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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은 19세기 60년대부터 외세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와 병인양요, 미국과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또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제일 먼저 울릉도·독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울릉도에 일본인을 보내 벌목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이것은 1881년 울릉도 수토에서 보고되었다. 수토사들이 울릉도를 순찰할 때 일본인들이 나무를 베어 원산과 부산으로 옮기려 하였고 이 사실을 들은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관찰사로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이규원은 울릉도 상황과 「울릉도내도」, 「울릉도외도」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후 조선은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도장(島長)을 두어 울릉도를 관리하였고, 군을 설치해 지방관제에 편입하고 관할 구역을 울릉도 전체와 독도를 포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고종의 관방정책으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집권하면서 1870년대 초부터 국경 방어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관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국경지역인 동래, 의주, 황해지역 방어와 이양선의 출몰 등에 대비하여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한 고종의 울릉도 관방정책은 전국 관방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개척하고자 하는 그의 영토수호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울릉도는 버려진 섬이 아니라 비웠던 섬이고, 주민을 이주하여 단계적으로 울릉도를 개척하였고, 군청을 설치하는 등 고종의 정책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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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에서 삼척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 크게 두 가지를 검토하였다. 첫째는 삼척영장의 신설과 그 변천과정에 대해서 기존의 논문 성과와 승정원일기를 추가하여 고찰하였다. 1673년(현종 12)에 삼척영 장은 전임영장이 아닌 겸임영장으로 신설되었고, 삼척첨사가 영장을 겸직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 후 1673년(현종 14)부터 삼척영장은 토포사를 겸임하였고, 1694 년(숙종 20)부터는 월송만호와 함께 울릉도 수토를 겸하였다. 하지만 영장은 정3품이고, 첨사는 종3품이기 때문에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는 삼척영장이 삼척포진 主將의 本職이 되고, 삼척첨사는 겸직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삼척영장은 삼척첨사가 겸임하던 겸영장에서 전담 무신이 파견되는 전 임영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799년(정조 23)에 삼척포진 주장의 공식적인 직함은 三陟營將 兼三陟鎭右營將 討捕使 三陟浦鎭水軍僉節制使로 정해졌다. 두 번째로는 삼척영장 중에 울릉도에 직접 다녀온 인원을 선별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 장한상이 1694년 삼척첨사로써 울릉도를 수토한 것이 수토의 시초라고 한 것과 달리 필자는 1613년 김연성이 삼척영장으로써 처음 수토를 시행하였음을 밝혔다. 즉, 삼척영장의 울릉도 수토는 1613년 김연성부터 1881년 남준희까지 약 260년간 지속되었다. 삼척은 1882년 이규원이 검찰사로 울릉도에 가기 전까지 울릉도 수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삼척영장은 총 25회의 울릉도 수토 를 하였고, 그 중 10회에 대해서는 수토의 날짜와 출항지 및 도착지까지 알 수 있는 기록이 현전한다. 그동안 수토에 관한 연구는 주기와 횟수에 대해서 집중되어 있었다. 수토의 주기는 3년에 한 번씩에서 2년에 한번으로 변화하다 나중에는 매년 수토를 하는 것으로 그 변화한다. 하지만 살펴본 3년, 2년, 매년 수토의 주기성 또한 수토가 흉년으로 인해서 정지된 점이 많고, 채삼군으로 인해서 시기도 4~5월에서 6~7월로 달라지기도 했 기 때문에 주기가 변동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19세기 말의 수토의 경우 간년 수토가 지켜지지 않을뿐더러 월송만호와 평해군수가 가는 것으로 기존의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윤회입송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보다 수토자료를 확보하여 입체감이 있는 수토사의 복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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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의 목적은 19세기 조선 정부의 울릉도·독도 통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울릉도 수토제(搜討制)의 운영 실태와 그 의의를 연구하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를 하나의 셋트로 인식하여 왔음은 양국의 역사 및 지리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고유한 영토로 통치하였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필자는 19세기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해 조사하여 논문으로 보고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이전 논문에 누락되었던 것과 새로 발견한 사료적 근거들을 추가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과도하게 추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삭제하여 현 단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토 일람표를 제시하였다. 둘째, 필자의 이전 논문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울릉도 개척기, 특히 1889∼1894년의 울릉도 수토제 운영 실태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셋째, 감영의 장계(狀啓)에 인용된 수토관의 첩정(牒呈)을 활용하여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수토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 었는지 수토 노정과 수토 내용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전반기 조선의 역사는 소수의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기’로, 이양선의 출 몰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안으로는 민란 등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울릉도 수토도 잘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세도정치기에도 울릉도 수토가 정기적으로 잘 진행되었고, 19세기 후반 울릉도 개척시기에도 수토제가 계속 존속되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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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후기 들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 수토정책이 취해져 그 관리가 강화되었 다. 