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남한지역을 대상으로 전기청동기시대의 주거와 환호, 청동기 부장 분묘, 대형 주구묘와 군집묘의 형성, 청동기 소유 주거, 환구 취락의 조성과 운영 등에 주목하여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해서 검토한 글이다. 주거공간에서 확인되는 주거 간의 차별화는 취락을 이끄는 지도자 또는 유력자 및 그 의 가족들과 나머지 취락 구성원 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내환호와 외환호를 경계 로 배치된 대형 주거와 소형 주거의 분포 양상을 갖는 환호취락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청동기를 소유한 주거의 존재와 청동 무기를 부장한 분묘의 등장은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긴장, 갈등, 대립 관계의 산물이면서 당시 사회의 계층분화적, 무장적 성격을 반영한다. 신성한 의례 공간인 환구, 그리고 이와 관련한 대형 가옥의 배치 양상은 엘리트 제사장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전기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는 상위계층과 일반계층으로 구성 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위계층은 취락의 지도자(권위자)이면서 제사장의 성격을 가지는데, 이 상위계 층의 지위는 한시적인 성취 지위에 해당한다. 남한지역의 전기청동기 사회는 복합사회로 향해가는 긴 여정에서 중요한 기폭제가 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전 시기에 보이지 않았던 환호와 환구, 분묘와 청동기의 등장과 발전 양상은 전기청동기시대가 사회복합도가 증가한 서열사회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 해준다.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미사리ㆍ가락동ㆍ역삼동유형이 일정 기간 병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세 유형 간 접촉 형태를 분류하고 시간에 따른 문화접촉의 변천 및 전개 양 상을 살펴보았다. 유형 간 접촉 형태는 크게 A, B, C, D의 4가지 타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A 타입은 서로 다른 유형의 요소가 유물 단위에서 결합되어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와 달리 B타입은 특 정 유형의 취락 내 타 유형의 유물이 개별 기종으로 유입되는 경우이며, C타입은 타 유형의 주거 양 식이 유입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A+B, A+C, B+C와 같이 복수의 접촉 타입이 조합되어 나타 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D타입으로 설정하였다. 문화접촉의 종류로는 교환, 이주, 전파가 있으며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세 유형 간 접촉 타입 도 이러한 틀에서 해석할 수 있다. B타입의 경우 도구의 교환, AㆍC타입은 타 유형 주민의 이주까지 도 상정 가능하다. 각 타입이 복수로 나타나는 D타입의 경우에 대해서는 보다 지속적인 접촉 또는 직 접적인 이주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단계별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유형 간 문화접촉의 전 개상을 살펴보면, 우선 세 유형이 호서지역 내 유입되는 1단계부터 상호 간 교환ㆍ이주 등의 접촉이 나타난다. 2단계에는 가락동-역삼동유형 간 접촉이 증가하는 한편, 미사리유형은 쇠퇴하면서 주변 가락동유형 취락으로 유입되는 양상이 일부 관찰된다. 이후 3단계에는 미사리유형이 소멸하고 가락동 ㆍ역삼동유형도 쇠퇴하면서 전기 유형 간 접촉 흔적이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방형계 주거지는 당시 사회의 가족 구성의 결과물이며, 그 형태적 변이는 가족 의 발달과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세)장방형 주거는 복수의 방형(단위)주거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단위주거는 핵가족의 주거공간이라는 추정 또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장단비가 시간성을 반영한다는 관행적 판단에 기초하여, 한 유적에서 공존 하는 장방형 주거지와 방형 주거지의 관계를 단지 시기적 차이로 해석함에 따라 주거의 변이에 대한 여러 요인―가족의 발달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화, 주거의 사용(신축과 증ㆍ개축)과 폐기 등―의 이 해를 저해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 유적들의 양상을 분석한 기 초자료를 바탕으로 가족 형태와 가구 양상 변화를 연결할 수 있는 고고학적 설명모형을 통해 가구발 달주기에 대한 인식이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의 역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주거지 간 중복양상이나 절대연대가 모호한 상황에서 주거지 평면 형태에 주목하는 기존의 편년관 안에서는 한강 하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 양상을 역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결합주거지를 고정된 문화적 실체로 파악하고 주거의 형태 차이를 양식적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가 족의 성장에 따른 주거 규모의 변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상정해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통해 당시 취락사회의 성장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전기의 이른 단계에 소규모 취락단위로 이주해온 집단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 화전과 같은 농경방식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안정적으로 취락을 유지하고 자원예측성을 높이기 위해서 농경에 대한 의존도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취락의 규모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지역의 전기 유적에서 확인되는 탄화미 등의 자료로 보아, 당시에 벼재배는일반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천안 백석동 취락의 규모와 구조로 볼 때 수전의 경영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았다.
