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인 지석묘를 검토하여 시기별 전개와 전환기 양상을 살펴보았다. 청동기 시대 전기에 무덤이 출현한다. 지석묘와 석곽묘, 토광묘가 축조되며, 단독 혹은 군집 내 독립되어 있 거나 군집 내 위치한다. 지석묘의 경우 개석식이며, 개별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다. 유물은 상징성을 가진 비파형동검, 석검, 부장용 토기류, 삼각만입촉, 일단경식석촉, 옥류가 출토된다. 중기에는 지석묘 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다양한 평면 형태를 가진 묘역시설이 있다. 한 묘역 에 1기 석실만 있는 묘역, 한 묘역에 4~6기 석실이 있는 묘역, 2개 혹은 그 이상의 각 묘역이 서로 잇대어 조성된다. 더불어 지석묘가 군집화된다. 수십 기 또는 백여 기가 넘는 대군집을 이루는 지석묘 가 확인된다. 유물 부장에 있어서도 전기 전통을 계승하지만 동시에 차별성을 보인다. 후기에는 지석묘 석실에서 초기철기시대 유물이 부장된다. 거대한 묘역 내 1기 혹은 2기 이상의 석실이 있거나 다단 토광으로 축조된다. 초기철기시대와 상당 기간 공존하며, 청동기시대 문화가 쇠 퇴하는 과정에서도 일정 기간은 묘제로써 권위를 유지하였다. 청동기시대 이후 새로운 무덤인 토광묘는 전남지역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출현한다. 토광묘에 는 청동 유물이 수습되며, 철기 유물이 등장한다. 이를 통하여 지석묘 사회가 완전히 종착된다.
이 글은 전남지역에서 발굴조사 된 상징 지석묘에 대해 상석의 특징, 입지, 성격 등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상징 지석묘는 지연집단이나 혈연집단들이 그들의 상징적인 기념물로 축조된 지석묘로 제단 또는 묘표석이라 부르던 것을 포함하는 지석묘의 총칭이다. 외형상 웅장하고 주위 지석묘와는 뚜렷이 차별화된 상석을 가지고 있으면서 석실이 발견되지 않는 지석묘로 보았다. 이러한 지석묘는 기반식 지석묘와 함께 탁자식 지석묘가 있다. 전남지역에서 발굴조사 된 탁자식 지석묘는 상석이 100cm 이하로 얇은 편으로 단독입지보다는 군 집에 포함되어 존재한다. 이러한 탁자식 지석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무덤 기능을 하였음을 하 부구조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형지석을 포함한 기반식 지석묘로 제작된 상징 지석묘는 수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상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상징 지석묘의 상석은 단면형태로 볼 때 방형 또는 타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구분된다. 또한, 외형상 두께가 강조된 것, 너비를 강조한 형태, 길이· 너비·두께 모든 요소를 강조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상징 지석묘는 단독으로 있는 것도 있지만 군집 묘역 어느 한쪽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거나 묘역 중앙에 위치한다. 지형적으로는 다른 군집보다 상대적으로 위쪽 또는 아래쪽에 위치한다. 군집보다 위쪽에 있을 경우는 상징적 의미, 군집보다 아래쪽에 있을 경우는 묘표석 의미가 좀 더 강하게 부여된 된 것으로 보았다. 단독입지는 구릉 또는 평지에서 주변을 관망하기 좋은 곳에 위치한다. 묘표석 또는 제단적 성격이 강하며, 일부 매장주체부가 확인되는 경우는 가매장 시설일 여지가 있다. 군집 중앙은 지석묘 군집배치가 열상일 때 많이 확인된다. 군집 중앙에는 유력자 또는 상징적 인물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묘역이 조성되었을 때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독립입지는 열상배치와 군집화된 지석묘에서 볼 수 있다. 다른 지석묘군과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위치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지석묘는 묘역 을 상징하며, 의례적 성격이 짙다. 지석묘 군집에서 가장 먼저 축조되며, 혈연집단과 더불어 다른 집 단이 공동으로 묘역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 논문은 지석묘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고고학계의 관점을 학사적으로 검토하고 함안 분지 안에 분포하는 지석묘군의 매장시설 배치와 입지 및 분포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연구이다. 처음 지석묘 연구자들은 한 시대의 문화적 표지물이나 사회발전 단계의 증거물로 파악해 왔지만 최근에는 일정 경관 내의 기념물로 파악하는 관점이 우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안의 지석묘군은 일상의 주거와 섞이지는 않지만 일상의 주거군에서 멀지않은 장소에 축조되는 경향은 뚜렷하다. 함안분지는 주변 남강유역이나 남해안 분지의 양상과는 다르게 대규모 매장의례의 복합단지가 조성되는 현상이 관찰되지 않는 대신 지석묘가 취락 인근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함안의 지석묘는 선상 배치되 는 양상이 뚜렷하고 그것은 당시 주민이 일상적으로 이동할 때의 교통로를 따라 배치된 결과일 가능 성이 크다. 