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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established the natural environment in Yong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en Hokuk Shrines. In the colonies, the establishment of shrines strongly tended to symbolize Imperial Japan and visually represent its ruling logic.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place to commemorate soldiers who died for the Emperor and as a tool of colonial rule, but further discussion is needed on how it was organized within the Yongsan. This study focuses on Hokuk Shrine planning under which the Shrine Bureau of Home Ministry constructed similar shrines across Japan by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Ordinance No. 12 of 1939. As a result, this study examines the environment and architectural styles of Hokuk Shrines through examples from Japan and uses this analysi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seong Hokuk Shrin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Yongsan.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lies in highlighting the historical urban significance of Yongsan during the modern period.
        4,500원
        2.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Jogyeongmyo Shrine is the Sijomyo Shrine of the Joseon royal family. It is a representative building that symbolizes Jeonju, the hometown of the Joseon royal family. This study comprehensively analyzes a variety of literature, old maps, and figures, and it investigates the meaning of Jogyeongmyo Shrine as an architectural example as well as its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The Jogyeongmyo Shrine was built to symbolically demonstrate the superior virtue of the royal ancestors compared to the ancestors of the gentry. King Yeongjo built Jogyeongmyo Shrine, which he considered his greatest achievement, to raise the status of the royal family and exact loyalty from the vassals. Jogyeongmyo Shrine is a unique example of an ceremonial architecture that cannot be observed in China or the previous Korean dynasties. In addition, its architecture looks different from that of ordinary shrines because both Confucian ceremonies and the function of each building were taken into consideration during construction. Although Jogyeongmyo Shrine was preserved without significant changes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major modifications were made in all areas except the main shrine a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4,000원
        5.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 월 18일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663 년 9월 7일 주유성(州柔城)이 함락되어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 고 두 번 다시 선조들의 무덤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기록되어 있다.1)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그‘부여(扶餘)’땅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영구화를 위한 내선일체의 영지를 표 방하는 ‘부여신궁’이 조영되었는데, 이 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 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계획되고, 공사 진척을 위해 전국적 으로 동원된 인원들과 그들의 봉사일정 등을 언론에 발표된 내 용을 중심으로 시간대별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사 라졌던 부여신궁 본전 설계도를 입수하여 살펴보고, 현재 입구 가 거의 막힌 채 남아 있는 지하 터널의 용도와 설계도에서의 위치를 추정하여 본다. 기억하기 싫은 뼈아픈 치욕의 역사도 정확히 기억하고, 이를 극복하는 노력이 없으면 되풀이하는 실수를 범할 수가 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그때 당시를 적확히 찾아 기록하여 후대의 거울로 삼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리라.
        7,700원
        7.
        2017.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일제 식민지기 국가신도에 관한 연구는 식민지 조선에 일본의 국가종 교를 이식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이로 인해 민족 정체성의 말살을 강요당한 피식민지인이라는 이항적 대립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국가신도는 메이지 유신 이래 황실신도와 신사신도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국가제사 체제로서, 국가신도와 관련된 식민주체들은 그들의 다양한 목적을 위헌 경함의 장(場) 속에서 소위 국가신도의 이식을 실천 해왔으며, 그들 개개인의 실천적 행위는 ‘국가신도의 강제’라는 단일한 사회적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일제식민지기 신사(神社)는 크게 일본거류민에 의해 창건된 거류민신사와 식민정권에 의해 건립된 관공립신사로 나눌 수 있다. 한일병합 이후 식민정권에 의해 건립된 조선의 총진수인 조선신궁 및 각 지방의 총 진수로 건립된 지방신사가 황민화를 위한 신사참배와 국가제사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반면, 일본거류민에 의해 창건된 거류민신사는 대부분 한일병합 이전 거류민의 종교적 필요성에 의해 건립되었다. 아오이(靑井 哲人)에 따르면, 조선 내 일본거류민신사는 1915년까지 총 25개, 요배소가 총 6개 창건되었으며, 요배소를 포함한 총 31개 신사 중 4곳을 제외 한 27개의 신사가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봉제했다. 본고에서는 일본거류민과 거류민봉제신사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한성부에서 최초로 건립된 거류민봉제신사 남산대신궁을 연구대상으로, 한성부 내의 일본거류민의 사회적․종교적 삶을 재조명하면서 그들에게 있어 신사의 함의를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남산대신궁의 제신 및 제사의 민간종교적 성격, 즉 신사제사의 세시풍속․일생통과의례 및 영적 인위안을 위한 의례적 측면의 고찰을 통해 국가신도의 종교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동안 황민화 수단의 사회적 기관으로 일축되어온 국가신도의 제신(祭神) 및 제사의 종교성을 고찰하고, 기존에 논의 되어온 국가신도의 단일성을 넘어 국가신도에 대한 일본거류민의 계층적 경험의 다양성을 제시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6,900원
        8.