당시의 소규모 취락의 경우, 주변의 취락사회와의 관련 없이 단독으로 영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며,주변의 취락사회와의 상호관련성을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 취락사회의 안정을 얻고 생태적·사회적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개별 취락조직의 확대를꾀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대형취락들은, 일정한 공간적 거리를 두고 분포하는데,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글은 가락동유형의 중심시기인 청동기시대 전기를 이분 또는 삼분으로 나누는 틀에서 탈피하여 세분된 편년을 기반으로 한 개별취락의 미시적 분석결과를 통해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과 정을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상을 지역적으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미호천유역의 취락은 초현기의 양상이 타지역에 비해 뚜렷하지만 전반적으로 소규모의 단위취락 중심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갑천유역은 최초 용산동취락을 중심으로 국지적인 형성을 나타낸 이후 재지화되면서 주변으로 확산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단위취락과 중위취락으로 발전하게 되며 4단계에 최대 성장기를 나타낸 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대부분 5단계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지만, 6단계에도 중층의 구조를 갖는 관저동취락에 결집하여 상위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 중류역은 2단계부터 상위취락인 송담리를 중심으로 취락의 본격적 성장이 확인되는 점이 타 지역과 비교되는 특징이다. 3단계에는 취락 성장의 균질성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며 외부로부터 파급된 문화가 금강유역 전역에서 재지화되는 시점으로 파악되는데,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대부분 중위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취락별로 성장의 동력이 분산되지만, 4단계에 이르러 상위취락인 송원리로 다시 집중된다. 송원리취락은 이후 6단계에 이르기까지 상위취락을 유지하는데, 특히 금강유역 일원에서 전기의 취락 대부분이 쇠퇴하는 6단계에서도 송담리와 함께 상위취락을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전기 마지막단계에는 취락의 영역이 축소되어 주거밀도가 높아지는데, 상위취락을 유지하는 송원리취락 등의 공간범위가 직경 약 150~200m 정도이며, 갑천유역의 6단계 상위취락인 관저동취락도 직경 150m의 공간범위이다. 이와 같이 취락영역이 줄어드는 점은 대외적 취락 영향력의 감소가 예상되지만, 오히려 취락내 구성원간의 유대감과 동질성의 향상을 통해 효과적이고 집중화된 취락의 운영이 가능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본고는 경기지역의 청동기시대 취락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자료를 정리하여, 유적의 시기별 편년을검토하고, 이에 맞는 주거지의 배치를 통하여 취락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중부지방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시기적 구분은 조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 안과, 전기(전·중·후), 중기(전·중·후), 후기로 나눈안으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두 구분 모두 토기문양과 유물의 조합을 기준으로 나누는데 있어서 큰 차이점은 없지만, 후기를 점토대토기단계로 인정하는 것은 공통점이며, 돌대문토기 단계를 조기로 인정할 것인의 여부, 구순각목공렬토기의 중기여부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본고는 토기문양의 계기적 변천과정이 잘 나타나는 후자의 안을 기준으로 시기적 특징을 살펴보았으며, 시기별 주거지 배치관계도 살펴보았다. 전기취락의 구조는 정상부의 능선을 중심으로 구축하였고, 계획배치 형태보다는 주거지간의 공간확보차원에서 조성되었고, 중기에는 구릉사면에 집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후기에 들어서서는 외곽으로 배치되고 있는 특징이 확인된다. 이는 중기중반이후에 인구가 줄어드는 양상과도 부합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한편, 중기에 분묘가 확인되기 시작하는데, 집단묘보다는 소규모로 조성되는 현상이 간취되는데, 이는 분묘공간의 확대로 정의될 수 있으며, 농경과도 연관된다. 대형 및 중형취락의 기준에 대해 살펴본 결과, 김포 양촌, 소사동, 토진리·양교리 주변 일대 유적을 대형취락으로 판단하였다. 특히, 소사동유적은 전기~중기에 걸쳐 시기별로 고른 분포를 보이면서,마을이 운영된 점이 돋보이며, 양촌리, 토진리·양교리 주변 일대 4개유적은 중기에 집중된 유적으로,유적 상호간의 거리가 근접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한단위의 취락으로 판단하였다. 