특히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곡저평야 하천을 따라 선상으로 배치된 상석 열은 수백 년에 걸친 축조와 의례가 반복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상석 한두 개의 존재가 지석묘군의 위치를 말해주는데 상석 아래와 그 주변에는 10~20여 기 내외로 구성된 매장시설군이 분포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러 한 지석묘군이 길면 2km 이상 연접 배치되어 선상의 지석묘 대군집을 형성한다. 각각의 소군집을 매 장의례의 장소로서 공유한 공동체들이 서로 협상하고 협동하여 축조와 의례를 반복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석묘군을 경관 내의 특정한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석묘 가 구축된 장소에는 공동체적 경험과 역사적 서사가 깃들여 있어서 기억을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 특 히 기념물적 건축의 축조, 특정한 의미를 지닌 유물의 매납과 같은 수행을 통해 장소가 만들어지고 건 축물이나 매납물의 물질성에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퇴적되고 오랫동안 역사적 서사가 소환된다. 함 안 분지의 열상배치 지석묘군에는 개인적, 공동체적 경험과 기억들이 퇴적되어 왔기에 역사적 서사들 이 길게 연장되면서 현재의 물질적 흔적이 남아 있는 기념물로 해석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지석묘 축조라는 매장 의례를 공유하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보성강·탐진강 유역 사람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변동의 역동성을 살펴보았다. 보성강·탐진강 유역의 지석묘 문화는 형식과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공시적·통시적으로 동질성을 지니며 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두 유역의 지석묘 축조 공동체는 수세기 동안 공존하며 문화 를 형성하였던 주체였으며, 동일한 사회 변화 과정을 거쳤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미시적 차원에서는 각기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지석묘 군집 유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지석묘군은 배치와 구성을 기준으로, 열상과 비열상의 군집에 위석식지석묘들이 축조된 Ⅰ유형과 열상의 군집, 위석식지석묘만으로 구성된 Ⅱ유형, 비열상 군집과 위석식지석묘들이 군집을 이루는 Ⅲ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Ⅰ유형은 열상의 지석묘 배치로 대변되는 전통적 사회 질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정치 권력의 등장을 차별화하는 한편, 매장 의례 공간을 지속적으로 점유함으로써 공동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던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으로 해석된다. Ⅱ유형과 Ⅲ유형에 나타난 공간 구조는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유력 개인 또는 공동체의 의지와 기념물 축조를 통해 공동체성을 강화하려는 전략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처럼 지석묘 축조 공간은 전통적 사회 구조와 조화를 유지하는 한편, 주도권을 전환하거나 정체성을 새롭게 하려는 사회적 행위가 투영된 장소로 볼 수 있다. 즉, 지석묘군은 사회 구조/행위 간의 변증법적 관계가 상호 순환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Ⅰ유형에서 보이는 사회 변화의 역동성은 자원 확보와 정보 접근에 유리한 공간적 우위가 작 용한 결과로 보인다. 국지적 차원의 가시권과 네트워크 분석 결과, Ⅰ유형은 주변 공동체와의 상호작 용이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고 근접중심성도 높았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 차원에서 네트워크 조직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공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Ⅰ유형 지석묘 축조집단은 이러한 공간적 우위를 배경으로 외래품의 입수와 정보 접근에 권한을 행사하며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석묘는‘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종류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묘제 중 하나이 다. 지석묘의 가장 큰 특징은 분묘축조에‘거석(巨石)’을 채택한 것으로, 분묘의 외형적 형태와 외·내부구 조, 축조방식 등이 신석기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는 지석묘가 단순히 시신만을 매장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분묘자체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기념물이 되는 것이다. 즉, 분묘의 기능이 ‘단순매장’에서 ‘상징적 기념물’로 확대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른 축조과정이나 장송의례 과정도 ‘가족단위’에서 ‘취락단위’의 중요한 행사(축제)로 확대된다. 