        201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구온난화에 따른 한반도 식생구조의 변화에 맞추어 미황사 사찰림의 현 식생구조분석과 종다양성을 고려한 사찰림의 식생학적 구조분석과 적합한 식생구조 선정 및 관리를 위한 연구를 실시하였다. 본 연구는 식물사회학적 식생구조분석, 식생단위와 환경변수와의 상관관계, 생활형구조분석, 종다양성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현 사찰림은 식물사회학적 식생구조 분석결과 졸참나무-굴참나무 군락, 붉가시나무군락, 팽나무군락의 식생단위로 구분되었으며, 환경변수 Ca, Mg, P 의 기준에 따라서 팽나무군락과 나머지 군락들(졸참나무-굴참나무군락과 붉가시나무군락)의 두 영역으로 분포하였다. 또한 환경변수 유기물(OM), Ni, Zn 에 따라서 졸참나무-굴참나무군락과 붉가시나무군락의 분포와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졸참나무-굴참나무 군락과는 양의 상관관계를 붉가시나무군락과는 음의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형 R1-2 식물인 조릿대가 관목층 이하에서 우점하고 있으며, 저층부의 종의 단순화를 이루고 있다. 종다양성은 졸참나무-굴참나무 군락이 붉가시나무 군락에 비하여 더 높게 나타났으며, 상록활엽수림으로 이루어진 남은사에 비해서 본 미황사 사찰림의 종다양성이 높게 나타났다. 식물사회학적 분석결과를 통한 식생군락, 조릿대에 의한 저층부 이하의 종의 단순화, 종다양성 및 종균재도를 고려한 미황사 사찰림의 장기적 식생관리가 필요하다 사료된다.
        5,800원
        9.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① 詩題: <和國信張宗益少卿過潭州朝拜信武殿> 潭州: 文淵閣本과 中華書局本의 《蘇魏公文集》에서의 표기는 모두 “潭州”이지만, 이는 “澶州”의 오기이다. 潭州는 湖南省의 長沙를 가리키는데, 이 潭州는 北宋 元豊3년 이전의 奉使路線과는 동떨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澶州에는 眞宗의 神御를 모신 信武殿이 있었고, 蘇頌에 앞서 出使했던 劉敞과 沈遘가 澶州에서 澶淵之役을 회상하며 각각 〈朝謁信武殿二首〉와 〈信武殿〉을 지었다는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張宗益: 蘇頌의 〈前使遼詩〉와 韓琦․文同 등의 시로부터 그가 熙寧 원년을 전후하여 澶州․河間府 (및 相州) 등지에서 봉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北宋 河北路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胡宿은 그를 河北東路 방어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있다. ② 제1․2구: “夷裔陵邊久, 文明運算高.” 北宋 외교정책의 고명함을 찬양한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③ 제3․4구: “三冬馳日御, 一夜隕星旄.” 眞宗의 澶州 親臨과 遼나라 장수의 사망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각각 沈遘의 〈信武殿〉 및 王安石의 五古와 七古의 〈澶州〉 두 수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④ 제5․6구: “從此通戎賂, 于今襲戰袍.” 澶淵之盟의 결과 遼나라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읊고 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⑤ 제7․8구: “威靈瞻廟像, 列侍冩賢豪.” 信武殿에 안치된 眞宗과 신하들의 초상화를 보고 그 모습을 찬양한 것이다. 劉敞이 〈朝謁信武殿二首〉에서 각각 眞宗과 寇準의 초상을 찬양한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⑥ 제9․10구: “民獲耕桑利, 時無斥堠勞.” 평화의 결과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요나라에서 침공해 올 염려가 없어졌다는 점을 묘사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⑦ 제11․12구: “金繒比干櫓, 未損一牛毛.” 遼나라에 보내는 歲幣는 무기의 비용보다 훨씬 작다는 점을 강조하며 遼나라와의 평화관계를 찬양한 것이다. 필자의 의견은 기존의 해설과 같다. 단 “干櫓”를 中華書局本에서는 “千櫓”라 표기했고, 〈蘇頌使遼詩注釋〉에서는 “櫓”를 “望樓”로 풀이했지만, 그럴 경우 “櫓”는 제10구의 “斥堠”와 의미상 중복된다. 文淵閣本의 표기인 “干櫓”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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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Bong-amsa Temple is a special temple in the custody of Jogye sect, a branch of Buddhism in Korea. Due to limited public access to this temple, its Geungnakjeon(paradise shrine) has been little known to outside. But it is known that the Geungnakjeon has been not yet explored from academic standpoints in terms of its historical establishment as well as applications, and it would be two-storied wooden pagoda or the like. In order to examine its historical establishment, this study investigated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Bong-amsa Temple and its intrinsic architectural style. As a result, it was estimated that the building was established around the transitional period ranging from the late Kory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it was found that the Geungnakjeon is not the two-storied wooden pagoda, but the unique building including an incidental component called Chayanggan(遮陽間; a sort of stepped penthouse) in Korea. In order to examine its possible applications, this study compared this building with other Buddhist funeral articles in forms similar thereto, such as Buddhist pagoda(僧塔), sarira container(舍利器) and Gamnodo(甘露圖) which depicts Byeoknyeon Daeban(碧蓮臺畔; a palanquin carrying malignant spirit). Then, this study estimated its possible applications on the basis of relevant historical literatures.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is building was used as Wondang(願堂; a sort of Buddhist prayer house) to wish royal family's going to Nirvana after death, and it was not Confucian-style architecture popularized in the era of Joseon dynasty, but Buddhist-style architecture built widely from the era of Kory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4,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