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샤록스 선교사에 대한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그의 선교활동과 사상의 변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참여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는 초기 이북지역의 선천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진행하면서 ‘정확한 의술이 곧 선교’라는 사상을 그의 의료선교에 적용 했다. 그의 선교 사상은 러·일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 의료선교를 멈추지 않고 진행하면서 의료선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갔 다. 하지만 그는 의료와 교육 선교를 함께 맡으면서 일제의 종교 교육 금지 정책에 갈등을 경험한다. 이는 선교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선교 사상과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는 어려움 을 겪으며 반일 감정을 보이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후 1918년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자극 했던 “민족자결론”등을 한국인에게 전하고 3·1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에게 부상당한 사진을 보내는 등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도움을 주면서 3·1 독립운동의 시작과 말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감시를 당하면서 무리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미국으로 귀국하여, 한 달여 만에 순직하게 된다.
욥의 고난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는 ‘행위화복관계사상(Tun- Ergehen-Zusammenhang)’이 있다. 이는 욥의 경건과 모범적인 신앙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등가적 반응이라는 사탄의 도발적 질문과 세 친구의 집요한 추궁에 잘 드러난다. 욥의 신앙은 소위 ‘주고받기식 (give and take)’ 신앙일 뿐이라는 고발에 대해 하나님은 다소 즉흥적으 로 사탄의 분탕질을 허락하고 만다. 선교적 해석학은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욥의 고난을 인류 보편적 차원의 주제로 수렴하거나 목회적으 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많다. 본 고는 이와 같은 경향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조리철학의 관점 (absurdism)이 전술한 모호함을 해소할 수 있다는 핵심 논지에 따른 욥의 언어 분석을 통해 행위화복관계사상과 선교적 해석학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행위화복관계사상과 선교적 해석학이 가진 신학적, 해석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는 빈곤한 자들을 향하여 열려있고 세상의 빈곤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 세상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복민주의에 대한 선교신학의 연구는 빈곤의 고통 속에 있는 사회에 다양한 적용을 통하여 오늘날 교회가 비난 받고 있는 반사회적인 모습과 개 교회주의와 지역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반성하고, 비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열린 시각을 갖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가나안의 복민주의 운동은 우리나라 빈곤 극복과 국민 의식의 개혁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세계 12개국 15곳의 농군학교를 통해서 실제적인 변화의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내와 세계 각지로부터 보고되고 있는 실증 모델이다. 그러므로 이런 복민주 의와 가나안 운동에 대한 연구는 개인의 변화는 물론 국가와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복음전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메리 F. 스크랜턴 선교사는 조선 말엽 개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시대의 요구를 이해하고 이를 선교에 접목시킨 선교사였다. 특히 그녀는 교육과 의료선교를 통해 사회 변혁을 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에게 기독교교육을 통해 인권을 회복하고 여성의 가치를 고양시킨 여성교육의 선구자적 삶을 살았다. 스크랜턴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여성들에게 조선인으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했으며 조선의 미래를 당당하게 세워갈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계몽시켰다. 그녀의 선교적 열정과 헌신, 그리고 용기는 어둠에 쌓여 있던 조선에 한줄기 빛이고 희망이었다. 또한 복음의 불모지 조선 땅에 개신교의 여명이 밝아오게 만드는 장본인이었다.
칼 라이헬트는 노르웨이 출신 중국선교사로서 중국 불교승려들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사역한 선교사로서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선교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승려들의 복음화를 위해 그들과 동일화하는 과감한 상황화 입장을 펼쳤으므로 선교부의 오해와 불신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성취론(Fulfillment Theory)적 입장에서 불교철학과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 하남성에서 홍콩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 도풍산에 불교양식의 선교센터를 건립하고 찾아오는 불교승려들과 도교인들에게 함께 기숙하며 토론하면서 복음을 가르쳤으며, 270여명의 불교승려들과 다수의 도교인들을 개종시켰다. 또한 루터교 연합신학교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배출시켰으며, 중국어 성경주석발간 등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당대 선교부로부터의 냉대와 추방에도 불구하고 일생에 걸친 불교의 지도자들을 향한 사랑과 전도행로는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재평가되고 연구되어야할 가치가 있다. 본 연구를 위해 칼 라이헬트의 저서와 그에 관한 저널들, 성취론에 대한 견해들과 라이헬트의 입장, 도풍산 현장의 증거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본 논문은 류동식의 신학사상의 중심을 “포월(包越)”사상으로 파악하고, 기하학적인 해석을 통해 선교신학적으로 조명한다. 류동식의 신학은 토착화된 풍류신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신학으로 보아 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류동식의 신학적 사유구조가 기하학적이고 도형적이기 때문이다. 포월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황은 대립과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기하학적으로 디아드(Dyad), 즉 양극이 이질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속성과 ‘하나’에 대한 기억은 파르마콘, 즉 약이면서 동시에 독인 상황에서 혼돈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 역설과 모순이 포월에서 극복된다. 무엇보다도 포월사상이 완성되는 곳은 트리아드(Triad), 즉 삼태극이 다. 절대적인 타자였던 하나님이 자기 부정의 인격적 매개인 그리스도의 심허속천(心虛屬天)으로 인해 인간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삼태극에서 역동하는 부활이다. 풍류신학의 삼태극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하늘과 사람 사이의 중심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심을 이어주는 것은 지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건을 만드는 선교적 예술가인 것이다.
