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독일통일과정에서 통일의 기폭제 역할을 해온 ‘베를 린 장벽’(Berliner Mauer) 붕괴의 역할을 분석하면서 이를 참고로 한반 도 통일의 함의를 도출하자는 데 있다. 이 분석은 베를린 장벽의 구축으 로부터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을 네 가지 외부적 행위요인(전승4국, 3+1체 제, 고르바초프, 2+4회담)과 세 가지 국내적 행위요인(베를린 장벽, 동서 독 주민, 샤보브스키)에 초점을 두고 이들 간의 상호관계적 측면에서 비 교분석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독일통일을 이룬 단초적 선례가 되는 만큼, 통일한국에서도 비무장지대(DMZ)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동시에 고찰한다. 즉 독일통일과정이 동서독 당국 간의 정상 회담이나 협상 차원만은 아니었듯이, 우리도 남북한 통일을 위해서는 베 를린 장벽 붕괴의 역할을 해낸 통일독일 사례처럼 DMZ 문제에 있어 이 를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전승4국에 의해 각각 4분할된 전범국 독일의 동서독 분단과 베를린 분할, 소련과 동독 당국에 의한 베를린 장벽의 구축, 그리 고 동독 주민들의 여행 자유 개방에 따른 베를린 장벽 해체 등을 통해 동 서독의 통일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방법으로는 전승4국과 양독2국 간 쟁점이 되어 온 베를린 장벽의 구축과 해체에 관하여 헤겔의 정(正, These)→반(反, Antithese)→합(合, Synthese) 변증법을 적용하였다. ⓛ 전승4국이 전전(戰前) 회담의 산물인 전범국 독일을 동서독 분단과 동서 베를린 분할을 해 놓은 국제질서하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미에서의 정 (正), ② 그중에서 소련과 동독 당국이 기존 국제질서를 깨고 공산주의 패 권을 유지하고자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의미에서의 반(反), 그리고 ③ 베 를린 장벽 해체가 의도되지는 않았지만 동독 주민들의 이주와 이탈을 넘 어서 동유럽의 민주화 일환으로 나타난 촛불시위, 동독 SED 대변인 샤보 브스키(G. Schabowski)의 기자회견에서의 ‘즉시, 지체 없이’ 국경개방 허 용 발언의 말실수 등이 ‘부정의 부정’으로 지양(止揚, Aufheben)되면서 베 를린 장벽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는 의미에서의 합(合)인 것이다. 요 컨대 미국과 소련 중심의 전승4국은 전범국 독일을 분할하여 패권이란 국 제질서를 지속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소련과 동독이 베를린 장벽 구축에 나서면서 그들만의 공산권 체제유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서독 여 행 자유와 국경개방 시위에 나선 동독 주민들의 자유화와 동독 당국의 개 방에 대한 모호한 태도 등이 중첩되면서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기에 이르 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의 해체는 독일 통일을 앞당기는 단초가 되었고, 정상적인 통일 독일로 자리매김한 것은 더이상 분단 독일이 지속될 수 없 다는 변증법적 논리를 깨우쳐준 사실이 아닌가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독일 통일에 있어 동서 베를린 분단의 종료,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에 영향을 끼친 인과관계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될 핵심 요소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동독과 서독의 분단→ 동베를린의 분단→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과 서독의 통일'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여하튼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동서독은 정상회담을 수차례 가져왔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는 날카로운 대립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정상회담이 진척된 것만 보아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독 통일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서독 주민들, 특히 동독주민들의 통일 여망은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셈이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분단 독일과 분할 베를린 영토에 펼쳐진 장막과 철조망을 뚫고 하나된 독일을 발원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즉 독일 통일은 독일이 민족적으로 밑으로부터의 통일 과정이 뭉쳐서 정상적인 통일 독일과 독일인으로 합쳐짐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21세기 동시대 예술의 흐름은 글로벌 아트라는 경향 속에 있다. 글로벌 아트는 주된 예술의 중 심이 없는 탈 중심의 예술경향이다. 이는 곧 탈서구화의 의미이기도 하다. 1998년에 창립된 베를 린 비엔날레는 기존의 서구중심의 예술관점을 탈피한 운영정책 즉 탈서구화 정책을 펴고 있다. 젊 은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동시대 예술을 고찰 하고자 하는 베를린 비엔날레는 현 시대 예술경향인 글로벌 아트의 이해와 정립을 시도하는 운영전략을 펴고 있다. 이 고찰을 통해, 본 연구는 세계화 속의 국제 비엔날레가 궁극적으로 개최 지역의 문화역사를 동반한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동 시에 지역예술 발전의 동반을 마련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는 세계화로 긴밀히 밀착된 글로벌 아 트의 특성과 지역 예술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재조명하게 할 것이다.
