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ik-dong, Kwonnong-dong, Ikseon-dong and Nakwon-dong are areas around Donhwamun-ro in Seoul. These residential areas began to be developed collectively from the 1920s and the construction period was the fastest among hanok residences collectively formed in urban center. At that time, houses were developed with high density. In the 1920s, many medium-sized plots of less than 3,300㎡ were distributed around Donhwamun-ro. Private developers such as Jeong Se-kwon(Konyangsa), Shin Tae-jong, and Yoon Heung-rim, who were active at the time, purchased medium-sized plots. Developers sold out the land directly or after constructing Hanok on the divided plot and then selling them. This method of developing hanok residences by private developers in the 1920s have influenced on hanok residences which began to be developed after the 1930s. Currently, many urban Hanoks still remain in areas around Donhwamun-ro. The initial aspects of the hanok development in the 1920s could be grasped through blocks, plot division, alleys, row house Hanok etc around Donhwamun-r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onstruction industry of Korea from the 1920s to the 1930s by analyzing activities of construction-contractors trying to overcome the recession of the construction industry and intensified competition in the industry. In this paper, I looked at the activities of Hanazono Sakichi as concrete examples. First of all, with the strategy of the vertical integration, by manufacturing and selling building materials, Hanazono Sakichi expanded his company and the scope of contract business. The second, he attempted to diversify related projects. Through related diversification, he seemed to have earned not only land management profit but also advantages from related construction. These aspects were not only seen by Hanazono’s activities but also by other contractors’. On the other hand, a few contractors have taken over a trust company to secure the funds for land management. Attempts to maximize personal interests through the expansion and diversification of contractors' business can be seen as overcoming the pre-1920s environment, where almost construct works were ordered under the government, and creating opportunities for the private sector to work and make profit by themselves. In the end, it can be mentioned that ‘the contractor’ established ‘the construction industry’ through this process.
중국의 현당대 문학사 안에서 1920년대 초의 신문학론과 작품창작은 대체로 이론 발생 후 이론과 어울리는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는 것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에 관한 동시 기적 진술 중에 이와는 다른 맥락의 서술이 존재한다. 이는 중국의 신문학-오사문학-현대문 학으로 이어지는 개념의 발생 당시부터 현재까지 인위적이면서도 강제적인 개념화 작업이 이루어짐에 따라 예외적 진술을 삭제한 결과일 수 있다. 동시에 ‘새로운’ 문학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혁명으로서의 이론과는 충돌하는, 신문학론 자체에 내재 된 중도개 량적 특성이 이론을 구체적으로 응용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본고는 루융헝의 『중국 신문학 개론』에서 보이는 ‘신문학 위기론’을 통해 실제 동시기에도 이에 관한 문제의식이 존재했었음을 서술하였다.
본 논문은 아키발트 모틀리(Archibald J. Motley Jr, 1891-1981)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에 나타난 ‘신 흑인’ 도상을 통해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이다. 모틀리는 동시대 ‘신 흑인’의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구현하며, 할렘 르네상스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모틀리의 명성과 달리 국내에서 그에 관해 이루어진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모틀리의 전반적인 작업경향의 시작되는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을 연구하는 것은 모틀리에 작업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획일적인 흑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도상을 연구하는 작업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모틀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개념에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진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미지를 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주목했다. 또한 다양한 피부색과 개성 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은 정형화된 흑인의 모습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인 종차별에 관한 관념 및 사고들에 관해 재해석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담론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에 대항 하는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화가 조셉 스텔라의 1910-1920년대 작품에 나타난 종교성에 대한 연구이다. 스텔라는 뉴욕의 도시풍경을 묘사한 대표작 <빛의 전쟁, 코니 아일랜드, 마디 그라 Battle of Lights, Coney Island, Mardi Gras>(1913-1914)와 <해석 된 뉴욕 도시의 음성 The Voice of the City of New York Interpreted>(1920-1922)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미래주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스텔라는 산업도시 이외에도 여성 누드, 마돈나, 식물 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으로 풍성한 다작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텔라 작품 연구는 미래주의 시각에서 아주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간혹 정밀주의에서 스텔라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그 관계는 매우 미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텔라의 작품 속에 내포된 의미에 접근해야할 것인가. 스텔라는 1896년에 도미(渡美)하면서 대도시 뉴욕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는 산업적 풍광에서 심미적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느꼈으나, 이내 건물에 가려진 햇빛과 주변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현실은 망향(望鄕)이 깊어지고 내면적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게 했다. 스텔라가 간직한 고향 풍광은 교회종탑이 있었고 이는 그리움과 종교적 근원처럼 그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스텔라는 대도시 뉴욕의 수직적 공간에서 발생한 양가 적 감정을 천상과 소통하려고 하는데 유연한 접근이 가능했다. 