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5 만세운동은 전북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으로써 다른 지역 만세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남장로회는 군산, 전주, 익산에 기독교 학교를 세웠는데 이들 지역의 만세운동에는 이 학교의 학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군산영명학 교이다. 이 학교는 전킨 선교사가 설립하여 앞선 신학문과 기독교 정신을 가르쳤고, 3.5 만세운동 당시 교장이었던 인돈 선교사는 미국으 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알렸으며,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인 박영세는 3.5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들 은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비폭력평화의 기독교 정신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3.5 만세운동에서 배움을 실천으로 옮겼다. 3.5 만세운동과 그 정신은 그 후 군산지역의 자발적인 만세운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초기 한국교회와 일제강점기 한국의 정치 현장 가운데서 우리나라 를 찾은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은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정교분리와 정치적 중립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언더우드(1884년), 마펫 (1890년) 선교사의 내한 이후 한국선교를 위해 서구 선교사들의 끊임없 는 희생이 있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거쳐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는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성경을 번역하며 토착교회를 설립했다. 그래서 일제에 맞설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반일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을 일거에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기독교 세력은 물론 그 배후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전략은 더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3·1 독립운동이라는 한국 민족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외부의 추동력과 내부의 흡인력을 모두 고려한 중도파 역사기술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다.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자주와 인권이 짓밟혔을 때 천도교와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이에 적극 참여했다. 세계사와 구속사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만세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구원받은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교회사뿐 아니라 전체역사를 그 영역으로 삼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참여한 만세운동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하나님 의 선교 관점에서 3·1운동과 익산4·4만세운동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의 관련성과 선교역사적 의미를 준비과정과 피해상황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Christians became the main leader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y established a connection between Korean national identity and Christianity that has continued into the 21st Century. One of the main leader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Soh Jae Pil. The March First Movement was a nonviolent revolution, a decade before Gandhi’s Salt March in India, that issued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held nationwide demonstrations demanding an end to Japanese rule. Of the movement’s 33 organizers, 16 were Christians, at a time when fewer than 3 percent of Koreans were. Thus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Christians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1919년 4월 4일 익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농촌의 한 교회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매우 격렬하고 장엄한 의거였다. 이날 목숨을 바쳐 만세운동을 이끈 선각자들의 순교(혹은 순국)정신을 선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익산지역 선교역사와 남전교회의 설립과정 그리고 4.4 만세운동의 준비과정과 만세현장을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이들의 정신은 순교와 선교정신이다. 만세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6명 가운데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과 독립을 믿으며 죽음으로써 이를 증거(μαρτυρία)한 증인(μάρτυς)들이 다. 다음으로, 파송(missio)공동체 정신이다. 남전교회는 세상으로 파송 받은 공동체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에 참여했다. 끝으로,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의 정신이다. 이것은 최근 세계교회가 일으킨 운동이나 순교자들은 이것을 앞서 실천한 선구자이다.
이 글은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을 규명하고, 그 정신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3·1운동이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이 었다면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교분리라는 교리를 넘어서야 했고, 천도교라는 이웃종교와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극복해야 했다. 3·1운동에 나타난 신앙유형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니라 두 진영을 넘어서서 하나 되는 통전적 신앙유형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양태는 초월적 신비주의와 계몽운동으로 분열된다. 3·1운동에 나타난 기독교적 정신으로는 자주독립, 민주주의, 평화, 에큐메니칼 정신, 종교간 협력과 연대 등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교회간 코이노니아와 남반부 교회를 강화시키는 선교, 교회내 민주화와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에 기여, 평화교육과 평화문화 배양과 평화통일에 기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로 양분된 교회를 통전적 신앙양태로 회복, 위의 과제들과 지구생명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간 협력과 연대를 제시한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과 여성독립운동을 세계평화의 시각에 대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일본 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의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3.1운 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특히 3·1운동은 민중운동으로서 계층과 지역, 성별의 구분을 넘어선 독립운동이었으며, 그 시대 독립운동이 지향한 독립과 자유에 대해 평화적 견지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 시대가 당면했던 독립의 과제는 시대적·민족적 견지에서의 독립이었으며,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둘째, 3·1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주체의지로 독립운동의 참여자, 실천자로 변화했으며, 독립운동사 에서 한 주류로 한국여성독립운동의 맥락을 이어갔다. 셋째, 3·1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 미주 등으로 확산되면서 아시아 약소국이 자유 의지를 발휘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저력이 되었다. 이상에서 3·1운동은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재인식되어야 하며, 3·1운동과 한국여성독립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주목받아야 할 것이 다.