이 수토정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해 이루어졌고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필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토 관련 유적․ 유물을 찾기 시작 하였으며, 이 글에서는 그동안 찾아낸 울진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소개․분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고자료들이 울진지역에서 나타나는 연유를 울릉도의 행정 체계에서 찾아보았다. 특히 대풍헌에 남아 있는 수토 관련 7점의 현판과 「완문」․「수토절목」의 고문서는 울릉도․ 독도 수토 시 수토사들이 항구에서 바람을 기다렸다는 『조선왕조실록』 의 편린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윤회수토 담당부대로서 그 유적지인 월송포진성이 울진에서 확인되어 그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평해군수 심의완 영세불망비 또한 울릉도 연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이 꾸준히 울릉도․ 독도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자료이면서 조선 정부가 평해군수에게 울릉도 첨사를 겸직하게 하는 『고종실록』의 행정체제 변화 기사를 입증하는 금석문으로써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조선이 울릉도․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정기적으로 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수군을 보냈던 문헌기록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울릉도․ 독도 수토연구에 귀중 한 1차 사료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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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우선은 조선후기 울릉도 搜討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현황의 사실 관계와 제도적 정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울진 지역의 수토 관련 越松浦鎭城과 待風軒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토사가 그려 온 울릉도 지도 및 대풍헌 현판 등 자료에 대한 연구나 사료에 대한 해제 등도 있으나 수토사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관련 유적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수토사 관련한 유적지를 연구하였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울릉도 수토 관련 유적지는 삼척 수군 관련 유적지, 수토 수행과정에서의 대풍소나 祭儀 神堂, 수토에 참여한 인물 관련 유적지, 기타 관련 유적지가 있는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척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삼척포진과 관련된 유적지인데, 이와 관련하 여서는 軍船을 정박시키는 포구였던 삼척포와 수군의 각종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 고 첨사가 군관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던 삼척포진성이 그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수군진성의 하부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둘째는 삼척에서 울릉도로 항해하는 과정과 관련된 유적이다. 삼척에서 출발하는 수토군들은 먼저 모든 장비를 갖추고 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적당한 바 람이 불 때 바다로 나가서 출발하였는데, 이 때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소와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제사를 곳이 있었다. 특히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의 삼척부 지도를 보면 삼척수군진성으로부터 오십천 건너편 고성산(오화리산성이 있는 곳) 근처에 붉은 선 안에“東海”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동해신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삼척의 수토 관련 유적으로는 후망소, 수토사 인물 유적, 울릉도 유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는 동안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임시의 거처를 만들고 바다를 감시해야 했는데, 그러한 후망소가 어느 곳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는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선박이 표류할 경우 동해안 지역에서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며, 대풍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후가 있었다고 하는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그리고 『陟 州志』(上)에 바닷가의 망대인 海汀候望으로 기록된 介谷, 宮村, 馬頭, 窟岩, 龍場 이 그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을러 고려시대에 삼척 지역에 설치된 戍所 인 桐津戍․臨遠戍가 있던 곳도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곳도 후망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토를 수행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혹은 유물)는 삼척지역에서 현재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이 없다.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장한상은 경북 의성에 묘가 있고, 이준명은 경기도 성남시에 묘가 있으며, 구억은 충남 공주에 묘가 있다. 여타의 수토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 삼척첨사의 관련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육향산에 있는 삼척영장송덕비 가운데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삼척영장 송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월송포 만호가 수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월송만호의 上官은 삼척영장이었기 때문에 삼척영장송덕비 자체는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울릉도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며 수토 임무를 행한 삼척사람 김인우의 유적은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선양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울릉도에 소재하는 수토 관련 암각문이나 표석, 김인우와 관련된 태하리 성하신당 등도 관련 유적지에 해당하나 본 논고에서는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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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척영장은 1672년(현종 13)에 신설되었다. 신설 당시 삼척영장은 전임 영장이 아니라 삼척첨사가 겸임하는 영장이었다. 