스텔라는 브루클린 다리를 본 순간,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통로를 떠올림과 동시에 과거의 대성당이 그 시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처럼 현대 기계시대의 상징물로 보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를 배경 속의 부수적인 역할로 등장시킨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하여 감상자를 신성의 면전에 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미술에 내포된 신성함과 경건함 등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스텔라의 노력은 전형적인 현대 도시, 뉴욕 자체를 묘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스텔라는 거대한 크기의 <해석된 뉴욕 도시의 음성>에서 종교 제단화 구조의 서사적 구성으로 맨해튼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가시화하고 유랑하는 듯이 정신적 체험을 유도할 수 있었다. 1910-1920년대 스텔라의 대표작 속에서 종교성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톨릭 문화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스텔라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톨릭 유산이 나타난 것이자 점진적으로 정신적 통합을 고취시킨 것이다. 스텔라는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세속적 주제와 종교성을 결합하여 캔버스를 정신적 감동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모더니즘 양식에 기초하면서도 정신적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표현하는데 적합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스텔라의 1910-1920년대 뉴욕 이미지를 통해 종교성이 내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스텔라의 작품에 대한 기존 연구가 미흡한 것을 고려할 때 대표 작품을 종교성이라는 주제에서 재조명하고 스텔라 연구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세계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중국 그 어느 도시보다 지식인들이 집결하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상하이의 진보적 지식인은 국제정세 속에 서 중국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었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자연스럽게 상무정 신을 고취하였다. 많은 지식인은 중국 역사와 민간의 전통 속에서 협객을 발굴하였으며 그들 의 상무정신을 찬양하였다. 한편, 상하이는 노동 이주민의 도시였다. 세계대전 후 서구의 자 본이 상하이에 몰리게 되면서 국제도시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상공업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상하이에는 다양한 국가, 인종, 지역민이 모여들었다. 이주민들은 그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업종별, 출신 지역별로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였고, 이들 조직은 조직의 결속을 위해 민 간의 협의정신을 적극 수용하였다. 결론적으로 근대시기 상하이에는 위로는 상류층 지식인의 엘리트문화에서 아래로는 하층 노동자들의 하위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협의정신을 찬양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근대시기 상하이가 지식과 지식인, 자본과 노동자를 끌어들이는 동북아해역의 인문네트워크 중심도시로 성장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1920-30년대 상하이에 협의서사가 흥성하게 된 주요배경이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etermine changes in neighborhoods due to the development of residential districts around Jangchungdan(獎忠壇) altar in Seoul from the 1920s to the 1930s. In the Joseon Dynasty, this area was a protected and sacred area to honor the spirit. The reputation of the area, however, turned into the place to play and take a rest and neighborhoods around Jangchungdan altar were developed as high-grade residential districts with the impression of suburb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sidential districts were formed with the destruction of the Hanyang City Wall and the privatization of nation-owned forest, which were physical and symbolic boundaries of Seoul in the Joseon Dynasty.
A new type of women started to appear in Germany during 1920-1930s and unlike his previous work, Klee began to create works, which related to this new type of modern woman. This paper is a study of Klee’s image of New women in the 1920-1930s, and reflects on Klee’s professional achievements and his perception of these times, based on their social background, which was reflected on the shapes of the ‘New women’ that he portrayed.
The labor power shortage that resulted in the aftermath of the First World War provided women with employment opportunities and they were therefore able to actively contribute to the economy. Klee recognized the fact that the female gender role that had been limited to being a wife and mother at home, changed drastically as women participated more in politics and social activities. This was illustrated by the diverse images and activities of contemporary women in the performing arts, and portrayed in magazines, newspapers, and film.
The liberation of bodies was expressed through dance or gymnastics and the social atmosphere of the time promoted the performances of modern female dancers. Consequently, there was a significant increase in the number of new women who enjoyed dancing and this led to the production of a large number of dance studios and professional dancers. Klee’s images of dancing women shown in his works at the beginning of the 1920s were formed using mysterious and erotic shapes and vibrant lines. However, towards the end of the decade, expressionistic and dark black lines were more prevalent in his dance related works. Clearly repeating straight lines and curves produced geometric and pictorial structures, which expressed perfectly the dynamic motions of dancing women. The 1920s in particular can be said to have been an innovative period of expressionistic dances, and dancers expressed the inner world of human emotions through free movements.
The leaping dancers produced by Klee could also be connected to the gymnastics performed at the Bauhaus. At that time, gymnastics was seen as a link between pop culture and the practice of high class art. Overwhelmingly, many participants in gymnastics were women who embraced pop culture and saw themselves as being popular modern women. During the late 1920s, Klee focused on jumping and shifting shapes while concentrating on the creation of geometric abstraction, which meant that the geometrically simplified shapes lost their concreteness and comprised of crosses of planes. Therefore, the gymnastic rhythms that appeared in Klee’s works emphasized movements based on the geometric body shapes, which were connected to an observance of the participants in physical activities.