베를린 세계복음전도대회(이하 베를린 대회)는 복음주의선교의 언약과 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 1961년 WCC 제3차 뉴델리대회 이후, 베를린대회는 복음주의 선교에 관계된 모든 단체, 모든 선교사, 개인 그리고 교회와 교단들이 총 집결된 모양이었다. 마치 WCC와 같은 복음주의세계선교대회라는 성격을 갖게 한 창조적인 대회였다. 베를린대회는 두 가지를 정리한 대회였다. 1)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관한 사역과 2) 복음의 직접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강조한 일 이었다. 이것은 로잔대회로 발전되었다. 베를린 대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가 주된 관심사였다. 베를린 대회가 선교의 사회참여는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복음전도를 모든 선교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한 것이다. 로잔 제1, 2, 3차대회에서도 선교의 사회참여와 봉사는 복음전도의 우선적 논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복음전도를 “사역의 한 유형”으로 전달 매체의 종류를 보려는 경향성은 상당히 에큐메니칼 선교입장에서 논증하는 것이다.1) 베를린 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방어적 입장’을 취한 면도 있지만, 복음주의 선교의 ‘복음전도’를 다른 어떤 형태로든지 “저해”, “방해”, “변질”시키려는 모든 경향성을 차단하는 것이 베를린대회의 성격이다. 이점에서 휘튼대 회와 차이가 난다. 휘튼대회는 선교의 적응력을 키워가는 성향을 지녔 다.2) 즉, 휘튼대회는 사회참여 선교의 효율성을 주는 점에 접근했다면, 베를린 대회는 사회참여가 복음전도에 필요하지만 동시에 장애물로 작용할수 있다는 점을 선포한 것이다. 1974년 로잔 제1차 대회에서도 사회참여가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복음전도가 우선이라는 점을 언약으 로 규정했다. 제2차 로잔 마닐라 대회는 “선언문”으로 3차 로잔 케이픈 타운 대회에서는 “서약”으로 정리하였다.3)
It is not easy to clarify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architect through his architecture. Exceptional cases, it will be the time to design a history museum. As an institution, a Museum already became an apparatus to represent the history to it itself. Libeskind’s Jewish museum Berlin has been presented as the controversial case most of all. In particular, in that it instead of dealing with history positive, that contains a tragic history, this building is a building that history a unique interpretation of the architect has been a problem.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find a suitable example to Libeskind’s Jewish museum in Berlin to try and look at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contemporary history and interpretation of the architect. In this paper, I am trying to interpret Libeskind’s Jewish Museum Berlin through the aesthetics and history philosophy of Theodor Adorno and Walter Benjamin. They are Jewish and the central figures of the Frankfurt School, known as ‘critical theorists’. Their critical theory was formed based on the experience of the Jewish genocide and war.
The $18^{th}$ century's Industrial Revolution brought about influx of commerce, industry, and agricultural population into the urban areas, entering the $19^{th}$ century. Quality of rural communities declined, and the exploding population in the cities gave rise to various problems. 'Mietskaserne' Blockhousing was constructed by the 'Hobrechtplan', but led to social problems such as poor living conditions, insufficient sunshine due to overcrowding, slums due to incomplete urban infrastructure, epidemics, and so on. Starting in the early $20^{th}$ century, Berlin has driven forward a remodeling plan under the motto of 'critical reconstruction (kritische Rekonstruktion)'. It is performed in the place, which represents the vicissitudinous history of Berlin with site plans coexisting past with presence, using modern vocabulary of architectural forms. Reconstructing a city is a process which not only raises the economic value of each building consisting a city, but also a redevelopment process that brings out cultural value of an era. When a new era emerges buildings get reconstructed or rebuilt, and thereby form the identity of a city by reflecting its society, culture, politics, economy, and history. Old German architecture were not destroyed or rebuilt recklessly just by the fact that they are functionally or aesthetically outdated. Each building is treated as precious cultural heritage reflecting the history. This is how Berlin is being transformed today.
18세기 유럽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패러 다임이 등장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왕국을 건설하고 프리드리히 1세 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베를린 궁정의 음악은 각 왕들의 정치관과 국가의 경제, 그리고 성장기에 경험한 심리적 영향으로 다양하게 변화 발전했다. 그중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의 통치아래 프로이센은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문화가 크 게 발달하였다.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정치가 안정되고, 국가 경제가 부흥해야 함을 프로이센의 음악후원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