이 논문은 1907년 대부흥운동과 3.1운동을 통해 회심, 치유, 변형의 관점에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사이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회심은 하나님 통치를 향한 개인적, 사회적 변형으로, 정체성과 도덕성과 정치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한국교회의 정체성의 원형이 형성되었고, 회심의 결과로 기독교인들의 개인적, 사회적 변형을 도덕적 열매로 거두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3.1운 동에 참여한 것은 성령의 역사로 그들은 정치적 운동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복음전도자라는 새로운 기독교 지도자 상을 보여줬다. 3.1운동 이후에 복음주의자들은 전도를 강조하고,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변화를 강조하게 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 나타난 정체성 형성과 도덕적 열매들과 3.1운동에 나타난 정치적 참여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민중을 치유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성령, 신비와 저항을 강조하는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가난과 연약함의 영성,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는 교회의 정체성, 도덕성, 정치를 연결하는 길이 될 뿐 아니라 양 진영 사이의 화해에 기여할 수 있다.
1919년 4월 4일 익산군 솜리(이리) 장터에서 있었던 ‘대한독립만 세’ 운동은 3.1운동의 하나로서 전국적으로도 매우 격렬했던 만세운동 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운동의 특징은 첫째,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필연적 운동으로써 이 운동의 중심에는 남전교회의 설립정신이 반영되 었다. 둘째, 평신도 중심의 운동으로써 다른 지역 만세운동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셋째,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민족저항운동으로써 기독 교 저항운동이자 농민 저항운동이었다. 익산 4.4 만세운동의 선교적 의미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열매로써 익산지역의 교회설립과정과 선교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5일마다 서는 ‘장터’가 복음이 선포되고 실천되는 ‘토착화’(Indigenization)선교의 현장이었다. ‘장 터’는 선교사들이 서민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리스도인들은 쪽 복음을 전하던 곳이었으며, 독립 만세운동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장소였다. 마지막으로 독특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전북은 한국 토속종교의 본산으 로써 종교간 대화의 선교와 만세운동의 사회적 책임의 선교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 글은 우원 이호빈 목사(友園李浩彬, 1898-1998)의 독립운동과 토착적 신앙운동으로서 예수교회운동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인류보편사적이고 민족사적이고 한국교회사적인 맥락과 의미를 밝히려는 작업을 시도했다. 우원의 기독교 복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서구적인 근대 기독교 패러다임을 넘어선 지평에서 주체적인 한국기독교인의 삶의 세계를 열어냈다. 이것을 선교사들의 ‘서도서기 패러다임’과 초기 한국기독교의 주체적인 입장인 ‘대도대기 패러다임’을 넘어선 ‘한도한기 패러다임’으로 파악했다.
