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李穡 1328~1396)은 원제국(元帝國)이 고려를 지배한지 100여 년이 지난 고려 말에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원(元)의 국자감(國子監) 에 입학하여 성리학을 접함으로써 그의 평생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이 는 훗날 귀국 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후학들을 선발 하여 성리학을 강독, 토론함으로써 고려 성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 헌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색은 원(元)과 명(明), 고려와 조선이라는 왕조의 교체기에 따른 역 사적 전환기에 처하여 자신의 경세사상과 역사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 내게 되었다. 본고는 이색의 ≪춘추(春秋)≫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의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고찰함으로써 역사적 전환기에 나타난 한 인 간의 행동 양식과 정신세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색은 전 생애를 통해 6,200여 편의 시문(詩文)을 남겨 동국 문장의 으뜸으로 불린다. 그의 시문집인 ≪목은시고(牧隱詩稿)≫와 ≪목은문고(牧隱文稿)≫는 모 두 ≪목은집(牧隱集)≫에 수록되어있다.
Yeats began his career as a poet elaborating the Celtic legends and stories about the life and politics of the Irish people: Irishness was a source of his poetic inspiration. Later he moved to formulations that complicated his own attitudes toward his contemporary politics in Ireland and caused misunderstanding of his works among his readers. Because he emphasized violence embodied in the struggles of political conflicts and historical events. For Yeats, history steps to another stage with violence. In other words, he focused on the violent moment in historical events. In describing the process or movement of memorable event in history he distances himself and keeps his views or judgments on it with ambivalent words. He does not support for or oppose to the only one side in the political event, to show his interest in the significances of the moments. Thus he is far from the passionate politics in his contemporary Ireland. Rather he sees the violence as a power to change in history, as his poem "Leda and the Swan" shows. In the myth of Leda and Zeus he reads the destructive act of rape on Leda by Zeus within the frame of destruction of the nation-state. And Yeats focuses on Leda's tragic experience with powerful and violent Zeus as an event toward the violent and tragic history afterwards. In short, he shows the violence as one committed to change in the history of a state.
이 연구의 목적은 기독교 채식주의 전통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기초하여 기독교 채식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전통에 내포된 사회윤리적 담론을 고찰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식생활 관행에서 육식 금지의 전통은 수도사들의 금욕주의적인 삶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관행은 수도원의 주요 규례가 되었고, 사순절, 사계제일 등과 같은 전례에 의해 강조되면서 기독교 신앙 전통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분파주의자들의 엄격한 육식 금지의 관행, 수도원 금욕주의의 완화, 종교개혁자들의 수도원 관행 비판 등의 요소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육식 금지의 식사 관행은 계승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식 금지를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의 채식주의 전통은 동물 복지와 사회 질서유지의 차원에서 사회윤리적 담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 서 이러한 기독교 식생활 관행을 성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특별히 채식이 기후변화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인 식단으로 강조되고 있는 21세기에, 기독교는 채식주의 전통에 내포된 생태윤리적인 담론을 성찰하여, 그 실천 적 지혜를 계승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한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종교개혁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환(Alloeosis)” 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반박되어지고, 그에 의하여 “속성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로 주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속성간의 교류에 상응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신학에서 삼위의 “순환”(“사귐”)으로 전해지면서 신학용어의 오용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양성이 상호내재, 침투하여 연합 하는 신학이해가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원 의도를 약화시켰다. 교부들이 즐겨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사귐(communio κοιν ωνία), 참여(participatio),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함께 나누다’(socio), ‘관계’(societas 교제, 사회)를 사회적 삼위일체신학을 위해 사용했으면 훨씬 나을 뻔했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류와 삼위일체신앙 이해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속성간의 교류를 위하여 ἀντίδοσις ἰδιωμάτων, περιχώρησις가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연합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속성 간의 교류, 상호내재, 상호침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신 학은 보나벤투라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과 인식, 이성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이 글은 마삼락(馬三樂, Samuel Hugh Moffett)의 역사 이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마삼락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 휘튼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45년 예일 대학교에서 라투레트(Kenneth Latourette)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복음적 에큐메니즘의 입장에서 복음전도, 교회연합, 사회참여를 융합하여 우선주의와 축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교회가 자기봉쇄의 경향을 강화하면 세상에서 게토화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는 은둔주의자 타티안(Tatian)과 혼합주의자 바르다이산(Bardaisan)을 대조하며 초기 아시아 역사를 연구한다. 