본 연구는 로마서에 나타난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관한 사도바울의 선교적 이해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바울 서신 중 하나인 로마서는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논쟁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1장부터 8장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9장부 터 11장에서는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 혹은 믿음에 관한 내용을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신비스러운 방법이란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의 숫자가 어떤 기준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이 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을 항상 연결시켰다.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방 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반드시 전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로마서 9-11장을 유대인들과 이방인 들 모두에게 설교 할 수 있는가?” 하는 선교적 질문들로 우리를 이끈다.
This study is to grasp the understandings behind the work of Donald A. McGavran, who left a significant mark on evangelical mission in the 20th century since his birth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to criticize his thoughts of mission. He began his missionary works when after the colonial era, evangelical missions were contracted by the ecumenical camp emphasizing social service
and social action. From the biblical perspective, he stressed the importance of evangelism, church planting, and the church as a significant means to realize God’s mission. In his missiology, mission involves communicating the Gospel to unbelievers, persuading them to accept Jesus Christ as their Lord and Savior, and helping them becom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hurch and grow into more mature Christians. Although somewhat criticized, his two terms, discipling and perfecting, represent his thought of mission. The concept of church growth around conversion also supports his beliefs. Despite his great exploits, however, his understanding of mission was controversial in some ways. Theologically, his attitude was very determined and conservative. For this reason, many arguments and criticisms were arisen around his ideas. He stressed evangelism, church planting, and church-centric mission, whereas he had a negative attitude towards social service and social action, which were supported by the ecumenical camp. From the perspective of wholistic mission, it is natural that his thoughts be criticized in that he seems to lean towards one side. In other words, he lost his sense of balance. If possible, however, it should be considered that McGavran’s thoughts arose from concrete mission fields. His opinions were brought up to argue against the distorted ways of mission that spread in those days.
John Knox has been known as a Reformer of Scotland and studies on him have been mainly carried out in relation to John Calvin. Although there is no literal mention of ‘mission’ in his works, we can find that missiological concepts are abundant in his articles and letters. Firstly, the Scots Confession, which was drawn up under his influence in 1560, has an obvious missionary purpose. The preface and last sentence of the Scots Confession is to bear witness to the Gospel into all the nations. Secondly, Knox’s ecclesiology resembles that of John Calvin, with its particular emphasis on ‘ecclesiastical discipline’ for witnessing the Gospel. For him, the Church, which God raises up and fosters for His own purpose, is universal and ecumenical; the state, on the other hand, only exists as a means to protect and propagate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refore, he advocates a theocracy in order to establish a ‘universal Christian fellowship’ within Scotland. He also advocates social reform and stresses the need for universal compulsory education including girls’ education. Finally, he strived to return the Bible back to the ordinary people from the ecclesiastical authorities, urged people to read the Bible everyday and do group study at least twice a week. This was to kindle a fire of the Gospel in Scotland. In this aspect, he should be called a ‘Scottish Reformer’ rather than a Reformer of Scotland. He was truly an ‘inland missionary of Scotland’.
