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교회는 교회적 차원, 타종교적 차원, 민족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교회 성장의 쇠퇴 현상 속에서 교회 성장 동력의 회복 방안은 무엇인가? 둘째, 한국종교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불교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불교도 전도의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셋째, 반백 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민족분단의 상황 속에서 북한 복음화의 대비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해석학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상황신학 창출 책무에 주목하면서 필자는 상기한 삼중 과제를 탐색적으로 고찰한다. 먼저 II장에서는 선교와 상황화의 상호 불가분성이 하나님과 교회의 본질 및 사명과 연계되어 소개된다. 이어서 III장, IV장, V장에서는 교회적, 타종교적, 민족적 차원에서 민중신학, 회통모델, 단군사상의 기여점 및 한계가 각각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본고의 연구 결과 21세기 한국교회에게 부여된 해석학적 공동체의 역할은 민중신학의 사회참여성, 회통모델의 상호존중성, 단군사상의 민족유대성을 중시한 통전적 상황신학의 구축 이다.
이 글은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3·1운동이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이 었다면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교분리라는 교리를 넘어서야 했고, 천도교라는 이웃종교와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극복해야 했다. 3·1운동에 나타난 신앙유형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니라 두 진영을 넘어서서 하나 되는 통전적 신앙유형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양태는 초월적 신비주의와 계몽운동으로 분열된다.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으로는 자주독립, 민주주의, 평화, 에큐메니칼 정신, 종교간 협력과 연대 등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교회간 코이노니아와 남반부 교회를 강화시키는 선교, 교회내 민주화와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에 기여, 평화교육과 평화문화 배양과 평화통일에 기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로 양분된 교회를 통전적 신앙양태로 회복, 위의 과제들과 지구생명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간 협력과 연대를 제시한다.
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This study seeks to understand why Shantung mission w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work done by the Korean church in 1913-1957 while the focus of other mission works was the Diaspora Koreans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s mission work of the Korean church. The Korean church clearly demonstrated its evangelistic zeal by sending its missionaries to Jeju Island, Manchuria, Russia, Japan, Hawaii and Shantung. However, it is interesting that it was only Shantung mission that was cross-cultural in nature, while all others were targeting Koreans living overseas. This study briefly looks at those early missionary enterprise in different regions, which at the end points to the foundational difference between Shantung mission and other missions in other places. They share many things in common, they both were initiated by the church, they both show the missionray zeal, they both were done while they did not have sufficient resources, they both have sacrificial indiviuals. However, Shantung mission stands 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work. While fully agreeing that Shantung mission was exclusively ministered, gorverned and financed by the Korean church, this study suggests that Shantung mission was the only cross-cultural mission enterprise because it was initiated by a missionary, possibly with the help of a missionary board. Some previous studies seem to overlook the fact that W. B. Hunt took a significant role in planning and preparing Shantung mission, mediating between mission boards, the Chinese church and the Korean church. This study, then, goes further to discuss what the Korean church may learn from this historical event.
This thesis is about John Thom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The coverage of this thesis begins from his birth in the U.K. and his ministries, how he came to Korea and his ministry in Korea from 1910-1911. In total, John Thomas spent 10 years serving in Korea, therefore assessing his ministry is somewhat out of proportion, however this thesis will focus on the background of his calling to Korea and the beginning of God’s divine works. 1. John Thomas had evident experience in the Fourfold Gospel. 2. His devotion and faith made him a clear model as Christ’s servant. 3. He was a man of prayer. 4. Through the successful ministry in the U.K. he demonstrated the blessings of God’s presence. 5. He made a network of supporters for prayer and financial aid. 6. He was a prominent Evangelical leader of his time and was selected as the main speaker at the annual OMS conference in 1911. 7. He had a call to preach the holiness element. This calling began to spread in the other denominations and missionaries also. 8. He not only loved the lost souls of Korea but also cared for the people of the world. 9. His ministry had a harmony of teaching and ministering. Through his character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holiness element gave him authority to impress many people. 10. Although he had difficulty in learning Korean, his input and effort was vital in setting the foundations of the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11. The early records of his ministry which influenced many denominations and other missionaries in Korea and Japan shows how influential he must have been in the later years. 12. He contributed to the printing of 10,000 copies of the New Testament, helped set up administrative procedures for KEHC and the Bible Institute and his teaching, church founding and faithful mission works show the bright future ahead.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early days of John Thomas’s mission. There are still more research to be done about his character and the latter part of his ministry. However, the fact that a man of God, such as John Thomas was called to serve as the first missionary sent to the KEHC, the first superintendent and the first dean of Kyungsung Bible Institute proves God’s purpose toward the KEHC and STU. Furthermore, through this research we need to find the elements that need to be continued and carried out in this day and age. Therefore it is inevitable the existence of holiness is revealed not only in Korea but also worldwide. This is the core value of KEHC and STU’s existenc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the Modern Movements which had done important roles on the development of modern church architecture and sacred art in the first half of 20th century. I had investigated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the movements, and analyzed the buildings which represented the movements. And I compared the architectural fruits of 'Riturgical Movement' and 'L' art Sacré Movement. The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 First, there are two important movements in Catholic church in the backgrounds of the innovative changes of modern church architecture, Those are 'Riturgical Movement' which pursuits to establish a closer relation between clergy and congregation, and to make the positive participants in the service not mere observers and 'L' art Sacré Movement' which pursuits to accept modern secular art into church. Second, both movements had been developed on the bases of the theological studies with tow monasteries - Benedictine Order and Dominican Order - as leader. And the main concept was a kind of revival movement which recovers the Christian tradition. Third, The two movements began from the different themes and in the different regions. But they exerted influences each other, and achieved successful fruits in the Catholic churches of England and Swiss in 1960'. Fourth, 'Riturigical reformation' and 'Acceptance of modern art' had been officialized and generalized through the second Vatican Council(1962-1965).
