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호암동유적은 금강유역과 남한강유역,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는 데, 적석목관묘는 기원전 2세기 초, 목관묘 2기는 기원전 2세기 전·중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적 분석 결과,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은 구리-주석-납의 3원계 합금으로 추정되며,『주례』고 공기의 금유육제와 비슷한 비율로 주조되었다. 이는 호암동유적의 청동기들이 기능과 용도에 따라 적 합한 성분조성비로 주조되었음을 나타낸다.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토대로 한 원료산지추정 결과 중국 북부산 4점, 남한3지구산 10점, 남한2지구산 6점으로 추정되어서 청동원료가 넓은 지역에서 수급되 었음을 보여준다. 충주 호암동유적은 세형동검문화의 중심부인 중서부지역과 원료산지인 남한2지구(강원 동남부-경 북 동북부지역) 사이에 자리해서 무덤 피장자들이 청동원료를 수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세형동검문화가 일본열도로 파급되는 시기는 호암동유적의 유이식동모보다 늦은 시기로 추정되므로 발전Ⅰ기 말보다는 발전Ⅱ기 초로 생각된다. 호암동 적석목관묘의 무기류는 “원격전용 투사무기+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조합 을 이루고 있어서 충주지역이 군장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기조합이 원삼국시대 토 광묘로 이어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ondol (Korean floor heating system) at Hoeamsa Temple Site is known as Joseon. The main reason is that a large number of remains in the Joseon era were excavated from the ondol floor with an all-around ondol method. This article partially accepts the theory of the creation of Ondol at Hoeamsa Temple Site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suggests a new argument that some Ondol remains were built during the Goryeo Dynasty. The grounds for them are as follows. First, through the building sites consistent with the arrangement of the Cheonbosan Hoeamsa Sujogi (天寶山檜 巖寺修造記, Record of Repair and Construction of Hoeamsa at Cheonbosan Mountain),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ondol remains as a basic floor was maintained during the reconstruction period in Goryeo. Second, the all-around ondol method of the Monastery Site has already been widely used since the Goryeo Dynasty. Third, some ondol remains consist of "Mingaejari" and "Dunbeonggaejari," which were the methods of the gaejari (which dug deeper and stayed in the smoke) in the pre-Joseon Dynasty. Based on the above evidence, this study argues that the building sites such as Dongbangjangji, Seobangjangji, Ipsilyoji, Sijaeyoji, Susewaryoji, Seogiyoji, Seoseungdangji, Jijangryoji, and Hyanghwaryoji were constructed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To calculate proper seismic design load and seismic design category, the exact site class for construction site is required. At present, the average shear-wave velocity for multi-layer soil deposits is calculated by the sum of shear-wave velocities without considering of vertical relationship of the strata. In this study, the transfer function for the multi-layered soil deposits was reviewed on the basis of the wave propagation theory. Also, the transfer function was accurately verified by the finite element model and the eigenvalue analysis. Three methods for site period estimation were evaluated. The sum of shear-wave velocities underestimated the average shear-wave velocities of 526 strata with large deviations. The equation of Mexican code overestimated the average shear-wave velocities. The equation of Japanese code well estimated the average shear-wave velocities with small deviation.
연속적인 맥락에서 보이는 아름답거나 흥미있는 현상, 자연특질에 있는 장소를 ‘경승’ 또는 ‘승경’이라 한다. 또 승지, 승구, 승소, 승적과 유사한 의미로 ‘명승’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명승’은 동양의 대표경관으로 현재 중국, 일본, 대만, 남‧북한이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한반도 명승의 최초 유행은 그동안 중국에서 유래된 소상팔경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상팔경도는 북송시대 송적이 그리기 시작하여 널리 유행하여 명승을 소재로 한 산수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팔경문화는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승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팔경은 명승을 바탕으로 이를 향유한 계층인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선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부터 ‘송도팔경’과‘신도팔경’등이 유행하면서 승경을 팔경화하는 고유 팔경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명승의 시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의 일반적 현상이라 취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명승이 여말선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면 최초의 명승 개념은 어디서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유행한 명승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심층적 고찰이 요구된다.
근대기 국가차원에서 법령이 마련된 것은 1933년 조선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에서 출발한다. 그 후 우리나라 명승은 1946년 북한이 먼저 자체 법령으로 분리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으로 남한이 자체의 법령을 배포함으로서 최초의 자주적 법령체제가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명승지정보호 활성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까지 1970년에 최초로 지정된 명승은 국보나 보물, 사적 등의 보존관리에 치중하던 문화재정책으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채 유지되어 왔다. 명승 문화재를 지정하던 초기에는 사적과 차별적인 다른 문화재 주변의 자연환경을 포함한 대면적의 문화재라는 개념을 반영하는데 그쳐 과거 전래명승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현장조사 등 과거 우리 명승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집경형식의 연속경관 형식을 취한 팔경은 국토개발로 인해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명승의 대표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내 명승은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부지식인층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명승 관련 정보가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동양 고유의 문화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해방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점차 그 수가 사라져갔고 1970년 최초의 명승이 지정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전래명승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명승 지정시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명승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 접근으로 한반도내 유행했던 지식인층이 저술한 명승관련 문헌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해 한국명승의 개념 확립과 변화 과정 속의 나타난 특징을 발견하는데 기초자료 구축을 목적하고 있다. 연구방법은 시대별 사회 지식인층이 작성한 문헌자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주요내용을 기술하였다.