경기지역 청동기시대 취락의 시기적 변천은(물론 지역적 변천은 인정하며), 중기전반에 가장 취락의 규모가 융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전기에 있어서 평택 소사동유적과 같은 규모가 큰 유적도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중기전반에 규모가 최정점을 이루다가 중반이후로 규모가 쇠퇴하기 시작하는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발굴의 증가로 돌대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조전기 주거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 돌대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조기는 돌대문토기 뿐만 아니라 이중구연토기, 거치문토기, 공렬문토기 등이 함께 확인되고 있어, 이를 이른 시기의 양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남강유역에서도 이러한 토기들이 돌대문토기와 공반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돌대문토기와 형태가 유사한 폭이 좁은이중구연토기가 확인되었다. 이 이중구연토기와 돌대문토기는 서로 공반하기도 하고, 단독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남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성립기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이다. 즉, 돌대문토기만을 중심으로 하는 단독기의 설정이 가능한지, 혹은 돌대문토기를 비롯한 이중구연토기, 거치문토기, 공렬문토기 등을 포함하는 조기의 설정이 가능한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개별주거의 분석과 함께 돌대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토기의 편년을 진행하였다. 주거지와 유물의 편년을 통해 남강유역의 조전기주거지는 4단계 2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ㆍ2단계는 돌대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a를 중심으로 하는 남강유역 Ⅰ기로, 기존의 조기와 전기를 포함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1단계에는 돌대문토기가 중심이고, 향후 신석기시대와 관련된 양상이 확인될것으로 판단한다. 2단계는 돌대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a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남강유역에 유입되면서 정착해 가는 시기로 보인다. 3-4단계는 이중구연토기bㆍc와 구순각목문, 공렬문을 중심으로 하는 남강유역 Ⅱ기로 설정 할 수 있다. 기존의 전기 전반 일부와 전기 후반을 포함하는 시기이다. 가락동식토기가 출토되는 3단계는 주거지의 수적 열세가 있고, 2단계와 주거지에서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돌대문토기가 소멸된다는 점에서 1ㆍ2단계와는 구분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4단계는 흔암리식토기가 다수 확인되고, 이중구연이 흔적으로만 남아 공렬문만 시문되거나 단사선문만 시문되는 경우로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거지의 소형화와 함께 나타나는데, 공렬문이나 구순각목문, 구순각목공렬문의 비중 또한 점점 높아진다.
중서부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의 기둥배치, 노지, 저장공, 출입구와 같은 내부구조를 파악하여문화상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가락동식과 역삼동식 주거지가 노지형태 차이에 의해 구분되는 것과 같이, 주거 내ㆍ외부 구조도 차별된다. 가락동식 주거지는 ‘주심도리+이열-도리ㆍ보식 구조(Ⅰa)’의 우진각형(또는 팔작형) 지붕이며, 역삼동식 주거지는 ‘주심도리식 구조(Ⅲa)’의 맞배형 지붕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상부구조의 안정성이 장점이지만 증축이 상대적으로 힘들고 목재 사용량이 많은 단점을 가진다. 후자는 증축에 매우 용이하지만 지붕 하중을 견디기에는 다소 불안정하다. 따라서 두 형식의 주거는 장ㆍ단점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취락별로 선택 채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두 구조의단점을 보완하는 점에서 ‘중앙 초석 또는 주열 구조(ⅡㆍⅢcㆍⅢd)’가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주거의 기둥배치는 선호된 열(도리)×행(보)의 간격이 존재하고 있어, 칸(間)의 개념과 함께 목조건축 기술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벽체는 주심구조에서 판재형 나무를 사용한 형태로바뀌며, 이는 목재가공과 결구 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노는 소형이 주거 안쪽에 설치되고, 중ㆍ대형이 출입구와 인접한 공용공간에 위치한다. 소형은 취사와 난방에 모두 사용되는 노의 기능 가운데 취사에 효율적이며, 난방이 필요하지 않는 시기의 제습과 조명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저장공은 노 반대편인 출입구 주변에 밀집 분포하며, 저장량은 식량자원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겨울과 초봄 정도만 소비할 정도로 여분의 잉여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 내부구조는 취사공간, 공용공간(작업ㆍ식사ㆍ취침), 저장공간, 출입구 등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생각된다.청동기시대 전기 대형주거지는 단독 출입구, 집중된 저장공, 노의 사용으로 보아 ‘공동생산ㆍ공동소비’가 이루어진 사회경제 체제로 판단된다. 이후 주거가 소형화되고 내부 저장공이 점차 소멸해 가면서, 생산ㆍ분배ㆍ소비ㆍ잉여 재분배 등과 같은 사회경제 체제가 다각적으로 변화하였다.