이러한 분묘양상의 변화는 청동기시대의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며 그 배경은 크게 농경발달로 인한 생계경제의 변화와 대규모취락의 등장, 취락간 네트워크형성, 계층화의 진전 등 사회구조적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상징성은 지석묘의 상징성과 부장품의 상징성으로 구분된다. 지석묘의 상징성은 지석묘를 ‘거석(석재)의 채용’과 ‘기념물적 분묘의 등장’이라는 관점에서 형태, 규모, 배치, 입지, 구조 등을 검토하였다. 기본적으로 주재료인 ‘돌(石)’의 견고성과 영원성을 바탕으로 ‘거석사상’과 ‘애니미즘사상’이 지석묘 상징성의 바탕이 된다. 이와 더불어 ‘상석’과‘ 묘역’은 형태, 구조, 규모를 통해 묘표석, 제단, 교통로 표지석, 농경사회의 기념물, 취락의 경계, 가매장시설 등의 다양한 상징성을 표현한다. 부장품의 상징성은 ‘내세관 및 장송의례’의 관점에서 부장품과 의례품의 관계, 부장품 종류에 따른 상징성 등을 검토하였다. 부장품은 내세를 위한 것이며, 의례품은 분묘축조나 피 장자를 떠나보내는 장송의례 과정에서 사용된다. 이들은 성격에 따라 사용되는 시점이나 기능, 용도, 형태 등이 차이가 난다. 부장품은 대부분 완형으로 피장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시신과 함께 매납된다. 의례 품은 분묘축조 과정의 안전과 피장자를 떠나보내는 슬픔, 부정방지와 정화의 의미에서 행해지며 대부분이 편으로 확인된다. 부장품의 종류는 무기류(비파형동검, 동촉, 동모, 석검, 석촉), 용기류(적색마연토기, 가지 문토기), 장신구(옥)가 중심을 이룬다. 전자는 내세에서의 안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후자는 이를 보조하는 역할로 생각된다. 또한 부장품의 종류나 재료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위계화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계층화의 진전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본 연구는 인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께랄라(Kerala)주와 동남부에 위치한 안드라프라데쉬(AndhraPradesh) 주에 분포하는 지석묘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및 분석결과이다. 인도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외 부의 선진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점과 함께 외세의 문화와 사회적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반도지역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면적, 기후, 생활양식 등은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인도 지석묘를 중심으로 지석묘의 분포, 입지, 형태, 구조 등에 대한 기초적인 고고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검토·분석하여 그 특징을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다. 또한 한국 지석묘와의 상이한 점을 살펴봄으로서 세계사적인 거석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 인도의 지석묘는 주로 남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입지적인 특징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와 완사면에 분포하며, 열상 및 소군집을 이룬다. 형식은 대부분 탁자식 지석묘 이며, 일부 개석식도 확인된다. 축조방식은 암반 위에 축조되기 때문에 암반에 홈을 내거나 석축형태의 장방형 묘역시설을 설치하여 벽석을 고정시킨다. 경우에 따라서 상석 아래까지 묘역을 높게 쌓아올 린 형태도 확인된다. 소군집은 하나의 묘역내에 3-6기 정도가 배치된다. 장축방향은 대부분 같지만 일부 다른 것도 있다. 남인도 탁자식지석묘의 특징은 석실의 평면형태를 ‘卍자형’으로 조립한 점, 한쪽 벽석에 원형의 ‘혼구멍(Port-hole)’을 설치한 점, 주변으로 대형의 판석을 기대어 놓거나 세워 묘역을 설치한 점 등이다. 이는 지석묘의 기본적인 기능인 무덤의 역할은 같지만 축조과정이나 장송의례, 지 석묘의 기능적 의미, 내세관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각 지역의 지석묘 형태나 구조, 출토유물, 분포 등을 비교한다면 대지석묘 분포권을 설정할 수 있으며, 또한 각 지역의 독특한 지석묘문화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지석묘문화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양 지역 간 거석문화의 비교연구는 매우 중요 하다고 할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전남 동남부지역에 분포해 있는 지석묘 연구를 통해 청동기시대 대표 묘제인 지석묘 사회의 변천과정을 파악해 보고자 함이다. 공간상으로는 여수반도와 여수와 접해있는 순천 연안지역, 광 양지역으로 한정하였으며, 연구진행은 지석묘의 군집·입지를 분석을 통해 규모와 분포에 대한 의미를 부 여하려 하였다. 출토유물의 경우 유물간의 공반관계, 부장위치를 통해 부장의미를 파악하려 하였다. 더불어 절대연대를 기준으로 한 지석묘의 변천과 연대를 파악하려 하였다. 그 결과 전남 동남부지역의 지석묘 사회는 다음과 같이 변천된다고 말할 수 있다. Ⅰ기는 지석묘가 처 음 축조되는 시기로 지석묘 문화 형성기에 해당된다. 지석묘는 단장형의 묘역시설을 하고 있으며, 군집내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동검과 마제석검류, 옥류 등 위신제가 많으며, 이 점으로 보 아 인근주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집단으로 판단된다. 