Yun Chi-ho(1865-1945) was the first Korean to study theology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fter returning to Korea, he contributed largely to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Christian higher education. This paper examines Yun’s thought on mission and education, claiming that Yun was a pioneering theologian of mission in paving a way to renewing the Christian education for life. He criticized the racially-distorted theological position of Western missionaries and changed the direction of mission from evangelism for conversion to transformation in individual life and social structure. As his diary shows, Yun’s early experience of the USA allowed him to recognize the racial prejudice of American missionaries toward indigenous people in mission fields. He argued that non-Christians should be treated as the same spiritual and intellectual beings as the missionaries. For him, Christian mission was a necessary step for widening the freedom of religion among non-Christians because it gave them more options to cultivate themselves both intellectually and morally. He believed that it was not human agents but God that was the ultimate subject of mission. His participation at 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 strengthened his confidence in Christian mission. At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1910, Yun presented his ideas of mission to Western missionaries and theologians. According to him, Korean Christianity was Bible and common people centered. Pointing out three dangers(① the revival of Buddhism and Confucianism, ② the introduction of Western philosophy, and ③ the emphasis on sudden conversion), he put the principle of Christ over the first principle in the matter of financial planning and distribution decision. He believed that the self-determination of indigenous leaders through the cooperation with missionaries was more important than the needs of missionaries and their home churches. For Yun, Christian mission was deeply related to Christian education for life. He contended that Christian life was the life of faith and community open to culture and the world. In conclusion, Yun proposed a viable form of Korean Christianity which seemed to be more sympathetic to the hearts of Korean people and their culture in the early 20th century Korean context. His contemporaries, however, failed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vision and strategy developed by Koreans themselves.
The doctrine of Won-Buddhism(Wonbulgyo) is based on the Il-Won-Sang(One Circle) as well as the Fourfold Grace. The teaching of Fourfold Grace is the more distinctive and practical doctrine. Jung bin Park (1891-1943), the founder of Won-Buddhism, originated Won-Buddhism after "the great enlightenment" in 1916. He re-created it from Korean traditional religions. The doctrine of fourfold Grace emphasizes following things: the grace of heaven and earth, the grace of parents, the grace of neighbors, the grace of law. The doctrinal chart of Won-Buddhism show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ruth of Il-Won-Sang and the fourfold grace as the whole to the part, and unites the faith and gratitude to be practiced whenever and everywhere. Two different grace theories from Sotaesan and Apostle Paul, are compared through out this article. First, Sotaesan understands god as pantheism but Apostle Paul, as creator. Second, salvation is gained from one’s good deeds according to Sotaesan but Apostle Paul asserts that salvation is gained only by the blood of Jesus Christ. Last, while Soetaesan emphasize religion of ethic, Apostle Paul emphasizes religion of life. I strongly suggest three mission strategies to believers in order to evangelize them. First, Christians have to witness the uniqueness of Jesus Christ to Won-Buddhism who believes in syncretism. Next, Christians have to change their Won-Buddhism world-view into Christian world view. Finally, we have to persuade them through love and patience.
"Ju-chae" ideology can be likened to the driving force that support, maintain, and fosters the North Korean society. Since the defection of Party Secretary general Hwang, Jang Yeup, however, the meaning of "Ju-chae" is being transformed, signifying the construction of a strong fatherland. Nevertheless, "Ju-chae" continues to be a strong ideological strength underlying the North Korean society in general. The 1995 food shortage was an occasion which shook the very foundation of North Korean establishment. The resulting economic reforms initiated in July 1st of 2002 leaves the impression believe that the leading consideration of the North Korean society is economic rather than political. Signs of such changes gave occasion for South Korean churches to reexamine their North Korean mission strategies. In other words, Christianity does not translate into anti-"Ju-chae" nor is anti-Christianity signify "Ju-chae." In between the early years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till the official recognition of religion in 1972 was the Korean war. While the traditionally this period is viewed a period in which the North Korean government attempted to eradicate religion, judging from events, it is a period in which official religion is transformed into an unofficial religion and all religion hostile to the government is eradicated. Christian church is included in this category. The Korean war resulted in anti-American feeling and Christianity was considered as an American religion. Anti-Christian activity became the ideological basis of "Ju-chae" ideology. The self-reliance or Kim, Il-sung-nism which form the basis of "Ju-chae" is linked to attempt to preserve the North Korean establishment from foreign powers. To this point,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s viewed as in the forefront of Christian oppression. In reality, North Korea is known to execute believers for their faith. However, Christian leaders are known to hold high offices in North Korea. Furthermore, underground church is known to exist till today. This can be viewed as evidence that the North Korean church, rather than anti-Christian, merely views the Church as anti-government. Thus, "Ju-chae" and Christianity, instead of being antithetical, merely differs in methodology. Any attempt to evangelize North Korea must take into consideration the renewed interest in economy in North Korea. Because North Korea is concentration its energy towards economy, North Korean mission must work to integrate its activities with economic assistance. The fact that North Korean situation can change overnight by the actions of Kim Jung Il is the longstanding problem. Variation in North Korean politics is a handicap. But we must not forget that the economic problems of North Korea is unavoidable and must plan our mission strategy accordingly. Currently in North Korea, the introduction of cell-phone and computers are allowing outside news and information to enter North Korea and this leads to speculation that a return to the past is not an option for North Korea. Therefore, we must look at "Ju-chae" as a difference in type. It is time detailed mission strategy is formed in connection with North Korean economy, particularly in association with the special economic area created in Gae-sung.