그 후 삼척영장은 1673(현종 14)년에 영동지방 토포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삼척영 장이 삼척포진 主將의 본직이 되고 삼척첨사는 겸직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삼척영장은 전담 무신이 파견되는 전임 영장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삼척첨사 자리는 폐지되었다. 비록 정조 대에 들어와 삼척첨사 자리가 복구되었지만 삼척영장이 겸임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그 후 고종 대에 들어와 울릉도첨사가 삼척영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삼척영장은 다른 지방 수령에서 옮겨온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삼척영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약 12.9개월이었다. 삼척영장이 떠나게 된 사유는 다른 관직으로의 이동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대부분 오위장 ․ 금군장 등 중앙 관직으로 옮겨갔다. 이를 보면 삼척영장 자리는 지방 관직에서 중앙 관직으로 옮겨가는 중간 통로였다고 하겠다. 한편 삼척영장은 월송만호와 함께 교대로 울릉도 수토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울릉도 수토 관리가 인삼 채취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던 시기에는 오직 삼척영장만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울릉도 수토 업무를 담당한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공식적인 직함은 搜討官이었다. 하여튼 조선후기 삼척영장은 영동지방의 지역 방위와 치안 유지 그리고 울릉도를 비롯한 동해 바다 방어를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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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3.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제도는 안용복사건으로 1694년 시작되어 1894년 12월 종료될 때까지 201년간 조선 중앙정부의 깊은 관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왔다. 본 논문은 수토의 주기성을 파악하기 위해 사료, 수토기, 각석문, 울릉도도형, 대 풍헌자료, 문집 등을 검토하여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울릉도 수토가 이루어진 해와 횟수를 파악해 보았다. 숙종 때는 7회(1차~7차)의 울릉도 수토가 있었고, 1697~8년, 1708~10년, 1717~8년 등 7회의 수토정지가 있었으며, 삼척영장의 수토까지 3년 1차 윤회수 토가 이루어졌다. 경종 때는 한 차례의 수토(8차)가 있었다. 영조 때는 1745년 월 송만호 박후기의 수토(14차)까지는 3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고, 1747년 삼척 영장의 수토부터는 2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다. 영조 1년부터 21년까지 3년 1차 윤회수토 6회(9차~14차), 수토정지 5회가 있었고, 영조 23년부터 50년까지는 2년 1차 윤회수토 14회(15차~27차), 수토정지 3회가 있었다. 숙종 20년부터 영조 50년까지 27차에 걸쳐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울릉도 수토제도의 운영은 1,500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를 생활 공간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연안주민들의 생활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울릉도 수토제도는 독도에 우리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 영유권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201년간 수토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조 즉위년부터 고종 31년(1894년)까지의 분석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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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축성된 월송포 진성은 1970년대까지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70년대 이후 주변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월송포 진성의 남쪽 일부가 울진군에서 추진하는 망양-직산간 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됨으로 인하여 추진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문지, 우물 등이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진성은 해안에 접한 해안평탄면에 형성된 사구의 남쪽 말단부에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으로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천연의 해자를 이루는 형태이다. 이는 인접한 울진포영 및 남해안 일대에 위치하는 영ㆍ진ㆍ보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성벽은 후대 교란으로 인하여 동쪽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지적도상의 지번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지적도를 참고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둘레 328.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와 문헌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3.1~4.7m 정도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다. 성벽의 안쪽 에는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우물이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 안쪽으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풍경화에서 보이는 문루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월송포 진성은 인접한 대풍헌의 현판과 『조선왕조실록』등을 통하여 삼척영과 함께 3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울릉도 ․ 독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사건을 계기로 1694년 처음 시작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토사의 출발지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으로 파견되는 관계로 초기에는 삼척부의 장오리진, 울진현의 죽변진, 평해 군의 구산포 등 수토관의 위치와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구산포로 고정되었다. 이는 동해의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울릉도과 가장 가깝고, 항해에 해류와 해풍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산포임을 파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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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일본에서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근거로,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과 1403년 조선의 울릉도 주민쇄출은 조선에서 독도를 포기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대로 울릉도에서 주민을 쇄출하여 울릉도를 무인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인화의 이유는 울릉도가 동해안 왜구침탈의 중간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무인화이후 우산무릉등처안무사 와 순심경차관을 파 견했고, 조선후기에는 수토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했다. 