더불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Ⅱ기는 지석묘가 활발하게 축조되는 시기로 지석묘 문화 성행기에 해당된다. 군집의 경우가 다양해지 며, 묘역시설을 갖춘 지석묘가 다수를 점한다. 묘역시설은 장방형과 원형이 주로 축조되며, 형태는 Ⅰ기에 비해 정교하지 못하다. 출토유물은 마제석검과 석촉류가 많아진다. 지석묘 주변으로 송국리식 주거지가 다수 확인되며, 이는 임시 주거지로 판단된다. Ⅲ기에서 지석묘 문화 쇠퇴기이다. 묘역시설은 그 전까지 나타나지 않은 집장형 지석묘군이 존재한다. 출토유물은 마제석검으로 심부와 병두부의 차이는 크며, 심부와 병부의 차이가 모호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제석촉의 경우 무경식편평촉이 확인되는데, 전남 동남부지역에서 지석묘가 주된 묘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이 글은 호남지역 지석묘의 형식과 구조에서 탁자식 지석묘, 주형지석의 지석묘, 거대한 상석에 석실이 없는 상징 지석묘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분묘 이외의 기능으로 가매장시설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호남지역에서 발견된 탁자식 지석묘의 특징은 상석이 1m 이상으로 두터워지고, 지상에 드러난 석실 고도 1m 이내로 낮아지며, 단독입지보다는 군집에서 1기씩만 존재한다. 주형지석 지석묘의 특징은 사각기둥형의 지석이 직육면체의 상석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고창과 영광지역에서 성행한 지역색이 강한 형태이다. 주형 지석 4개가 기본이며, 지석간의 거리는 장축이 2.5m 내외, 단축이 1.0-2.0m로 훨씬 넓은 편이고, 상석 상면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호남지역 지석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수 십톤에 이르는 거대한 상석을 가진 기반식 지석묘이다. 이러한 지석묘는 혈연이나 지연 집단의 상징적인 구조물로, 여러 집단들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어떤 상징적인 기념물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지역 내에서 거족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상징 지석묘는 단독으로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군집묘역의 한쪽에 치우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거나 묘역의 중심부에 있다. 지형적으로 계곡 위쪽이거나 약간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문헌에 보이는 고대의 장례습속은 가매장이나 풍장, 가옥에 시신을 보관하는 풍습이 있었고, 오랜기간에 걸쳐 장례절차가 행해졌다. 지석묘에 나타난 가매장시설은 1면의 개폐가 용이한 탁자식 지석묘, 50cm 이상인 주형지석을 한 지석묘, 판석으로 깐 묘역을 가진 대형의 기반식 지석묘에서 확인된다. 이 지석묘들은 상석 하면과 지면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이 마련된 점, 매장시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시신을 보관하는데 충분한 공간이 확보된 점이 공통점이다. 특히 판석으로 깐 중앙부의 규모가장 2m 내외이고, 폭 100cm 내외인 점에 주목된다. 이 공간 범위는 시상대 또는 관대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매장의례가 치루기 전까지 사자의 시신을 목관이나 염습을 통해 일정기간 보관하였던 곳으로 상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김해 율하리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무덤을 중심으로 시신 매장방법에 관해 검토한 것이다. 유적은 주거+저장+분묘+의례공간으로 구성된 청동기시대 후기의 대규모 취락유적으로, 이중 무덤은 총 106기가 확인되었다. 무덤의 종류는 지석묘(개석식 묘역지석묘, 개석식 지석묘), 석관묘(상형석관묘, 석축석관묘), 목관묘, 토광묘, 옹관묘 등이며, 여기에 채용된 매장주체부의 종류도 상형석관, 석축석관, 石+木棺, 목관, 옹관, 토광 등이다. 특히 지석묘의 매장주체부는 석축석관이 주를 이루지만 옹관을 제외한 모든 형식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것은 지석묘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상석이나 묘역을 통해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내부적 속성인 매장주체부는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石+木棺이 사용된 무덤은 최근에 조사예가 증가하고 있는데, 목관이 보다 적극적으로 매장주체부에 수용된 결과라 생각된다. 따라서 목관묘와 토광묘도 다른 묘제들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활발히 조성되었던 무덤형식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단위 유적만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아직 한계가 있지만 확인된 무덤의 수가 많고, 다양한 묘제들과 매장주체부가 복합적으로 출토되기 때문에 한국 청동기시대 무덤 매장방법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