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신학회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1991년에 준비모임 후 1992년에 창립되었다. 학회 연도 구성은 두 단계로, 1991-2000년까 지 태동과 준비기, 2001-2022년까지 도약과 안정 그리고 학회의 세계화 현장으로 정리된다. 외형적으로는 첫째, 학회 내실 있게 한 시기로, 회원증가, 논문발표, 회원들의 저술 활동 나아가 교재 개발이 있었다. 둘째, 연합활동으로는 국내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와 해외 선교단체들과 연대 학술대회, 특히 세계선교학회(IAMS)와의 교류이 다. 내형적으로는 「선교신학」 학술지 특집 발간으로 학회의 전문화, 등재학술지로 확대, 그리고 다양한 학술대회 등이 연 4회 이상 전문화와 특성화를 갖춰 개최되었다. 앞으로 한국선교신학회는 선교의 무수한 외형적 변화와 선교 본질의 내부적 단결과 단합으로 복음이라는 울타리 를 넘어 증거하며, 본질적 선교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확증해 가야 한다.
본 논문은 한국선교신학회가 「선교신학」 학술지를 통해서 지난 30년 동안 다룬 선교학적 주제들을 고찰한다. 「선교신학」에서 중점적으 로 다룬 주제 중에는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 “이민, 다문화, 디아스포라 선교” 이렇게 세 가지 중심주제들이 있다. 각각의 주제들은 선교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해당 주제들이 갖는 선교적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고, 「선교신학」에 실린 논문들의 저자와 제목을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해당 주제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연구한다. 이를 통해 한국선교신학회가 지난 30년 동안 「선교신학」을 통해서 선교신학 연구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 보고, 앞으로 어느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지 고찰하고자 한다. 보다 발전된 선교신학적 연구를 위해서 연구자는 앞으로 「선교신학」에 선교지역별 연구, 선교역사 연구, 그리고 국내선교단체 및 NGO 단체에 관한 연구를 제안한다.
한국선교신학회는 1992년 설립되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30년 역사의 초기에 대한 발전역사를 세 가지 방향에서 정리했다. 먼저 한국선교신학회의 기원을 기술하고, 초기 학술대회의 발전과정을 정리했다. 여기에는 학회설립을 위한 토론과 준비과정이 포함된다. 다음으로 학회의 학술지 「선교신학」의 기원과 발전역사를 기술했다. 학술지는 1997년 창간호가 발행되었으나 학술 진흥재단에 등재되지 못했고, 2002년 등재를 다시 추진하여 2005년 등재후보지, 2008년에 등재지가 되었다. 끝으로 학제 간 협력과 학술교 류의 발전을 연대기 순서로 정리했다. 세계선교학회를 비롯한 국제적 학술교류와 국내의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와 연합학술활동 등을 기 술했다.
이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를 책임 진 조지송의 산업선교 활동을 제시하고 그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의 선교로부터 얻는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는 평신도를 통한 산업전도, 노동 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소그룹 활동으로서의 산업선교로 전개되었다. 그의 산업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십자가의 길로서의 산업선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현존으로서의 산업선교, 디아코니아로서의 산업선교, 노동의 신학과 산업선교, 산업선교와 돈, 노동조합 교회론: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산업선교와 구원 론, 바보들의 행진, 어릿광대 공동체로서의 산업선교이었다. 그의 산업선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무자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 실무자와 노동자 및 학생, 목회자,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교육의 언어는 몸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언어, 산업사회에서 현존으로의 선교 등이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outline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ailand and its characteristics, tasks and mission theological issues so that the thesis searches for the wa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o contributing to the unity and empowerment of the Church of Thailand. To achieve this aim, the thesis deals with the social characteristics and value systems of Thai society and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Roman Catholics and of Protestants. Through suggesting the contour of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ailand, some characteristics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are church plant, church-centered passion, project-centered and materialistic mission, and independent seminaries. Tasks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in Thailand are acceptance of Thai Christians' critiques on Korean missionaries, Korean missionaries' understanding of Thai culture in depth, meagerness and lack of mission strategies, halt in mission, missionary kids' education, partnership in mission, acceptance of difference of Thai church culture, understanding of the missionary tasks from the socio-cultural and religious situation of Thai church, and theological issues. The main results of the research are as follows: first of all, there are two kinds of church in Thailand: one belongs to 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the other to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Some Korean missionaries, however, established independent denominations and ran seminaries so that those denominations and seminaries obstructed the unity of Church in Thailand. These activities of Korean Church cannot be regarded as mission. Secondly, Korean missionaries to Thailand should not transplant the culture of the Korean Church to Thailand. Rather with Thai Church leaders, their missionary tasks are looking for the ways of how to communicate and share the Gospel with Buddhist Thais and identifying the appropriate ecclesiology in Buddhist society. Thirdly, the future of the mission of Korean Church to Thailand depends on whether Korean missionaries could expand the model of the partnership in mission done by the missionaries belonged to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o the relation between the Church of Thailand and Korean missionaries. Lastly, such an expansion of the model of the partnership in mission will be possible only when the ecumenical churches and the evangelical churches can reach a common conclusion through coming to an agreement on the theological issues such as human-centered theology, religious pluralism and mission methods and mission theology in the Buddhist country.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종교개혁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환(Alloeosis)” 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반박되어지고, 그에 의하여 “속성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로 주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속성간의 교류에 상응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신학에서 삼위의 “순환”(“사귐”)으로 전해지면서 신학용어의 오용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양성이 상호내재, 침투하여 연합 하는 신학이해가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원 의도를 약화시켰다. 교부들이 즐겨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사귐(communio κοιν ωνία), 참여(participatio),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함께 나누다’(socio), ‘관계’(societas 교제, 사회)를 사회적 삼위일체신학을 위해 사용했으면 훨씬 나을 뻔했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류와 삼위일체신앙 이해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속성간의 교류를 위하여 ἀντίδοσις ἰδιωμάτων, περιχώρησις가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연합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속성 간의 교류, 상호내재, 상호침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신 학은 보나벤투라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과 인식, 이성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본 연구는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을 기독교사상 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다른 이름인 문화-프로테스탄 티즘은 기독교 신학을 철학화하여 정통주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학사 조를 말한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등장한 합리적 회의주의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도전을 받게 되자 그에 대한 학문적 응전이 필요했는데, 문화-프로 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 기초해서 그 과제를 해결하 려 했다. 