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게 된 우리들의 예상되는 미래를 언택트 디지털 인디펜던트Untact Digital Independent로 가늠해 보고, 콘택트 아날로그 인터디펜던트Contact Analog Interdependent 적인 한국춤의 미래적 대안으로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는 첫째, 한국춤은 한국이라는 지역적 공간 안에서 시간적인 확보를 가지고 끝없는 수용과 변용의 지속적인 전승으로 이어 온 예술적 진화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의 소중한 자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 예술적 진화가 가능했던 것은 시대별 핵심적인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춤의 미래적 매체로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적용해보았다. 이를 통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란 우리가 예상하는 미래의 시대에 유기적으로 대응이 가능한 미디어 플랫폼으로 지속적인 참여와 협력적인 창조까지 가능한 오픈형 융합 미디어 모듈 시스템이라는 주제적 개념을 이끌어냈다. 셋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으로 본 한국춤의 구조는 논리적·표층적·서사적·심층적 등으로 나눌 수 있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서사성, 분절성, 연속성 복합성, 확장성, 총체성의 방식으로 춤을 이야기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천을 들고 추는 춤’을 예시로 들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디지털 문화콘텐츠 및 미디어 문화 원형으로서의 한국춤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키워드라고 하면 단연 ‘음모론’이란 언어이다. 어느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슈가 발현하게 되면 어김없이 언론, 뉴스, 개인 방송, SNS를 통해 ‘음모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천안함 음모론’, ‘총선 음모론’, ‘코로나 음모론’은 물론이거니와, ‘美 대선 음모론’, ‘9.11 음모론’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음모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음모론’에 대한 합리적 의심도 하지 않은 체, 비합리적이고, 편집증적인 환자 취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모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정치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음모론’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학문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음모와 관련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이나, 일상생활에 듣고 보는 정치적 비밀, 음모로 포장된 진실들을 음모론으로 포괄하여 살펴보았다. 음모론은 개인의 편협한 사고로 사회를 왜곡해서 보는 관점이지만, 음모론이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의식을 가져온다는 긍정적인 특징을 7가지로 분석하였다. 반면 음모론은 검증은 가능하지만, 과학과 실험에 의해 반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음모론의 한계가 있다고 칼 포퍼의 논의를 빌려 음모 론의 한계를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지식으로서의 음모론을 좀 더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으로서의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제4차 산업혁명의 구성요소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이 지속 또는 증가하는가, 그리고 그 관심의 분포에 국제성이 있는가를 실 증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2018년 5월 기준 전 세계 검색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검색 포털사이트인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트렌드를 활용한 빅데이터 툴을 활용하였다. 이와 관련 기존의 실증적 연구의 대상이 제4차 산업혁명 또는 그 유사개념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에 있었다면, 본 논문은 그 검증 대상을 제4차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실질적 핵심기술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체화하였다. 문헌고찰을 통해 제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키워드로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컴퓨팅(Cloud Computing), 모바일(Mobile), 블록체인(Block Chain), 3D프린팅(Three Dimensional Printing), 로봇(Robot), 가상・증강현실(Virtual・Augment Reality), 사이버물리시스템(Cyber-physical System, CPS), 스마트팩토리 (Smart Factory)의 11개 키워드를, 제4차 산업혁명으로 창출된 패러다임으로서 O2O(Online to Offline), 공유경제(Sharing Economy), 플랫폼경제 (Platform Economy), 온디맨드경제(On-Demand Economy), 크라우드소싱 (Crowd Sourcing)의 5개 키워드를 각각 선정하였다. 16개 키워드에 대한 분석 결과, 2004년 1월부터 2020년 8월 현재까지 제4차 산업혁명의 구성 요소 핵심기술 11개 키워드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은 새로운 패러다임 5개 키워드에 대한 관심과 달리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관심도는 3D 프린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분포되어 있는 국제성을 획득하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하였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장은 원료공급과 시장개척을 위해 세력확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앞선 공업국가와 후발 공업국가 간에는 원료공급과 시장개척을 위한 경쟁이 불가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세계경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체제가 성숙하지 못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의해서 발발하였다. 본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독일이 분할점령이 되었는데, 이에 독일분단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그 당시 전개되었던 국제회담을 통해 분석하였다. 독일의 분단은 강한 독일이 주는 위협요인을 해소하고자 소련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얄타회담 전후인 테헤란회담, 포츠담회담을 통해 확정되었다. 독일분단의 원인은 강한 독일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려는 연합국들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나, 전후처리과정에서 강대국들의 패권안정화가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과 패전국이었으나 1989년 10 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통일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으로부터 서독과 동독이 강제로 분단되고 관리되었다. 독일통일 전 서독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세계 선진국으로 발전하였으나. 동독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와 계획경제를 도입한 결과 국력면에서 서독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격차 를 보였다. 독일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전형적인 흡수통일방식이었다. 독일통일의 국내외적 환경요인은 국내적으로 동서독이 분단 상황 하에서도 정부와 민간부문차원에서 꾸준한 인적교류와 물적교류를 진행한 것이다. 