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도산선생탄신 138주년 기념을 위해 모인 도산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도산선생의 미주 활동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여기 계신 도산학자들과 더불어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도산선 생의 미주활동에 대해서 집필한 많은 논문과 서적이 발간 되어있어 역사학자가 아닌 내가 더 보탤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나는 작가로서 제일 궁금한 점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즉, 그 당시 도산선생과 동료들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원고를 준비했다. 나는 항상 매크로적인 시점에서 매사를 보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서 우선 도산선생의 활동 범위를 파악하기 위해 도산선생의 자취를 구글지도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역사사진은 당대를 해명하고 진실을 찾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료이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시대에 사진은 우리 주변 가까이에 늘 존재하고 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진의 존재는 여전히 드물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대 직업적인 신문기자나 혹은 사진 관련 전문인들이 아니면 사진기를 소장하 기는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이 역사의 기록이 된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이도 많지 않았다. 더욱이 비밀리에 모이고 운동 해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이나 항일운동 단체에서 기념으로 남긴 사진이 적에게 들어가 증거물이 되게 되면 그 사진이 근거가 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당할 수도 있어 공식적인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을 꺼리기도 하였다. 그 점에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미국문화에 익숙했던 도산은 사진의 중요성과 그 역사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도산은 북미 최초의 결사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북미 한인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공립협회와 대한신민회 등을 결성하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 활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기록 사진을 남기었다. 도산에게서 사진은 함께 기념하고 소장해야 하는 친근한 매체이면서 역사적 기록을 남긴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 된 많은 사진 자료가 생산되고 전수될 수 있었다고 본다. 많은 사진 기록들이 소실되었으나 현재까지 살아남은 자료들은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도산 안창호 탄신 138주년을 맞이하여 도산학회의 정기 학술회의에서는「도산 안창호와 사진 그리고 역사」라는 대주제 아래 도산의 활동을 크게 국내·중국·미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범주에서 남겨진 사진 자료를 통해 도산의 다양한 활동상을 보여줄 기회를 갖고 사진에서 보여주는 장면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고자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드신 애국시가 수십 편에 이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이 ‘애국창가’라는 장르의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중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또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근현대음악사 관련 문헌을 보더라도 안창호 선생이 지으신 애국시(愛國詩)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에도 ‘노래’라는 코너는 있지만 가사만 소개되었을 뿐이고, 도산기념관에서조차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보급 문화유산과도 같은 선생의 노래를 보존은 고사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잊혀진 노래가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제(日帝)는 선생뿐만 아니라 선생의 노래마저도 철저히 탄압을 하였다. 노래 부르는 것은 물론 금지를 시켰고 악보를 압수하여 불에 태워 버렸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선생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노래는 다른 사람이름으로, 또 몇몇 노래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없는 가운데 불리기는 했지만, 그 노래(가사)를 만든 사람이 도산 선생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 다. 다행히 최근 들어 여러 학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도산 선생의 작품 또는 도산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애국시’가 수십 편 발굴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詩)를 가사로 하여 만든 애국창가도 수십 편이나 발굴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914 년 중국 만주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광성중학교에서 발행한 『最 新唱歌集附樂典』과 하와이에서 1916년에 발행한『애국창가』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最新唱歌集附樂典』과 『애국창가』에 수록된 악보는, 거의 100년이 지났고 또 구전(口傳)된 것을 악보화하였기 때문에 가사와 음(音)의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며, 필기체로 흘려 쓴 것이 많고, 띄어쓰기가 없고, 악보 표기가 잘못되었거나 안 보이는 부분이 많은 등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곡을 만든 작곡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사에 곡을 붙인 오리지널 곡인지, 기존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인지, 한국 사람이 만든 곡인지, 서양 사람이 만든 곡인지, 일본 사람 만든 곡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도산 선생의 애국시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를 국민들에게 보급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악보를 가독성이 있는 현대 악보로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악보집으로 만들어 보급한다면, 음악회뿐만 아니라 교육용, 연구용 등 많은 용도로 활용이 될 것이고, 근대 관련 영화나 독립운동 관련 다큐멘터리의 배경음악을 만드는데도 활용이 될 것이다. 본고의 1차적 목적은 악보복원에 있다. 그리고 그 곡의 음악적 특징 및 음악사적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하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복원한 악보를 바탕으로 음악회 형식으로 재현해 보고자 한다.