특별히 인간의 선의지로 실현할 윤리적 하나님 나라에 기초해 종 말론을 내재적,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은 근 대 이성철학의 낙관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주 요 학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과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낙관적 종말론을 확립하였다. 이와 함께 근대 진보적 낙관주의에 영향을 받아 세속적 유토피아의 실현을 하나님 나 라와 일치시킴으로써 기독교 종말론의 낙관적 이해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 이 종말론에 대한 낙관적 이해는 재림의 지연에 따른 성서적 종말론의 딜 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학적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성철학에 기초한 근대 계몽주의적 진보주의가 실패 한 상황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 역시 사상적으로 도전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기독교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이 실패한 자 리에서 새로운 신학적 종말론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결 과적으로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은 변증법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Calvin and Anabaptist radicals in the sixteenth century This study first traces the relations of Calvin and Anabaptists from historical perspective, and then examines from theological perspective Schleitheim Confession(1527), which is an early Anabaptists’ articles of faith, and Calvin’s Brief Instruction Against the Errors of the Common Sect of the Anabaptists(1544), which is Calvin’s refutation against Schleitheim Confession.
In the sixteenth-century reformation movements, Calvin on the one hand should fight against Roman Catholicism, and on the other hand have to stand against Anabaptist radicals. Calvin cries for reform against Roman Church’s ecclesia deformata, at the same time he raises his voice against Anabaptist’s sectarian errors pursuing ecclesia perfecta. This study discloses what Calvin and Anabaptists argue, and what theological points of dispute between them are. In particular, it analyzes their differences from three significant topics, baptism, church, and state.
This paper will be focused on a methodological posi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the current researches, man has dealt with this question in two directions as the following: the perspectives of historical theology and church history. However, this resolution makes to put each of the disciplines in a intermediate position between these two extremes, or at best in one of the two. Now, for the raised question, psychoanalytical elements should be considered in the whole process of the reconstructing historical fact, because these have been involved in every of the four steps from happening of historical events to reconstruction of the historical realty.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s needs the so-called “paradigm shift” of the methodology. Finally, this will allow to go beyond the limits of the deficiency of the historical materials.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
This essay explores the theological view of the Early Church Fathers on the Septuagint. The Septuagint, commonly abbreviated LXX, was the first translation made of the Hebrew Bible into the Greek. Its origin of the translation is written in the Letter of Aristeas, a document that appeared in around 2C–3C B.C. The Torah was translated first, and other books of the Scripture including the Prophetic Books and Wisdom literature were included progressively. The Septuagint was the Bible used by Apostles and the early Christians. The use of the Greek Bible provided spiritual soil for the universal Christianity which successfully incorporated Jewish ideas into the teaching of Jesus in the Hellenistic settings. On the contrary, the Jewish religious leaders that would later form the Masorates rejected the value of the LXX as Canon by upholding only the Hebrew texts. In return, church fathers pointed out the intentional blurs of the Hebrew Old Testament, by claiming that, in the text, some of the passages representing the Messianic type of Jesus were altered or taken out.
The essay analyses the writings of Justin the Martyr who defended the historical value of the letter of Aristeas and the supreme place of the Septuagint as Canon of the church. Irenaeus of Lyon also claimed the LXX as the Scripture of the “catholic” church. Most of the church Fathers including Clement of Alexandria supported the inspirational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with firm faith on the legendary tradition gradually added to the Letter. While Origen was the first Christian scholar who compared the LXX with other translations including the Hebrew text then, it was Jerome who insisted canonical value of Hebrew text over the LXX. The outcome was his Latin Vulgate. Augustine, however, persistently opposed Jerome’s translation and use of the Hebrew text. The essay focuses mainly on the debates between the bishop of Hippo and the hermit of Bethlehem.
This essay is to investigate how the vision of Four Living Creatures in the Book of Ezekiel was interpreted in the History of Christians. Ezekiel as well as the book of Revelation report that there are creatures with four faces of man, lion, ox, and eagle around the throne of God in heaven. In ancient period of Old Testament, animals were often used as symbols to represent divine natures. For example, lion signified royal power while eagle velocity and dignity.
It was Irenaeus, for the first time, which suggested the connection between the four living creatures and the four gospels. He viewed that face of Human represents the gospel of Matthew; eagle the gospel of Mark, ox the gospel of Luke, and that lion represents the gospel of John. However, Augustine assigned lion to Matthew, man to Mark, ox to Luke, and eagle to John. It was Jerome's idea that prevailed throughout the following hundreds years in Christian arts and architectures. The church father claimed that face of man signifies Matthew, lion Mark, ox Luke, and eagle to John. Almost all of the Eastern Church's art depicts Jerome's idea about the Four Living Creatures.
Nevertheless, the reformers such as Luther and Calvin including later church leader, Wesley did not employed the Jerome's interpretation. They agreed to view the four living creatures as nature of divinity not as prophesy of the four gosp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