이 연구는 한국 도시산업선교운동의 선구자 조지송의 생애, 산업선교정 책, 그의 노동자선교 신학 사상을 고찰하고, 그의 활동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조지송은 보수 적 친미 반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한에 온 피난민이었다. 그는 산업전도 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 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발견했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 정책을 네 단계로 발전시켰다. 1 회사 사주와 협력하는 노동자 전도 2. 훈 련된 평신도를 통한 공장 전도 3.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선교 4. 소그룹 안에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주체성 회복을 통해 산업현실을 개혁하는 산업선교. 조지송은 노동자 기독론과 노동조합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변화된 노동자의 성숙한 인격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헌신성에서 희망 와 용기를 발견했다. 독재정권과 비윤리적 기업과 협조해서 산업선교를 탄 압하는 제도교회를 거짓교회로 보았다. WCC와 CCA는 한국의 도시산업선 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운동이 세계교회 와 인류 노동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姜婦人, 姜慕仁)선교사는 1897년에서 1920년까지 한국여성들을 위해 선교에 헌신했던 미국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선교사다. 1898년 배화여자대학의 전신인 ‘배화학당’을 설립하였다. 본고는 캠벨 선교사의 교육선교사상과 교육사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은 내한하자마자 쓴 첫 보고 서 서두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이 복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 세상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먼 지구의 구석진 곳에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신실한지요? 어둠속에 머물고 있는 이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J. P. Campbell, "Communication from Mrs. Campbell,"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1897), 15).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에 따른 선교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 교회를 위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할 학교 설립, 또 하나는 전도사업을 통해 특히 여성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한말 일제기 기독교계 여학교는 역사·문화·전통·풍속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한국적 여성’, 초월적 영성을 가진 ‘기독교적 여성’,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민족적 여성’이라는 세 가지의 주된 과제를 가지고 교육해야하는 과업을 안고 있었다. 배화의 교육을 담당했던 캠벨과 선교사들 및 교사들은 교육 과정 속에서 위의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캠벨의 그리스도적인 인류애를 품고 조선 땅으로 왔다. “소외된 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혼신(渾身)으로 선교사라는 ‘도구’ 가 되어 조선의 여성을 끝까지 사랑하며, 대접하며 살다가 1920년 11월 12일 68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별세했다.
Despite his popularity, the Rev. James S. Gale has not been given sufficient scholarly attention. How could it be? It appears that while Gale has been known as a missionary and a scholar of Korean studies, this two-fold identity has not been appreciated in a comprehensively way: scholars tend to interpret two aspects of his identity as contradictory ones or simply juxtaposed ones rather than as mutually interacted ones. In this context, in the area of Korean studies, they have seen him mainly as a Korean expert, without paying attention to his being a missionary; on the other hand, in the realm of Korean Christian studies, they have largely viewed him as a missionary, without properly relating this to his expertise in Korean studies. This article aims to overcome this discrepancy in the understanding of Gale in the contemporary studies, secular and Christian, in Korea. The thesis of this article is that the mutually integrated two-fold identity of Gale i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his thought and work; that is, he was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Such characteristics of his being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he prepared himself as a missionary in Korea through cultural identification, through which he gradually overcome his paternalism; second, he equipped himself with expertise in Korean studies, which enabled him to be a first-class cultural missionary, namely, a theologian of missionary indigenization; and last, he bequeathed his legacy as a missionary scholar, which paves the way for Korean studies as mission. Thus, he challenged the understanding of both missionary works and a mission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