이 발표의 대주제는 “애국창가운동과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은 애국창가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지도자였다. 도산이 애국창가를 작사했고, 각종 모임에서 애국창가 부르기를 권장했으며, 애국창가를 통해 “정의돈수(情誼敦修)” 즉 ‘서로 사랑하기’를 통한 단합을 이끌어냈다.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중요성, 단합을 통한 힘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도산의 리더십, 도산 리더십 하의 공동체 문화를 특징짓는 애국창가는 도산의 이상과 도산의 리더십의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도산의 비전과 목표, 도산 리더십의 특징과 연관하여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이 가지는 의미와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근대 이후의 애국창가운동에 대해서는 음악적 차원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신민회와 도산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애국창가운동에 대해서는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 본 논문은 많은 애국창가의 작사자로서 도산에 주목하고 그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신민회에 의해 전개된 애국 창가운동의 전개와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화된 조국에서 더 이상 불리지 못하고 국외 한인사회로 번져나간 애국창가운동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2016년 현재 시점에서 도산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기, 즉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들인 유길준, 서재필, 김구, 이승만, 신채호, 박은식, 이상재, 이승훈, 안창호 등에 대한 연구는 대체적으로 많이 이루어진 편인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도산 안창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우위를 점한다.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1969년에 이일천에 의해 시작되어 2016년 현재 박만규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기간인 47년 동안 이루어져 학위 논문이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수가 많은 편이다. 최근 연구자는 도산 안창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에게 가지게 된 물음(自問) 셋이 있다. 하나는 나는 도산과 흥사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둘은 나는 누구로부터 어떤 자료를 통해 도산과 흥사단에 대해 배우고 학습하였는가? 셋은 내가 배우고 학습한 도산과 흥사단의 참 모습 혹은 원형은 어떠한가? 연구자의 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에 대한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첫째, 2016년 현재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가 주로 어느 분야에서 이루어졌는가? 둘째.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는 있는가? 있으면 어느 분야 인가? 셋째,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사례 소개의 하나로 사회 교육 분야의 연구를 살펴보고, 새로운 연구 방법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도산 연구의 역사를 살펴 시대 구분을 하고, 시대 구분에 따른 시대별 연구 동향, 연구 주제어를 워드 클라우드 기법으로 분석하였다. 더불어 도산 연구 사례로 사회교육 관점에서의 선행연구를 살펴보고, 도산 연구의 과제를 탐색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인물들 가운데 유상규처럼 가깝게 묘사된 사람도 드물다. 유상규는 이광수에 따르면,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했고, 장리욱에 따르면,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분명 어버이로 모셨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이지만 또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갖는 유군의 그 세심한 정성은 훌륭한 ‘효자’ 바로 그것이었다”고 회고하 였다. 나아가 도산 스스로도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은 내가 평소에 아들같이 역이든 유상규 군 곁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이처럼 도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유상규는 어떤 인물일까? 이것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유상규의 생애와 활동보다는 도산과의 관계, 특히 독립운동과의 관련성을 추적해 본 것이다. 아시다시피 도산은 1878년생으로 1897년생인 유상규와는 나이 차이가 19세로 부자지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컸다. 유상규 또한 도산을 선생처럼 모시고 그의 ‘우정’을 배우고 따랐기 때문에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중국 상해와 국내에서 도산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그의 활동을 보필했기에 민족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여러 인연들이 보인다. 우선 지연(地緣)이다. 도산은 평남 강서출신이고 유상규는 평북 강계출신으로 서북출신 이라는 지연성을 가진다. 두번째는 신교(信敎)의 동질성이다. 도산과 유상규 모두 장로교도로 종교적 인연이 있다. 나아가 경신 학교 선후배 관계로 학연(學緣)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상규는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 단원이자 도산이 이끈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요원으로, 귀국 후에는 흥사단 국내지부와 같던 수양 동맹회와 수양동우회 그리고 동우회에서 활동한 도산사상의 공감 자요 실천자로 여겨진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는 유상규의 유족들이 편찬한 두 권의 책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출판부, 2007)와 『태허 유상규』(더북스, 2011)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필자는 그에 앞서 제2장을 통해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평안도 출신 의사들이 수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지 살펴볼 것이다. 도산 안창호가 일찍부터 평안도의 지도자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의 흥사단 단원 중에 평안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근현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평안도 출신의 엘리트층이 수적으로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였고, 질적인 측면에서도 그들의 업적과 영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던 점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료계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평안도 출신의 의학도나 의사들에게 도산은 민족의 지도자이자 스승으로 여겨졌을 것이기에 직간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에서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관ᆞ사립 의학 교육기관을 졸업한 사람들의 출신지역별 분포를 집계하여 평안도 출신의 비중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아울러 평안도 출신의 대표적인 의료인과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한 의료인의 면면을 파악해볼 것이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의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에서 많은 부분이 해명되었다. 이 논문은 이들 선행연구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도산 안창호의 선교사와의 관계를 좀 더 보완해 보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에서 발굴 이용한 자료 외에 특별히 다른 자료들을 찾지 못해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달성할 수 없었다. 도산 안창호는 1894년 선교사를 만남으로써 신교육을 받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1902년 9월 1차 도미할 때도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 밑에 들어가 교회 일하기를 거절하였고, 당시 선교사들의 내세지향적 신앙과 정교분리 정책에는 비판적이었다. 그의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1910년 4월 국외 망명 이후로는 1933년 9월 밀러가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를 면회하고 안혜련 여사에게 편지한 것 외에는 거의 자료가 없는 것 같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안창호가 기독교에 입교하고 제1차 도미하기 이전까지 시기와 1907년 2월 귀국하여 1910년 4월 다시 해외로 망명하기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선교사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 글은, 도산 선생의 노래를 발굴 및 정리하여 실제로 활용이 용이한 새로운 악보집과 음원으로 복원시켜 국민들에게 보급하자는 것을 제안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의 단초를 제공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산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도산 선생과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빛나 는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먼저 도산 선생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와 도산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 및 언급이 되는 곡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앞에서 언급한 세 편의 악보집에 수록된 곡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노래의 음악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곡자와 곡의 출처가 중요한데, 그것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겠다. 그와 함께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명백한 오기로 기보된 것은 수정하고 훼손된 부분은 복원시킨 새로운 악보를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제 연주를 해 보도록 하겠다.