연구는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1560)에 나타난 교회재산의 재분배 규정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16세기 이전의 스코틀랜드 교회재산은 무질서 하게 악용되었는데, 이에 대해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재 산의 재분배 규정을 제시하였다. 개혁자들은 교회재산의 재분배 기준뿐만 아니라 세부 계획안, 그리고 세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렇 기에 필자는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교회재산의 세속화의 무질서 문제를 해결하는 신학적인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비본질’적인 요소들이 개혁교회의 ‘질서의 기 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비록 질서를 바로잡고자 제정된 ‘교회 헌법’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조차도 개교회가 자의적으로 해석하 고 오용하면서 더 심각한 무질서의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교회의 재산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성경적인 바른 질서와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재산의 세속화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곧,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재산에 관한 분명한 질서와 기준을 세우는 것 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제1치리서에 나타난 교회재산의 재분배 규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그 문서의 배경이 되 는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상황을 개관할 것이다. 왜냐하면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교회재산의 형태는 오늘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시 역사적 맥락을 아는 것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재산과 이를 둘러싼 사회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직접적인 배경, 그리고 구조와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이후에 본문에 나타난 교회재 산 재분배에 관한 규정을 주목하고, 그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 를 통해, 한국교회가 직면한 교회재산의 세속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인 발판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회 공간 활용을 분석하여 지역교회가 사회와 무엇을 공유하고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이 목적을 위해 정동제일 교회를 택하여 해방 후 교회 공간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신문, 보고서, 기사 등을 분석하였다. 여기에서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닌 인간의 활동과 공간적인 실천이 결합된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을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으로 부른다.
해방공간에서 다양한 단체와 기관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위하여 공간이 필요했다. YMCA나 학교강당, 천도교 강당 등은 실내공간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특히 교회건물은 예배공간만이 아닌 다양한 활동 공간으로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서울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는 수도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 공간이었다.
김인영 목사가 재직하던 시기를 전후로 공간 활용도가 더욱 높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신흥우와 함께 YMCA와 적극신앙단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 활동했다. 기독교 정신 위에 대외적으로 활동했던 그의 행동은 정동제일교회 공간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비록 친일행적을 계기로 이전처럼 정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는 시대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기대하며 시민사회에 공간을 제공하였다.
더 나아가 여러 시민단체들은 세계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석학이나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시민들의 의식을 함양시켰다. 교회는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들 즉 문화적인 것, 경제적인 것, 결혼식과 장례식 등의 일상적인 것들을 위하여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시민들의 생각과 욕구를 공유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된 단체들에게 결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 그의 정치활동을 지원하였다. 반탁과 관련된 집회와 강좌는 서울지역의 우파를 결집시켰고, 전국대회를 성공적으 로 개최한 독촉국민회는 1948년 제헌국회에서 다수당이 되어 정국을 주도 하였다.
정리하면 정동제일교회 공간은 사회적 관심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세우는데 그 힘을 결집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연구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속에서 태극기에 대한 국기 경례 방식으 로 인해 발생한 교회와 국가 간의 첨예한 갈등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해방을 맞이한 직후인 미군정기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행된 국기 경례 방식 은 세이케이레이, 번역하여 최경례, 흔히 배례라고 불리우는 일본식 경례 방식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국기 배례에 대하여 민족적으로는 일제의 잔재라는 측면, 신앙적으로는 우상 숭배라는 측면, 종교적으로는 미신적이라는 측면 등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기 배례 거부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손양원 목사를 필두로 해서 장로교회가 주도 하였다. 그렇지만 국기 배례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가 지 상주의 혹은 민족 지상주의의 일환으로 한국 사회에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 되었다. 다시 말해 대종교인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종교의 식이 아닌 국가의식이란 명분하에 더욱 강력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렇게 국기 배례가 자리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시행된 공간은 일선 학 교들이었다. 이로 인해 특히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유년 주일학교 학생들이 국민학교에서 시행하는 국기 배례를 거부함으로 인하 여 수난을 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장로교를 넘어서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도 국기 배례에 대 한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동일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 닌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던 감리교는 일제 강점기의 신학과 신앙 전통을 계승하여 국기 경례에 대해서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으로 간주하였 다. 그리하여 국기 배례든, 혹은 국기 주목례든 간에 어느 것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직후, 1950년 4월 25일에 국기 배례 폐지 건이 국무 회의에 상정되었다. 국무회의에서는 국기에 대한 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 례로 변경하였다. 이와 같은 국기 경례 방식 변경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 이 결정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알 려진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의 지속적인 국기 배례 거부 운동도 한몫했지 만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수난 사건들이, 제 각각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개연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하나는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었던 안중섭 전도사의 수난과 또 다 른 하나는 국기 배례 거부로 인하여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겪은 대환난이다. 이 두 가지 수난 사건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수난 해결을 위한 인적 연결 고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 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기 경례 방식에 대한 변경은 국 기 배례 거부로 인한 수난 속에서 그 해결 방안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