울릉도 독도는 6세기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시기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 제국기인 1905년까지 강원도 관할 하에 있었다. 강원도 지역민들은 고대 때부터 육안으로 '울릉도 독도'를 바라보며 '우산국' '무릉도 우산도'라 불러온 같은 생활 권역에 있다. 일제 침략과정에서 울릉도 독도와 지리적, 역사적, 생활문화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던 강원도를 배제하고 부산, 포항으로 해상교통 거점을 의도적으로 바꾸면서 행정의 연속성을 흔들어놓았다. 1906년 행정구역 편제로 강원도 관할에서 경상남도로 이관되었으며, 1914년엔 경상북도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울릉도 독도가 타 시도로 이관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교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고 인식되었는지 1920~30년대 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1920~30년대 동아일보에 실린 울릉도 관련 기사 164건을 대상으로 강원도 부분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분석한 결과 행정 및 민원 관련 기사는 강원도와 무관하였으나 실생활과 역사성을 다룬 기사에서 서술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울릉도 입도 과정, 해상 조난 등 사건 사고, 태풍과 같은 기상, 경제 활동 등 실생활과 밀접한 뉴스에 나타나고 있다. 1920~30년대 경상도 부산항이나 포항항, 함경도 원산항에서 울릉도를 입출항할 때 강원도 울진 앞 바다까지 북상 내지 남하하여 동쪽으로 선회하고 있어 최단거리 항구인 울진 죽변항이나 삼척 임원항은 여전히 중요 항구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는 역사, 전설을 다룬 기사에서 강원도 관련 내용이 풍부하게 서술되고 있다. 울릉도 역사 서술의 첫머리에 하슬라군주 이사부 활약 및 고려 때 강원인의 이주 시도, 삼척영장과 월송만호 수토, 개척령 시기 강원인 이주 등 강원도 역사와 중첩돼 환기되고 있다. 울릉도 태하리 성하신당 전설은 강원도 수토사를 수행 해왔다가 풍랑으로 익사한 강원도 하급관리의 희생을 기리는 공간이었으나 이후 울릉도사람들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처로 윤색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릉도가 강원도 행정관할에서 타도로 이관되면서 각종교류도 위축되었으나 1920~30년대 울릉도 관련 신문기사를 통해 실생활 차원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역사성도 언론을 통해 수시로 환기되고 기억되고 있다. 현재 강원도는 울릉도 독도와 행정구역을 달리하고 있지만 최근 인적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으로 위치를 다시 점하며 교류거점으로 재부상되는 역사성이 발휘되고 있다.
본고는 예이츠의 1920년대 동양시편에 재현된 경계적인 입장을 확인코자 한다. 이 시기에 그는 네 편의 상상의 동양시편 즉 「하룬 알-라쉬드의 선물」(1923), 「비잔티움으로의 항해」(1928), 「모히니 채터지」(1928), 「비잔티움」(1929)을 발표한다. 이 기간에 예이츠는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스트의 환상을 반영하면서도, 이들 작품에서 비집고 나오는 틈새를 통하여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경계성과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가 상상한 동양은 여전히 도피의 공간이지만 1880년대의 동양시편보다는 더욱 생기 넘치는 환상적인 과거의 재현이다. 또 「모히니 채터지」에서는 종전보다 더 간결한 시형을 시도하면서, 더 많은 공간을 만들면서 구속감을 덜어준다.
예이츠의 후기시(1920-1939)를 탈식민주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1920 년대 그의 시적 성향은 그 동안에 잠복되어 있던 영국에 대한 저항정신이 되살아나지 만, 만년으로 접어든 1930년 이후에 발표된 “동양시편”에서 영국에 대해 새로운 전기 를 맞는다. 이들 “동양시편”에 재현된 시적 표현에서 예이츠는 “상상의 동양”을 식민 주의자나 피식민지인의 도피의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영국에서 받은 유 산과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신적인 분열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화해를 암시하면서 극복과정의 일환으로 제3의 공간을 “차분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염상섭은 신여성을 다룸에 있어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일관하던 동시대 많은 작가들에 비하여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였다. 신여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보인 남성 작가들이 신여성들의 역사적, 사회적 무지를 강조하여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되 그들에게 아무런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과 달리 염상섭은 신여성들을 주동인물로 다루면서 오류의 삶에 대한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고 있으며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신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나 이해의 정도는 그렇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염상섭은 남성의 근대성은 긍정하면서도 여성의 근대성에 관하여 매우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였다. 그는 여성의 주체적 행보를 주시하기보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공고히 견지하며 여성을 극단적으로 이분화하려 하였다. 전통적 아비투스를 답습하고 그 안에 안주하는 여성들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하면 전통적 여성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을 부정, 그들의 존재를 위기로 담지하였던 것이다. 염상섭의 이런 위기의식은 작품 내에서 작중인물로 하여금 감상적인 토로와 한탄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연설 장면의 빈번한 활용이나 인물의 비분강개식 토로를 통하여 작가는 당시 사회에 대하여, 또 신여성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말을 지나칠 정도로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소 미숙한 방식의 글쓰기 방식을 무릅쓰더라도 일제하의 경박한 근대성에 대한 경계 등 작가의 주제의식을 뚜렷이 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라 판단된다. 하지만 염상섭은 당시 부정하고자 하는 모든 부정적 가치를 신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이율배반적 근대의식을 보이고 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 젠더의식은 당시 사회에 진출하려는 여성 지식인을 배제하고자 한 남성 지식인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