이 글은 도산의 사사로운 개인 생활사에 관한 試論的 小考라 하겠다. 그동안 도산에 관한 연구는 상당하다. 유명한 연설가로,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민족의 스승으로 등 여러 분야와 여러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따라서 도산에 관해서는 더 이상 연구주제를 찾기 어려울 만큼 큰 진척을 보았다. 그러나 개인 도산 안창호의 사사로운 개인적 삶을 구명한 연구는 별반 없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점에 유념하여 도산 삶 가운데 상해에서 활동하던 기간 (1919-1921)으로 한정하여 그의 개인생활의 일단을 살펴보려 한다. 마침 이 시기 상해에서의 개인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기>와 <편지>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한국근현대사에서 도산 안창호(1878 – 1938)만큼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 동안 도산 안창호에 대 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도산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하여 『島山安昌浩全集』을 발간하였고, 역사학을 비롯하여 정치학·경제학·교육학·체육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제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앞으로 수행할 연구 과제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도산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 성과에 대한 점검은 별달리 없었다. 저서나 논문에서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 외에는, 이명화의 「도산 안창호 연구의 성과 와 과제」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통해 1980년대 이전에는 도산의 교육·사상·철학 등에 대한 연구가 많았고, 도산을 위대한 사상가·교육자·민족의 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이 주요 연구경향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독립운동과 관련한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도산은 일평생을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최전선에 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한 이래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을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래, 1932년 4월 일제경찰에 피체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수립 초기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직하면서,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갖추고,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기능하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산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도산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과 임시정부에 대해 서도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이 글은 도산의 독립운동,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한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의 연구 과제를 전망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방법은 간행되거나 발표 된 자료 및 논문을 조사 정리하여 연구의 성과를 점검하고, 이를 기초로 향후 추진할 연구과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해방 후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는 전기나 평전, 전집, 자료집, 논문집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전기는 1947년에 출판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가 판을 거듭하면서 오랫동안 가장 널리 읽혀지고 활용되었다. 그 후 1963년 주요한에 의하여 편찬된 안도산전서는 비교적 과학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생애와 사상, 그리고 일기와 연설문, 서간문, 회고록, 논문 등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망라한 저술로 초기의 도산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2000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하여 그때까지 수집된 거의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여 전질 14권으로 된 島山安昌浩全集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2005년에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도산학회에서 전질 22권의 미주국민회자료집을 편찬하여 도산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본 연구는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 중에서 도산의 교육사상 및 교육활동과 관련된 연구 성과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생각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 성과라고 하면 1차 자료의 발굴과 해석 및 창조적 재구성 결과를 의미한다. 교육과 관련된 도산 연구는 1차 자료와 기존의 연구물을 토대로 한 2차적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대학원의 학위논문과 학술지 혹은 학회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을 대상으로 분석하기로 했다. 따라서 잡지나 단행본의 일부로 실린 수필형식의 짧은 글은 제외하고 주(註)를 포함한 논문의 형식을 갖춘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물론 기러기를 비롯한 잡지류에 게재된 수필 형식의 짧은 글이라도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글은 다른 연구 논문과 중복될 가능성이 많아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도산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학문 영역별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논문의 주제에 ‘교육’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연구물을 원칙으로 하고, 주제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연구자가 교육학 전공자이며 그 내용이 교육에 관한 연구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포함시키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은 좁은 의미의 사상(철학)에 국한하지 않고 도산의 교육에 관한 생각과 주장 및 교육적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연구물은 그동안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문헌 목록과 최근 이명화 박사가 종합 정리한 자료목록, 국립 중앙도서관 및 국회 도서관의 자료 검색을 종합하여 작성하였으나 여전히 누락된 것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서 그리고 노동국총판으로서 도산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전개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 임시정부가 전개한 독립운동의 실상을 두 번의 시위운동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또한 시위 당시 작성·배포한 선언서 및 진정서에 대한 분석을 곁들여 시위를 추진한 의도와 의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내 독립운동 가운데 특히 시위운동에 주목한 까닭은 임시정부가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독립운동 방략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통해 임시정부가 수립 초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펼친 실상과 도산의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오해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