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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unearthed literature databases such as inscriptions on ancient bronze objects of Shang, Zhou Dynasties, Chu Slips of Warring States Period, bamboo slips and stone inscriptions of Qin and Han Dynasties, which have the property of one-time writing, can reveal some problems in the use of “annotation” words when compared with related handed down texts. The issue of stratification involving the attributes of the times and the annotations of Chinese historical materials are often neglected habitually. This kind of investigation and analysis is an important basic subject for mining language and character knowledge as well as forming a knowledge base for development history of characters. Even for chronological questions discussing the writing of relevant texts, some analysis thoughts may be offered.
        9,300원
        2.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의 목적은 만해 한용운의 온라인 연보를 기획할 때 고려할 지점들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데에 있다. 연보는 ‘개인 삶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의 기록’으로, 삶의 방향 제공, 학술 연구 자료, 특정 이미지의 사회적 유통 경로 등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연보 연구는 평전(評傳)을 위한 도구론적이나 개인 활동의 발굴 및 기록 차원에 머물러 미진하다. 이 연구가 종교인들의 온라인 연보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려할 부분은 연보가 온라인 서비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연구자들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연보를 구성하고 구현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은 연보의 개념적 요인들을 고려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 연구를 위해, 제2장(연보의 개념적 요인들)에서는 개인과의 연관 여부, 사실 여부, 내용을 선별한 기준의 합리성 여부 등 연보에서 개념적으로 고려할 요인들을 검토하였다. 이 요인들은 어떤 연보일지라도 ‘개인과 명확히 연관된 사실들을 최대한 찾고, 합리적 기준을 적용해 중요 내용을 선별해야 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장(연보 사례와 구현 방식들)에서는 온라인 연보 사례를 종교와 무관한 사례, 종교인 사례, 해외 사례로 구분해 구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각 사례에서 내용 범위의 제공 방식, 스토리 배치(story layout), 공간적 이해를 위한 지도, 번역 서비스, 동료의 연보 서비스, 중요 정보의 별도 서비스, 종교사적 맥락 서비스, 동일 시기의 주요 사건 제공 서비스, 핵심어와 설명문 서비스, 연보의 다양한 형태 등을 확인하였다. 제4장(만해 연보의 구성과 구현)에서는 만해의 연보 기록을 위한 개념적 요인들과 온라인 연보에서 고려할 방식들을 제안하였다. 전자는 개인의 연관성, 사실 여부, 합리적 선별 기준, 활용성 등을 포함한다. 후자는 내용 범위의 분절 여부, 공간적 이해, 개방성, 스토리 배치 등을 포함한다. 물론 이 방식들은 연보 설계 방향에 따라 선별적 채택이 가능하다.
        7,800원
        3.
        202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무덤은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를 함축하고 있어 취락연구와 함께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에 따 라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이 아닌 양식편년을 통해 무덤 편년 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부장유물의 형식편년을 통해 무덤의 편년을 했다면, 본고에서는 양식의 편년방법인 석촉과 석검의 순서배열보충법을 통해 동일문화권으로 평가하고 있는 대구지역 무덤 유구의 시간성을 검토하였다. 대구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은 석촉·석검의 새로운 형식이 많이 출현하는 단계를 기점으로 하여 총 Ⅰ·Ⅱ·Ⅲ·Ⅳ기로 구분되어진다.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을 살펴 획기에 따른 양상을 살폈다. 그 결과 Ⅰ기는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 유절식석검이 공반하며 재지계 계통 무덤이 축조되었다. Ⅱ기는 무덤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는 시기로 송국리형묘제와 함께 무경식석촉과 유구식석검의 부장 은 소멸되고 평근이단경식석촉, 첨근이단경식석촉, 일단병식석검의 부장이 확인된다. 또한 혼축조평 수적식 석관묘와 구획묘가 등장하면서 후기의 사회로 진입한다. Ⅲ기에는 첨근일단경식석촉의 부장이 확인되기 시작하고 판석조평수적식 석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연접된 구획묘의 축조가 증가 하면서 피장자 간의 위계 차이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Ⅳ기에는 이전시기 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무덤의 축조가 대폭 증가한다. 특히 혼축조평수적식 석관묘의 증가와 함께 석촉 제작의 단순화가 극대화된 능형식석촉이 공반하고 석검은 석검이 가지는 위신재로서의 성격이 가장 잘 반영된 석검 일단병식 Ⅳ식이 공반된다. 따라서 대구지역의 청동기시대 무덤 사회는 Ⅱ기에 송국리문화가 유입되지만, 재지계 무덤의 강한 전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6,300원