먼저 고려시대에 나타난 명승에 대해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명성을 떨쳤지만, 원림을 중심으로 한 정원문화와 명승을 유람하고 감상하는 활동도 유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현전하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경향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명승 문화가 발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기정사실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이 명승을 유람하고 유람기 등으로 남긴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고 그중에서 금강산은 당대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1) 2월에 안축(安軸)이 쓴 『근재집 』 권1, 의「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에 명승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오늘날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미를 자랑하는 곳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처음 경포대가 건립될 당시에는 사실상 무명의 공간에 불과했고 고려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금강산과 총석정만을 명승으로 손꼽았다. 안축에게 태정(泰定) 병인년(1326, 충숙왕13)에 지금의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 공이 관동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경포대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박숙은 영랑의 정자터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다시 짓고 이 곳의 장소성을 부각시켰다. 이 사건은 고려시대에 명승적 개념에 입각한 사고의 기록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게 한다.
안축의 명승에 대한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사물 중에 대체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이치를 담고 있다. 크게는 산수, 작게는 조그마한 돌멩이나 한 치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이 사물을 둘러보고 흥취를 붙이고 이를 통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이것이 누대와 정자가 만들어진 까닭이다. 형상이 기이한 것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여 눈으로 완상할 수 있고, 이치가 오묘한 것은 은미한 곳에 숨어 있어서 마음으로 터득한다. 눈으로 기이한 형상을 완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모두 같아서 한쪽만을 보고, 마음으로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군자만이 그렇게 하여 그 온전함을 즐긴다. 하고 그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명승경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내용도 나타난다. 경포호(鏡浦湖)는 맑고 깨끗하여 바람 따라 잔물결이 찰랑거렸다. 멀리 있는 산은 골짜기가 천 겹이어서 구름과 이내가 아득하였고, 가까이 있는 산은 봉우리가 십 리에 뻗어 초목이 푸르렀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나타났다 잠겼다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대(臺) 앞에서 한가하게 놀았다. 봄 가을의 안개와 달, 아침저녁의 흐리고 갬이 이처럼 때에 따라 기상이 변화무쌍하다. 이것이 이 경포대의 대체적인 경관이다. 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명승은 유학의 발달에 힘입어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공자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고 한것은 기이한 것을 완상하여 한쪽만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함을 터득하여 온전함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명승을 즐겼으며, 이는 ‘명승문화’ 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유교적 자연관과 수련문화가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명승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명승 유람을 통하여 자연과 친화함으로써 산수지락(山水之樂)의 감흥과 인지지락(仁智之樂)의 경지를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명승을 향유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나 활동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일체감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실천 활동이었다. 명승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임경제지’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중 ‘임원 경제지’ 이운지 편에는 명승을 여행할 때 갖추어야 할 행장과 재료, 용도, 제조법, 가치, 사용법, 효과 등 명승의 여행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명승의 유행정도를 알 수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보면 “여러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좋은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라고 명승의 개념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명승 문화의 유행은 ‘청구남승도’ 놀이에도 응용되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녀자나 유생들에게 전국 각지의 명승 120곳을 놀이판에 담아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정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도 했다.
근대시대의 명승은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추적이나 평가, 근대문물과 함께 유입된 유원지 문화가 명승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내용들은 일본인이나 신지식인들에 의해 책자로 발간되는 일이 잦았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명승・고적과 관련된 비롯한 다양한 서적은 조선시대 지리지 등 고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 1915 』의 서문에서 조선시대 명승관련 고서를 탐구하여 집대성한 결과를 밝히고 있는 대표사례에 해당된다. 명승에 대한 보호체계가 시작 된 것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관련 법령과 정책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먼저 일본에서 제정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을 기준으로 1922년에 11개소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을 통해 ‘고적 및 명승’ 5건과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정되었던 명승은 현재 사용하는 명승 문화재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였다. 현재 통용되는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명승’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에 대두되었다. 명승기정기준은 1962년에 제정되었고 1979년에는 7개소만이 명승으로 지정되었었다. 한국의 명승은 유형별로 산악형, 계곡형, 하천형, 도서해안형, 원림형, 옛길형, 산업형으로 구분되고 최근 문화경관적 가치가 확대되어 지정시 반영되고 있다. 2018년 한반도내 명승은 총 111개소에 달한다. 전래 명승의 고찰을 통한 한국 명승만의 특성이 명승 지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While going into troops for writing in the vignette style(小品文) in opposition to the Classical Chinese(古文), Yi Ok stopped by Songgwangsa Temple in Wanju. The things he felt during this stop were recorded in the Temple Chapter ( 寺觀) written in 1795. Therefore, the present dissertation evaluate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time based on this Temple Chapter . Data in the Temple Chapter draws attention to the fact that it records the layout of the temple in detail. Thus the study was able to confirm the change in layout by reviewing relevant records about repair. This reveals that the form of layout in general has been maintained although there were changes involving the relocation of the buildings and their names. Furthermore, the original Buddhist building was changed to a quarter for the monks. Also, in terms of layout after the 18th century, there are frequent name changes of the Myeongbujeon(冥府殿) and Nahanjeon(羅漢殿). After two repairs, in order to find the appearance of a Daeungjeon(Main Buddhist hall) with a two-storied structure of five bays at the front, the study evaluated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e Daeungbojeon at Magoksa Temple. The evaluation revealed that the ‘Jeol’ used in the Temple Chapter were small pillars erected on a ridgepole just like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at the angle rafters were installed to corner bays in rectangular form. The intellectual Yi Ok left behind invaluable architectural data that reveal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18th century.
