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i” (眭) Clan is a famous family in Zhaojun in the middle ages of China. The heyday of “Sui” (眭) Clan in Gaoyi Zhaojun was the period of the Sixteen Kingdoms. They active in the historical events of the Western Jin, Later Yan, and Northern Wei dynasties. They maintained the survival and development of the gentry in a difficult environment. The surname “Sui” (眭) was erroneously changed to the surname “Qi” (畦) for the first time during the Wei and Jin dynasties. In the writing during the Northern Wei and Northern Qi dynasties, the surname “Sui” (眭) was erroneously mistaken for the surname “Mu” (睦) for the second time. These two surnames have become independent surnames in later generations, but their origin is “Sui” (眭). This is a noteworthy issue of Chinese character miswriting.
본 연구는 중세에 잘못된 교권에 저항하면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많은 여성들이 선교를 위해서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선교적 삶을 살고 사역을 하였는지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첫 번째로 중세시대에 여성들이 전승된 여성관 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대우를 받으며 가부장적 권위 아래서 가사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게 됨으로써 그 존재감이 매우 미약했음을 연구하였 다. 두 번째로는 12세기 이전세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여성들에 대한 교권의 견해를 살펴보고, 라테란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변화된 여성들 의 사역의 부흥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세 번째로는 중세시대 여성사 역의 주요 기구인 베긴공동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베긴공동체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신비주의와 신앙적 소명을 통해 발전해가는 여성사 역을 연구하였다. 네 번째로 베긴공동체 여성들이 한 선교사역을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보았으며 통전적 관점에서 기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현대 여성들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간략하게 모색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 표시된 오빌의 지리적 위치와 시대별 위치변화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시기에 제작된 지도를 조사하여, 이를 시대별 그리고 지역별로 분류하여 분석했다. 분석 결과 중세에는 인더스강 서편의 해안지역, 갠지스강 유역, 홍해연안 지역과 홍해상의 섬으로 표시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히스파니올라, 페루, 향료제도와 소팔라로 대상지가 옮겨 갔다. 또한 다시스는 중세에는 카타이 서편에 그려졌으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오빌과 가까운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현지인들로부터 수집한 지식 역시 오빌의 위치를 변화시켰다. 1600년 이후에는 오빌은 성경지도를 제외한 지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것 역시 확인했다.
시기구분은 사실상 해당 시기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망라한다. 우리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의 구분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수)량의 변이로부터 확보되는 고고학의 시간성과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치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종종 편년작업을 진퇴유곡의 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기존 분기의 결함을 극복하려는 시도에는 그런 곤란한 상황이 반영된 듯하다. 본고는 그러한 곤란을 유발시킨 우리 연구관행의 문제, 사회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분기를 조 정하려는 최근의 시도가 배태할 문제 등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간 축적된 청동기시대 전-중기 전이 과정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생산적인 후속연구로 이어갈 방안을 모색해본다. 그러한 모색의 일환으로 청동기시대 전-중기 전이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방면의 변화가 지역적으로 얼마나 상이하게 나타났는지를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 청동기시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이론적 탐색의 기초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Fu 桴’ and ‘Cha 槎’ are connected with the sea. Taking ‘Fu 桴’ floating in the sea represents the idea of seclusion, and ‘Cha 槎’ is used as an allusion to the immortal-Taoism by the literati. In the middle ages, the hermit from the seaside appeared frequently, which had the example of the supernatural being. ‘Fu 桴’ referred to the seclusion and ‘Cha 槎’ that refers to the fairy show the obvious traces of differentiation and fusion in the middle ancient literature works.
이 연구의 목적은 고대와 중세의 대척지의 개념과 대척지가 지도학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지구를 북 또는 구의 형태로 간주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대척지의 존재를 가정했다. 대척지의 개념은 크라테스에 의해 정립되었고, 키케로를 통해 로마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비록 중세에는 어거스틴에 의해 대척지의 존재는 부정되었지만, 크라테스의 대척지 개념은 마크로비우스를 통해 중세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대척지가 표현된 마피문디는 지대형과 4구분형인데, 대척지 명칭을 직접 표기하거 나, 간접적으로 백과사전의 관련 내용을 언급하여 대척지임을 암시했다.