        4.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취락고고학에서 주거지의 동시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 과 유구를 총망라한 양식 편년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기존의 토기의 문양이나 주거지의 형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의 시기와 단계를 설정하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문양, 무문토기 壺, 淺鉢, 적색마연토기의 壺ㆍ甕ㆍ鉢, 內彎口緣甕, 底部의 두께, 胴 下半部 의 傾斜度 등의 器形과 또 석촉과 有溝石斧, 반월형석도, 방추차 등의 형태적 차이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주거지와 수혈에서의 공반상을 통하여 순서배열보충법으로 양식을 편년하였다. 그 결과 110개의 유구에서 51단계의 시간적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너무 세분된 편년이라 취락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각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경향을 살펴 9단계의 획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점토대토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는 유물들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점토대토기 단계 직전의 재지계 유물의 변형으로서 先粘土帶土器文化(청동기시대 晩 期)를 설정할 수 있었다. 이 획기를 통하여 지좌리유적의 취락상은 협곡에 입지한 주변 취락으로 타 공동체와의 교류가 적어 전통문화의 존속기간이 긴 다소 폐쇄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었고, 청동기시대 전기ㆍ후기ㆍ만기의 문화가 혼재함을 알 수 있었다. 지면 관계상 차후에는 이 편년을 이용하여 지좌리유적 Ⅰ~Ⅸ기(기원전 1100년~550년 전후)의 취락 변천 과정을 살펴서 그 시대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7,800원
        6.
        2018.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고학적 상대연대결정법으로 몬텔리우스의 형식학적 방법과 순서배열법이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유물 각각으로써, 후자는 유물의 공반 즉 유물복합체를 분석단위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유물 개개의 시간성을 따지는 것은 유물의 생산시점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고, 공반유물을 통한 상대연대의 규명은 유통 결과의 시간성을 시사하는 것이란 점에 궁극적인 차이가 있다. 소비지의 유물은 각 개인의 취향에 따라 유물의 존속기간이 천차만별이다. 즉 일찍 생산된 물건이라도 늦게 생산된 것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존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일 형식의 물건이라도 그 폐기되는 시간성은 개인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난다. 그러므로 소비지의 유물을 통한 순서 배열법에는 고고학자가 요구하는 유물 또는 유구의 생산시점을 알려주지는 않다. 그리고 유물 각각을 대상으로 작성된 편년들은 모든 유구의 시간성을 파악하는 것에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정된 연구에만 사용될 뿐이다. 결국 올바른 편년체계의 구축에 유용한 자료는 생산지에서의 공반유물 즉 유물복합체이고 이렇게 시간 성이 확정된 양식편년을 통하여 고고학의 목적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소비지의 양식편년을 생산지의 양식편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5,800원
        7.
        2014.11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Cordyceps species (Cordycipitaceae, Hypocreales) were previously mentioned under dominant genera such as basidiomycetous Clavaria Vaill. ex L. and ascomycetous Sphaeria Haller. Cordyceps Fr. was coined by Fries (1818) from a combination of a Greek word cordyle, meaning a club, and a Latin word caput, meaning a head. Cordyceps was, however, ranked at tribal level under Sphaeria by Fries (1823). Link (1833) later re-elevated Cordyceps to genus level. As a result, there was variation on author citation of Cordyceps in different botanical codes such as Cordyceps (E. M. Fries) Link (1833), Cordyceps E. M. Fries (1818) and Cordyceps Fr. (1824). In 19th and 20th centuries, more and more species were described, with necessity to divide Cordyceps into subgenera, sections and subsections based on morphological similarities. Recent molecular phylogenetic studies, however, showed that Cordyceps is polyphyletic and its members are dispersed in various clades within Hypocreales. As a consequence, Cordyceps was amended in strict sense by Sung et al. (2007) and distantly related clades were named under separate genera. Here, we review recent nomenclatural changes of Cordyceps-related fungi in light of recent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Code of Nomenclature for algae, fungi, and plants (ICN).