국제적 요인으로는 첫째, 국제정세가 당시 소련과 동구 사회 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와 미소 냉전체제가 종식된 점, 둘째, 미국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동서독이 포함된 ‘2+4체제’ 시스템 가동의 성과이다. 셋째, 독일통일은 당시 유럽지역의 나토(NATO) 와 유럽연합(EU) 등 정치적, 군사안보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전략적 목표가 일치되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 독일은 통일 후 동서독인 간 사회적·경제적·심리적 갈등이 내재돼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내적 갈등요소들은 하나씩 완화돼 갔다. 이러한 독일통일 갈등요소들은 분 단체제인 한반도와 중국 양안의 통일과정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 연구의 목적은 독일 통일에 있어 동서 베를린 분단의 종료,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에 영향을 끼친 인과관계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될 핵심 요소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동독과 서독의 분단→ 동베를린의 분단→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과 서독의 통일'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여하튼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동서독은 정상회담을 수차례 가져왔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는 날카로운 대립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정상회담이 진척된 것만 보아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독 통일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서독 주민들, 특히 동독주민들의 통일 여망은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셈이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분단 독일과 분할 베를린 영토에 펼쳐진 장막과 철조망을 뚫고 하나된 독일을 발원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즉 독일 통일은 독일이 민족적으로 밑으로부터의 통일 과정이 뭉쳐서 정상적인 통일 독일과 독일인으로 합쳐짐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동·서독 주민의 역할을 고찰하였다. 독일정치는 경제적 발전과 사회이익을 위한 동서독 통일, 즉 게젤 샤프트(Gesellschaft)를 추구하였으나, 동서독 주민은 이를 위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복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본고에서는 40여 년간의 분단 이후 독일통일은 외적으로 동독에 대한 서독의 흡수통일 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내적으로 동·서독 주민의 게마인샤프트 복원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본고에서는 분단 시기 동서독 간 이주 및 교류 상황을 고찰하고, 포스트 통일 시기 동독 주민의 정체성 형성을 통한 독일의 게마인샤프트 복원 과정을 분석하였다.
동서독은 분단 25년만인 1970년부터 독일통일을 이룬 1990년까지 총 7차례의 공식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6차례 비공식 정상접촉도 있었다. 동서독은 지난 1990년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융합된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협력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해냈다. 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상회담이 보여준 ①장기적 안목에 기초한 지속적인 대화의 추진, ②서로 양보하는 대화의 정신, ③실현불가능하고 민감한 문제를 뒤로 미루고 실현 가능한 문제를 우산시하는 현명함, ④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가는 자세, ⑤서독의 동독포용 및 통일역량의 강화노력 등은 통독 30주년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남북한정상회담과 관련해서 많은 교훈 과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리도 독일통일을 교훈삼아 ①지속적인 남북대 화와 교류협력, ②한반도 통일이해관계국에 대한 평화통일외교의 전개 및 국제사회와의 신뢰구축 강화, ③한국의 평화통일 역량강화를 모색·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독일통일의 사례를 활용하여 북핵 위협 상황에 부합되는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제안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특히 서독이 동독의 새 정부와 협의 하에 동독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확인한 다음에 평화적 합의통일을 추진하였다는 데 주목하였다. 분석의 결과, 독일 통일은 평화적 과정을 거쳤고, 주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여 진행되었으며, 국내적 및 국제적 절차를 착실하게 준수한 것으로 드러났고,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통일에 유용한 교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교훈들을 잘 반영할 때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현재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큰 변수이다. 따라서 남한은 우선 북핵에 대한 효과적인 억제 및 방어방책을 구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평화적 합의통일에 대한 의지와 비전을 토의하여 정립해야하고, 한국 주도의 통일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통일의 비전은 평화적 방법과 수단의 사용, 주민의 의지와 의견의 적극적인 반영, 국내적 및 국제적 절차의 준수를 포함하는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군의 역할 또한 평시의 국민 보호 및 세계 평화의 수호를 위한 행위자로 변화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평화유지군의 경우 평화의 수호자로서 세계 각 지역의 분쟁과 내전이 종식된 지역에 파견되어 민간인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 가지고 있는 평화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는 최근 파병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간인 보호 임무 실패로 인해 재평가 되고 있 다. 특히 평화유지군 파병국가 가운데 내전 및 분쟁 이후 군사통합을 경험한 국가일수록 임무지에서의 민간인 보호 임무 실패가 두드러지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통일 독일의 군사통합 사례를 통해 군사통합으로 새로 이 구성된 군대 또한 국외 파병시 성공적인 임무 수행과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에 성공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본 논문은 이념갈 등 완화, 교차배치정책, 전범 및 인권 탄압 범죄 가담자에 대한 통합 배 제가 군사통합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경제와 그 초기 수십 년 동안의 발전전략의 관계를 살펴본 후, '거품경제'의 역사적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1980년대 후반 이전에 성공적인 경 제 발전을 이루었다. 기존 연구에서 금융부의 강력한 개입과 은행을 기 반으로 한 기업집단 간 집중적인 협력이 일본 경제성장의 일차적 요소라 고 종종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요인 은 향후 일본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전환된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 후 반 이후 '거품경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거품경제'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었다. 본 연구는 1960~80년 개발정책의 성과 가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경제전환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주 장과 함께 현재 일본 정부의 경제회복 노력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