neo-Confucianists’ poems that abstracted poems created by figures of the Lian Luo School and reestablished line of the Lian Luo School, a big move from traditional framework of compilation for traditional literatures.
        5,100원
        2.
        2000.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900원
        3.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저명한 학자이 다. 김우옹의 학문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 주자와 김우옹의 정치론과 학문론을 비교해 본 결과, 이 두 학자의 영향 관계 는 매우 직접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론을 살펴보면, 군주론에서는 군 주의 정치적 역량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였고, 신권론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서 신하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으며, 붕당론에서는 군자와 소인 을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외세론에서는 시종일관 외세배격의 논리를 지녔다. 그리고 학문론에서는 주자학의 공통된 이념인 ‘性卽理’를 공유하였고, 敬과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격적 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면모 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명학을 두고 주자학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우옹의 삶 과 사상을 살펴본 결과 김우옹을 위시한 남명학파는 철저히 주자학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5.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자학은 天人合一이라는 우주인간론적 비전을 골격으로 한다. 이 테제는 근대적 심성에는 매우 비의적이고 난해하다. 이 사고는 인간의 본성을 우주적 전체속에서 읽으며, 이는 인간을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는 다른 지평에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주자학은 우리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본성을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은 유전적 편향과 후천적 습관때문에 자각되지 않고,덮여있다" 주자학은 이 덮여지고 때묻은 본성을 지속적 자각을 통하여 벗기고 씻기는 것을 공부와 훈련의 과제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사적 자아는 공적 자아로 변환되며,자아와 타자를 분리하고 있던 장벽이 사라지면서 언간은 타물과의 우주적 소통을 확보한다. 그것을 전통적으로 철학적으로는 物我-如라는 통일로, 또는 문학적으로는 J홈 飛魚뿔이라는 자연 생명의 약동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동시에 유가적 가치의 중심인 仁훌禮智가 발현되는 體用의 기제이기도 하다. 퇴계는 이런 본체와 공부의 전 과정을 그림 열 폭에 정돈했다. 이 논문은 퇴계가 정리한 주자학적 본체론을 제 1『太極圖』와 제 2『西銘圖』률 중심으로 해설하고, 이어 그것의 회복을 위한 공부의 규모와 방법을 제 3『小學圖』와 제 4『大學圖』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중심 에 지속적 자각의 파지로 번역될 수 있는 敬이었다.
        6.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유학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논어가 백제로부터 전래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한다. 중세에는 고잔(五山) 승려에 의해 접해졌고, 근세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유학에 대해 근세 유학연구의 선봉적인 역할을 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씨는 주자학이 근세 일본의 幕藩制 유지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주자학의 자연법적인 사상이 근세 봉건사회에 부합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론은 여러 관점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유력한 비판자의 한 사람인 비토 마사히데(尾藤正英)씨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와의 부적합성을 들어 유교가 일본사회에 지식으로 수용된 것 일뿐 생활차원에서의 수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씨는 에도시대(1603-1867)전기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주자학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주자학은 당시 일본 국내의 有利한 사정을 바탕으로 점차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違和感을 주는 외래사상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상, 전후 한때 통설로 되어왔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의 일본 근세사회의 부합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자학 부적응설로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자학의 부적응설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은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면서 현대에까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근세에는 다양한 층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일본적 사상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하 본 논문에서 필자는 주자학의 일본수용설의 관점에서 그 영향관계를 주자학에서 古學陽明學國學水戶學 등과 관련지어 고찰하고자 한다. 또 한국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한다.
        7.
        2000.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388年に威化島回軍という事件が起こった. この時期こそが儒學的意味での革命の時期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 當時, 新しい政治勢力として浮上した儒學者官僚たちが想定していたのは革命ならぬ中興であった. ところが, 中興論をもって高麗王朝を立て直そうとした試みは難關に直面し, 槪ね1390年後半から1391年初頭にかけて, 中興から革命への戰略的な轉換が試みられた. そして, ここから中興對革命という對決構圖が出來上がり朝鮮建國までの1年餘りにわたる命縣けの鬪爭が繰り廣げられた. このような當時の政局を踏まえて革命について否定に近い肯定をした朱子の革命論を檢討し, さらに, 鄭道傳の革命についての思惑と行動を考察した. 1392年の鄭夢周の死は, 回軍以降展開してきた鬪爭の決着と同時に高麗の滅亡, そして朝鮮の建國を意味した. 朝鮮建國といえば, 通常最初にその名が擧げられるのは鄭道傳である. しかし鄭道傳は現にあった朝鮮建國という事件の主導者ではなかった. その事件は彼の手を離れて, 彼の意圖とは全く違う方向に展開された. それは簒奪による王朝交替であった. そのような王朝交替に向けての下準備が行われたあとに, 鄭道傳は中央政界に召還された.もし純粹な朱子學者だったならば隱遁すべきであったろう. しかし鄭道傳は出仕した. 自分の出仕は不義への投降ではなく, むしろ不義を正すためだという鄭道傳の辨を糾明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