3·1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각계에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별히 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기독교는 각 교단별로 독립 만세운동 적극가담자의 신원을 밝히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각 교단의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서 안식일교회도 3·1운동에서 안식일교회의 역할을 조명하는 연구가 요구되었다. 본 연구는 이런 역사적 필요에 부응하여 3·1운동 당시에 안식일교회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면, 안식일교회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첫 기록은 3월 2일 평남 거촌교회에서 박종은, 최경선 등의 주도로 5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후 3월 6일에 평남 순안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에서 안식일교회가 경영하는 사립의명학교의 교직원생도 수 명이 포박된 기록이 나타난다.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전개된 독립만 세운동에서 입감된 9천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안식일교인은 5명으로 집계 된다. 본 연구는 이 5명의 안식교도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박종은, 전홍석, 강영국, 홍종엽, 최경선이 이 명단에 포함되는 것을 밝혔다. 이와 더불어 1년 후에 상해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추진되었던 대한독립1주년기념축하경고문 배포문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안식일교회 출판소인 시조사와 안식일교인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진익, 유진상, 권학규 등의 안식일교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그 외에도 순안병원의 의사였던 러셀 선교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청년을 치료해 준 것이 발각되어 3개월간 심문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안식일교회는 교인들과 시조사와 순안병원과 선교사를 통해서 3·1운동에 가담하였음이 여러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서 밝혀진다. 1904년 한국에 복음이 시작된 안식일교회는 15년 후에 발생한 민족독립운동에 동참하여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였다.
The peninsula-wid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demonstrated the cohesiveness of the Korean people and served as the opening chapter to a new history; the entire peninsula was flooded with protests for independence, and shocked by their intensit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gaged in indiscriminate suppression. The March First Movement propelled demonstrations to be held as well in Northern Jiāndǎo (“Puk-kando”), situated north of the Tumen River.Thousands of demonstrators gathered on March 13 in Lóngjǐng to rea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s part of the demonstration. Although dozens of people were injured due to the suppression by the Chinese armed forces (seventeen were killed), numerous demonstrations (currently known are fifty-eight) took place throughout Northern Jiāndǎo. A frontier region, Northern Jiāndǎo was a unique cultural space wherein Koreans who crossed into this borderland formed their own communities; with active ethno-nationalist education and religious propaganda, the region served as a nexus of ethno-national and anti-Japanese consciousness. In addition, due to the frequent exchanges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Maritime Province, Lóngjǐng in particular served as the cradle of ethno-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s.
Lee Chang Hoi (Lee) was born in 1872 at Namyang. He became a christian in the early period when the gospel was spreading in the region. After conversion he worked hard for the modern education movement in the influence of George Herber Jones. Hong Seung Ha founded the Hoheung elementary school with Jones’ donation in 1901. The school was managed by Lee who established Powell school in purpose of teaching English in 1902. Lee managed nine day schools within nine churches which were founded by Hong Seung Ha. He also served as an exhorter in Namyang church, and worked as an assistant worker for a year in 1906. He later became the evangelist from 1907 to 1910.
After 1906 he developed Boheung school as a central school in Namyang. He managed the school with general level edcuation department, high level education department, and measurement education department, and tried to keep Namyang redisents’ wealth from the intrusion of Japan. He held the United Sports Day gathering people from the surrounding elementary schools to inspire the patriotism. Some Japanese called Boheung school as a rioter training center for this reason, and insisted closing down the school since it was growing as a center for anti-Japanese thoughts. Lee also participated founding Sangdong elementary school, and he was directly and indirectly engaged in managing other schools. He also ran the evening school in Boheung school for children who couldn’t study in the daytime. He also worked as the principal of Sangdong evening school. He established the Namyang branch of Daehan-Jaganghoi for the progress of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The group protested against the Japanese economic invasion with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He was in ministry from 1913 to 1916 at Namyang church. He supported the neighboring churches not only to stand independently but also to found schools. He also inspired other people to build churches in the churchless areas and to teach the biblical knowledge and Hangul by running the Bible Classes. He became a circuit pastor of Namyang and Osan in 1916 and transferred to Gwangju in June 1918.
When he was in ministry of Gwangju,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broke out. As he participated in this movement, he was arrested and in jail for 4 months. After he was released for the lack of evidence, he met Lee Dae Jung who raised the independence funds with him. However, Lee got arrested due to the fund raising activity and got sentenced to two years in prison. He was a pastor who fostered the patriotic enlightment movement into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and Independence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