문화의 접근 모델로는 산 위의 은자, 도시의 감독, 학교의 교사, 기독교 게토의 족장을 제시하고, 본보기로는 땅 끝으로 나가는 선교사를 제안한다. 그의 선교신학은 선교의 중심과 변두리, 교회와 세상, 연합과 선교, 내부와 외부, 서양과 동양이 구분되는 경계를 강조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그는 아시아 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네스토리안 선교 또는 경교(景敎)를 연구하면서 교회는 이념과 권력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연합하고 선교하는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역사의 왜곡을 지적하고 아시아 중심의 교회역사를 서술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교회역사는 서로 배워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전까지 ‘초기’ 존 웨슬리의 목회직 이해를 원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신학적으로 접근하여 연구한다. 웨슬리의 초기 목회관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신실한 잉글랜드국교회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부모의 신학과 그들의 목회 모델을 통해 웨슬리는 목 회직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였으며, 엡웟에서의 가난한 삶은 그가 인간의 필요와 관련하여 혁신적인 목회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잉글랜드국교회 고교회 정신은 웨슬리가 조지 허버트와 성 키프리안과 같은 이들의 저서를 읽으며 그의 의식 가운데 더욱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조지아 선교시기까지 웨슬리는 고교회적 성직자 중심의 목회직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웨슬리는 회심 이후와는 달리 목회자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 사도적 계승의 선상에 있는 주교의 안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웨슬리는 목회직에 있어 성례 집례를 강조 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성례가 예배 가운데서 사라져 가고 있는 현대 개신교회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This study reviews the existing discourses on church disunit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It aims to examine the structure and logic of the discourses rather than criticising the discourses themselves. In doing so, it first accepts the existing discourses as such through suspension of judgment, and then clarifies the limitation of the discourses and suggests the feasible, if any, solutions. In the existing discourses on church disunity, it is said that the following issues are most important for each groups: the discipline issue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Koshin (Koshin group), the issue of the doctrine of the Bible for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Republic of Korea (PROK, Kijang group), the issue of the ecumenical movement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Hapdong group), and the personality issue for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onghap group).
Although different Korean Presbyterian denominations delivered their own discourses on church disunity, we came to notice the discrepancy between their argument and the reality of the churches when examining their church history. Such discrepancy, however, strongly suggests that in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there can be possibilities to change the course of history. As the Early Church took the opportunity for unity and development, facing church disunity, the Korean Church, particularly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is expected to do the same.
This essay explores the theological view of the Early Church Fathers on the Septuagint. The Septuagint, commonly abbreviated LXX, was the first translation made of the Hebrew Bible into the Greek. Its origin of the translation is written in the Letter of Aristeas, a document that appeared in around 2C–3C B.C. The Torah was translated first, and other books of the Scripture including the Prophetic Books and Wisdom literature were included progressively. The Septuagint was the Bible used by Apostles and the early Christians. The use of the Greek Bible provided spiritual soil for the universal Christianity which successfully incorporated Jewish ideas into the teaching of Jesus in the Hellenistic settings. On the contrary, the Jewish religious leaders that would later form the Masorates rejected the value of the LXX as Canon by upholding only the Hebrew texts. In return, church fathers pointed out the intentional blurs of the Hebrew Old Testament, by claiming that, in the text, some of the passages representing the Messianic type of Jesus were altered or taken out.
The essay analyses the writings of Justin the Martyr who defended the historical value of the letter of Aristeas and the supreme place of the Septuagint as Canon of the church. Irenaeus of Lyon also claimed the LXX as the Scripture of the “catholic” church. Most of the church Fathers including Clement of Alexandria supported the inspirational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with firm faith on the legendary tradition gradually added to the Letter. While Origen was the first Christian scholar who compared the LXX with other translations including the Hebrew text then, it was Jerome who insisted canonical value of Hebrew text over the LXX. The outcome was his Latin Vulgate. Augustine, however, persistently opposed Jerome’s translation and use of the Hebrew text. The essay focuses mainly on the debates between the bishop of Hippo and the hermit of Bethle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