호형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토기로 그 생김새와 체적이 다른 토기에 비해 특징적이어서 저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호형토기는 출토량이 많지 않고 완형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드물어 그동안 연구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보조 자료로써 활용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호형토기를 주체로 하여 속성을 분석하고 형식을 분류하였다. 그리고 각 형식과 공반유물을 통하여 단계를 설정하였으며, 단계에 따른 변화상을 용량의 변화상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호형토기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알아보았다. 호형토기를 각 크기에 따라 변화양상이 다르다고 판단하여 대·소로 구분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각 크기에 따라 속성을 분석하고 형식을 분류하였다. 그 결과, 대형에서는 동체형태에 따른 변화상을 확인하였고, 소형에서는 구연형태에서의 변화상이 시간적 흐름에 더 민감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과를 용량분석과 종합하여 보았을 때, 소형토기는 단기저장용기로, 대형토기는 장기저장용기로서의 기능을 지녔다고 상정된다. 청동기시대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가 분화되고 핵가족화 되는 과정에서 장기저장용기는 동체형태의 변화를 통해 용량의 변화를 보이며, 단기저장용기는 구연형태의 변화를 통해 기능적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즉, 호형토기 형태의 변화는 용량의 변화로 연결되며, 이러한 용량의 변화는 곧 사회·경제적 변화를 보여준다.
호남지역의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아직까지 조사예가 많지 않다. 그러나 최근 자료가 증가하고 있고, 유구의 밀집도는 떨어지지만 호남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호남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미사리유형을 비롯하여 가락동유형, 역삼동유형, 흔암리유형 등이 모두 확인된다. 이들 각 유형은 분포양상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미사리유형은 현재 순창 원촌과 담양 태목리에서 확인되었으며 미사리유형의 한 요소인 미사리식토기는 익산 영등동, 섬다리에서도 확인된다. 가락동유형은 대체로 북서부지역과 중서부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나, 중부내륙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은 북서부지역과 중서부지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대체로 동부내륙과 동남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중부내륙지역에서도 확인된다. 호남지역에서 조사된 전기유적은 주거지와 출토유물을 통해 모두 3기로 분류하였다. Ⅰ기는 각목돌대문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미사리유형과 이중구연단사선문을 특징으로 하는 가락동유형으로 미사리유형은 동부내륙의 순창 원촌유적에서 확인되며, 가락동유형은 북서부지역과 중부내륙지역에서 확인된다. Ⅱ기는 가락동유형이 북서부지역은 물론 주변지역으로 확산되고 새롭게 역삼동유형과 흔암리유형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가락동식토기는 이중구연의 요소가 퇴화되지만 아직까지 이중구연의 요소는 남아 있다. Ⅲ기는 (세)장방형 주거지의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방형으로의 평면이 정형화된다. 전기의 특징적인 노지는 설치되지만 Ⅲ기 후반의 가장 늦은 단계에는 일부 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원형 송국리형주거지가 등장하고 그 영향으로 방형주거지에 설치된 노지가 사라지고 원형 송국리형주거지의 특징인 타원형구덩이가 설치되는 등 주거지의 변화가 확인되고 토기의 문양은 대부분 사라지고 무문화된다. 그러나 동부내륙지역과 동남해안지역과 같이 일부지역에서는 역삼동식토기의 특징인 공열문 요소가 늦은 시기까지도 지속된다.