중·근세 삼척은 대관령을 넘어 한반도 중부 지역과 통하는 도로망과 동해안의 해안 도로를 따로 한반도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망, 그리고 바닷길의 해운 교통을 통해서 삼척 이외의 지역과 인적·물적 교류를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척은 신라가 지증왕 때 동해안을 따라 도로를 만들면서 일찍이 주를 두었고, 이곳에 이사부를 주둔시켜 우산국을 정벌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 지역의 물류와 인적 이동의 중심지로 기반을 잡았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수도 신라를 중심으로 도로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삼척이 동해안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수도가 개경으로 바뀌면서 전국의 도로가 개경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해안의 도로상 중심지는 삼척보다는 위쪽에 위치한 강릉이 더 중요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도가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되어 역시 전국의 도로망이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동해안의 경우에는 대관령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강릉이 대도호부가 되어 동해안의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삼척은 강릉과 평해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 의 중앙에서 고대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The Chinese Characters in stone inscription in Chinese middle ages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research materials of the Chinese history and Chinese language and Characters. It is very hard word to use these materials for huge quantity, large time span, and spread over different area, so it is necessary to build a database to promote the research work on Middle Chinese Characters. Before this work, creating a set of standards is important basic work. This is the purpose of this paper. There are only 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on the Chinese Characters in stone inscription in Chinese Middle Ages. In the future, with the development of the work more scientific standards will be further discussed.
강원지방에 분포한 중세성곽의 현황과 현재까지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성곽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연결하여 강원지방 성곽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있다. 본고에서 다루는 성곽들은 중세에 신축되거나 수·개축된 성곽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보고서 등이 발간된 성곽을 중심으로 그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원지방은 태백산맥이라는 자연적 경계로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단순비교이나 면적상으로 영동지역이 영서지역보다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성곽의 분포수에 있어서는 거의 비등하다. 다시 말해 이는 고려시대 동계로 편입되었던 영동지역은 군사적 목적이 강하고 그에 따라 성곽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동지역은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나『高麗史』등과 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해안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해안성들이 축조되고, 해안성이나 주변 성곽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읍성들이 축조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육지를 통해 몽고의 침입이 있었고, 해안을 통해 왜의 침입이 증가함에 따라 험악한 산중에 입보용산성이 축성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전쟁양상과도 관련이 있으며, 점령이 아닌 약탈의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영서지역은 문헌이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읍성이나 평지성, 평산성이 조사된 사례가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운영되던 테뫼식산성을 수축하여 사용하고 몽고의 침입과 더불어 영동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대규모의 포곡식산성을 축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중세 강원지방 성곽의 시기적 변천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곽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발굴조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성곽은 많지 않다. 또한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어 70여개소에 달하는 중세성곽에 대한 정확한 현황이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고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된다면 본고는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사상이 그의 의식영역에 주입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상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인간들의 의식영역에 어떤 사상이 선점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약 200년쯤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유일신 사상으로 인해 타 종교와의 많은 종교적 갈등을 가져왔다. 적은 범위로는 각 가정에서 제사나 장례절차 등에 있어서 가족 간 종교차이로 많은 문제점이 노정되고 있으며 아울러 사회적으로는 타 종교를 음해하는 사건들이 비일 비재하다.
본인은 지금까지 본인 스스로 관심을 가져온 인간들의 의식영역의 관념적 선점권과 진실·진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중세 유럽의 중심사상이 된 역사적 과정, 기독교가 내세 중심사상으로 흐르면서 유럽 문화에 끼친 영향, 중세 기독교사상의 분열과정과 근대사회의 출현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중세 기독교 교리 타파 과정이 바로 근대화로 가는 지름길이었음을 음미함으로서 인간들에게 지배하는 진리관은 단지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 착시현상에서 오는 것임을 밝히고, 아울러 본인이 믿는 종교를 강조하다보니 타 종교와의 갈등관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함으로서, 나아가 집안에서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종교적 갈등관계를 줄여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을 쓰는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서양에서 기독교가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AD392년 데우도시우스 왕의 기독교를 국교화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중세에 이르러서는 내세중심사상으로 흘렀으며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중세는 암흑세계가 되었던 것이다. 암흑세계에서 탈출하여 근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로 흐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기독교 교리 타파에 의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재음미해 볼 때 인간들은 어떤 종교나 사상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 종교나 진리가 옳아서 라기 보다는 단지 그것이 도그마화 하여 자신의 의식 영역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랬을 때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게 되고 그럴 때 이 사회는 종교 분쟁과 같은 사회적 갈등을 가져오지 않고 더 밝은 사회가 되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이 논문은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에 나오는 弗矩內의 의미와 상징을 밝혀 신라인의 내세관과 우주관을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라 천하관의 밑바디인 弗矩內는 출생과 죽음 그리고 재생·부활이라는 우주 관인 ‘뉘’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여기서 弗矩內 뉘란 혁거세와 김알지가 자주빛 알이나 자주빛 구름에 싸인 황금 궤에서 출생하여 대릉원의 주인공들처럼 금관 을 쓰고 죽음여행을 하며 다시 우주새가 되어 천상으로 갔다가 난생으로 재생· 부활하는 순환 고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