        8.
        2014.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성산성은 남성과 북성 2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축산성이다. 이성산성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토기류는 원삼국기~백제 한성기에 해당하는 토기들로 미호천유역 원삼국기 이래의 재지적 요소를 갖고 있는 토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중심시기는 4세기 대에 해당하고 있다. 이성산성의 축조는 백제가 미호천유역의 정치세력을 병합한 직후인 4세기 중~후엽경에 백제 중앙의 주도하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시기는 토기양상을 통해 볼 때, 남성(南城)이 북성(北城)보다 다소 이른 4세기 중엽, 그리고 북성이 4세기 후엽경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 토기류에는 재지계 및 한성백제 토기외에 가야(김해)지역, 충남 서해안 및 영산강유역의 토기기종으로 판단되는 외래기종 토기류가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 외래기종 토기류는 대체로 4세기 후엽의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데, 가야와 영산강유역권과의 교류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백제 한성기 가야(김해) 및 영산강유역으로 연결되는 교류루트상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방 거점성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000원
        9.
        200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남한지역 무문토기의 편년은 돌대문토기를 표지로 한 早期의 설정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미사리·옥방 5지구유적 등과 같이 돌대문토기만을 반출하는 주거지가 조기의 표지적인 유적이며, 옥방 5지구·수가리유적의 연대측정 결과를 근거로 조기를 신석기시대 말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突帶文土器외에도 二重口緣土器등 조기에 다양한 토기가 병존했을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견해가 있다. 미사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서는 조기의 유물조합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옥방5지구와 동일하거나 더 높은 연대측정자료들이 많기 때문에 신석기말기까지 조기를 올려보기는 어렵다. 무문토기시대 조기는 돌대문토기·이중구연토기의 주류속에 鋸齒文土器·孔列文土器·橫帶區劃文土器등이 병존하였으며, 신석기시대 말기 다음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문토기시대 전기는 2000년대 이후 역삼동식토기·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가 병존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립되었으나, 최근 複合文에서 단순문으로의 변화, 즉 가락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역삼동식토기로의 변화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삼동식토기가 뒤늦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 장기간 존속하였다는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전기의 특징은 돌대문토기가 소멸되며, 이중구연토기는 類似二重口緣의 형태로 변화하며, 역삼동식토기·흔암리식토기 등 孔列文系土器의 확산과 더불어 지역적 특징이 나타난다. 남한의 무문토기 조기는 동북한지역 보다는 요동~서북한지역과의 관련성이 높은데, 쌍타자·대취자Ⅲ기, 신암리Ⅱ기, 공귀리·심귀리Ⅰ기, 세죽리Ⅱ1기, 구룡강Ⅰ기, 흥성Ⅲ기, 오동Ⅱ기, 서포항Ⅴ기등과 병행한다.
        5,800원
        1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集.에 실려 처음 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14년 무민당의 후손들이 .무민당 집.을 발간하면서 집안에 전해오던 무민당 手稿本이라고 추정되는 .남 명연보.를 저본으로 삼은 연보를 수록하여, 3종류의 연보가 전하고 있 다. 연보가 발간된 후 내암관련 문자 삭제, 구암과의 절교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내암 관련 문자는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한 반면 구암 과의 절교 문제에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무민당의 견해 가 수고본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반면 .남명선생별집.과 후에 발 간된 .무민당집.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분량은 현저하게 줄어들 었다. 1800년대 들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간돼 남명 생애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보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또 연보의 내용도 일부분 거칠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1897년 남명 선생편년을 간행했다. 남명편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연보의 오류들 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대체로 연보의 기술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연보에는 덕계 수우당 한강 등 소수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반해 편년에는 남명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현저하게 늘었다. 이는 남명의 遺文들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시 지역 선비들의 문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구해 이를 보충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