금강 중류역의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일반적으로 가락동유형으로 대표되어왔다. 이 지역에서 가락동유형은 둔산식 주거지와 가락동식토기를 표지로 한다. 둔산식 주거지는 과거 둔산식-용암Ⅰ식-용암Ⅱ식으로 분류하였으나 최근의 조사 자료를 재검토하여 세분된 분류안을 제시할 수 있다. 가락동식 토기와 기타 공반된 토기의 문양요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락동식토기 고유의 문양요소는 출현과 소멸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주거지의 변화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최근 이 지역에서 기존의 가락동유형과는 다른 양상의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유적이 조사되었다. 대평리유적은 충적지에서 취락이 조사되었는데 미사리유형의 취락으로 판단된다. 대율리유적은 환호취락으로서 그 성격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 외에 일부 유적에서도 가락동유형과 다른 성격의 주거지가 조사되어 금강 중류역 청동기시대 전기 문화는 이제 다양한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가락동유형의 취락은 지형적으로 구릉의 평탄면에 입지하며. 하천과의 관계속에서 볼 때 주로 2차 하천의 주변에 위치한다. 취락의 형태는 취락지리학의 성과를 참조하여 (단독·분산)점상취락-면상취락으로 구분한 후 각 유적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금강 중류역의 가락동유형 취락은 세대공동체 중심의 소취락을 기본구조로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역별 변천상을 통해 중대형 취락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확산되고 시간에 따라 취락의 분포상도 증가함을 알 수 있으며 형태는 점상취락에서 면상취락으로 변화된다.
전기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유구와 유물의 분석을 통한 편년, 그리고 주거지를 대상으로 한 취락연구가 주를 이루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별적인 유구분석과 연구는 주거지에 국한되어, 주변에서 확인되는 수혈유구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이 적고 구조를 밝힐 수 있는 시설도 없어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러나 수혈유구는 취락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변화하며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수혈유구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오면서 기능 뿐 아니라 유구자체, 입지와 취락 내 위치, 그리고 분포 양상 등에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전개되어 나간다. 초기에 발생한 수혈유구는 신석기시대 저장공과 유사하게 저장의 기본적인 기능을 갖지만 점차 취사 및 의례 등의 여러 기능을 동시에 갖게 된다. 평면형태와 내부시설은 방형의 노지가 설치된 수혈유구에서 원형의 무시설식 수혈유구로 변화하면서 깊이 또한 점차 깊어지게 되고 후기의 송국리형 저장공으로 대표되어 간다. 입지에서도 변화의 양상이 파악되는데, 구릉의 정상부에서 점차 사면부 및 곡부로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이와 함께 주거군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위치하다 점차 주거군의 외부, 즉 취락의 외곽에서 수혈유구는 군집되어 설치된다. 이러한 변화는 취락의 구조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하며 사회경제적 의미의 변화도 반영함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이며 임시적인 구조물의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취락 내 중요위치를 차지하며 공공재의 성격을 띠어 나가게 되면서, 전문적 관리자의 등장을 초래하고 이로 인해 계층화의 발생도 일어나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이 논문은 남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의 상한과 하한을 검토한 편년연구이다. 먼저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은 조기(미사리유형)-전기(미사리유형,가락동유형,역삼동·흔암리유형)-후기(송국리유형,역삼동유형,북한강유형,검단리유형)의 3단계로 나누었다. 전기단계는 조기에 이어지는 미사리식토기의 존속, 여기에 가락동식·흔암리식·역삼동식토기가 사용된 시기이며, 마제석검과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이와 함께 취락구성에 있어서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의 대형주거가 중심을 이루며, 정형화된 분묘와 환호취락의 등장 역시 전기청동기문화의 주요 구성요소에 해당한다. 특히 비파형동검을 모방한 혈구이 단병식마제석검이 성행한 점에서 비파형동검문화기로 볼 수 있으며, 마제석검만 존재한 선동검기와 비파형동검기로 세분된다. 전기 청동기문화의 상한은 미사리식·가락동식·역삼동식토기 등이 지역성을 보이는 기원전 12~13세기로, 하한은 역삼동식토기가 주체를 점하는 시기로서 기원전 9~10세기로 추정된다. 한편 이와 같은 절대연대는 동아시아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기년명자료와 공반유물의 검토를 통한 비교연대 연구를 병행하면서 검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