최초의 수토사였던 장한상의 기록은 『울릉도』와 『울릉도사적』에 상세하다. 이 기록들을 통해 울릉도 수토계획 및 목적, 구체적인 수토내용, 수토당시의 독도확인과 왜에 대한 경계 등을 알 수 있다. 수토제의 시작은 안용복 피랍사건이후, 왜인의 울릉도 침탈을 막기 위해,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진을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실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주민의 울릉도 이주가 어렵게 되자, 수토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울릉도』나 『울릉도사적』의 내용 중에 울릉도에서 대관령이 보이고, 동남쪽으로 섬이 보인다는 기록을 통해 그 섬이 독도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기술의 허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가 조선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실시했던 제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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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 후기 정기적인 수토제(搜討制) 실시는 1694년(숙종 20) 장한상(張漢相)의 울릉도 수토로 시작되었다. 수토사(搜討使)들은 자신들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각석문(刻石 文)을 남겼는데, 수토(搜討)의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증거이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울릉도 수토 각석문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 략적인 현황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수토 각석문의 조사와 연구 현황을 종 합하여 비교·검토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각석문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동시에 그 특징을 살 펴보고자 하였다. 1711년(숙종 37) 박석창(朴錫昌)이 남긴 ‘울릉도 도동리 신묘명 각석문’은 수토제 시작 후 불과 17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가 남긴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에도 같은 내 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그의 울릉도도형에는 ‘각석입표소(刻石立標所)’를 표시하였는데, 이 표시는 이후 제작된 조선 후기 지도에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박석창의 각석문은 현재 까지 남아있는 울릉도 수토 각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일뿐만 아니라 울릉도 수토 각석문 중최초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울릉도 수토 각석문은 크게 8개로 볼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1700년대 2개, 1800년대 5개, 1900년대 1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서로 다른 14명의 각석 문으로 나눌 수 있다. 지역별로는 서면 태하리에 4개 8명, 울릉읍 도동에 3개 4명, 북면 현포 리에 1개 2명의 각석문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총 4개 7명의 각석문으로 발견된 수의 50%에 지나지 않는 다. 울릉도의 개발 등으로 행방불명되거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각석문이 다수가 존재 한다. 또한 울릉도 주민들의 증언에는 각석문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고 있으므로 추가적인 각 석문이 발견된 가능성이 있다. 울릉도 수토 각석문에는 수토관(搜討官)뿐만 아니라 수토사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사람들의 직명(職名)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석문에 남아있는 직명 등은 문헌 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수토사의 규모나 구성 등을 파악하게 해 줄 것이다. 각석문은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와 독도 수호 노력의 직접적 증거이므로 이에 대한 추가 조사 및 종합적 인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11.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지금까지 울릉도 수토에 관한 각종 사례를 종합하고 누락된 수토 사례를 추정하여 울릉도 수토의 지속성과 빈번함을 확인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울릉도 수토 자료에 나타나는 울릉도 특산물 이용 형태를 통해서 조선 후기 사회의 울릉도 인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확인된 사례와 추정한 사례를 통해서 1694년부터 1894년까지 최대 84회의 울릉도 수토가 시행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지속적인 수토와 울릉도 특산물의 우수성 때문에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의 특산물을 이용하였고, 연안 백성들은 매년 울릉도로 항해하여 울릉도 특산물을 배 한가득 채취하였다.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는 연안에서 출발하는 많은 배들이 울릉도로 항해 함에 따라 울릉도는 이들 연안 백성들의 생활권이 되었다. 독도는 울릉도의 시각공간 안에 있다. 따라서 독도는 좁게는 울릉도 생활권에 속하면서, 넓게는 연안의 생활권에 속하게 된다. 앞으로는 연안 백성들과 울릉도 및 독도와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12.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19세기에 조선정부가 울릉도 통치의 일환으로 실시한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하여 기존 연구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재정리하고, 새로 확인된 수토 사실들을 보고하여 목록에 추가하며, 향후 수토 연구의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기존의 수토 연도 목록을 검토하여 수토 연도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9개의 연도를 목록에서 삭제하고, 새로 확인한 1849년 이규상의 수토, 1853년 석충선의 수토, 1855년 이원명의 수토, 1873년 월송만호의 수토, 1879년 월송만호의 수토, 1883년 안영식의 수토 등은 목록에 추가하였다. 19세기 울릉도 수토는 약간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가 영토관리 차원에서 수토제를 통하여 울릉도를 잘 다스려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울릉도 수토 연구의 방향은 이양선 및 표류 관련 연구와 연계하여 수토 연구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다양하고 많은 수의 수토 사례와 연관시켜 연구함으로써 조선 정부의 통치행위로서 수토의 전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