We present photometric results of the Sct star V1162 Ori, which is extensively monitored for a total of 49 nights from mid-December 2014 to early-March 2015. The observations are made with three KMTNet (Korea Microlensing Telescope Network) 1.6 m telescopes installed in Chile, South Africa, and Australia. Multiple frequency analysis is applied to the data and resulted in clear detection of seven frequencies without an alias problem: five known frequencies and two new ones with small amplitudes of 1.2-1.7 mmag. The amplitudes of all but one frequency are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previous results, confirming the existence of long-term amplitude changes. We examine the variations in pulsation timings of V1162 Ori for about 30 years by using the times of maximum light obtained from our data and collected from the literatures. The O − C (Observed minus Calculated) timing diagram shows a combination of a downward parabolic variation with a period decreasing rate of (1/P)dP/dt = −4.22 × 10−6 year−1 and a cyclic change with a period of about 2780 days. The most probable explanation for this cyclic variation is the light-travel-time effect caused by an unknown binary companion, which has a minimum mass of 0.69 M⊙. V1162 Ori is the first Sct-type pulsating star of which the observed fast period decrease can be interpreted as an evolutionary effect of a pre-main sequence star, considering its membership of the Orion OB 1c association.
It was believed that Jeongnimsa temple was built after the capital was moved from Gongju to Buyeo. It was confirmed that it was built A.D. 625 ± 20 by conducting a paleomagnetic analysis on the fireplace, which was recently found at the bottom of Jungmunji(middle gate). Consequently, it is assumed that the temple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unlike the previous point of view. Therefore, this study evaluated if the fireplace at the bottom of Jungmunji was found at the geological stratum representing the Jeongnimsa temple. Moreover, the study examined when the fireplace at the bottom of Jungmunji was constructed on the soil stratum. It is possible that the fireplace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as shown in the paleomagnetic analysis. However, when we compared the soil strata of the Jungmunji and the existing five-story stone pagoda, it showed that the ground was prepared differently and they were built over a fairly long period of time. Furthermore, I discovered that there was a wooden pagoda under the five-story stone pagoda by examining the soil strata map. Therefore, previous studies evaluated the arrangement of auxiliary buildings of Jeongnimsa temple and concluded that it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It is hard to determine when the temple was built based on the arrangement of auxiliary buildings, because it takes a long time to build a temple and auxiliary buildings can be relocated during this long construction period. Rather, we have to admit that there are various arrangement patterns through minor changes in buildings from the one pagoda and one main building(Geumdang) arrangement.
서 론 일부 맹금류들은 도시의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성공적인 번식력으로 놀라운 적응력을 나타내고 있다(Bird et al., 1996). 맹금류가 도시에서 서식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먹이 공급과 번식기 때 영소지로 이용이 가능한 인위적인 구조물 즉 빌딩의 틈, 철탑, 교각 등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 또는 북아메리카에는 매(Falco peregrinus), 황조롱이 (Falco tinnunculus), 참매(Accipiter gentilis), 붉은꼬리말 똥가리(Buteo jamaicensis), 붉은어깨말똥가리(Buteo lineatus) 등 다양한 종이 도심을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이들 종 중 황조롱이는 유라시아 대륙에 폭넓게 분포하며, 산야나 주택가를 가리지 않고 서식하기 때문에 인가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관찰되는 종이다. 본 연구는 도 시에서 발견되는 황조롱이의 이소 시 유조를 근거로 황조롱 이의 도시 내 번식 시기 및 기간, 이소 유조의 성장률과 영소지로서 이용되는 도시의 인공구조물의 종류 및 영소지 에서 녹지까지의 거리 등 영소지 선택 특성을 파악하고자 실시하였다. 연구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부산(A)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접 도시인 울산(B)과 김해(C)지역의 자료도 참고하였다(그림 1). 3개 연구지역의 지리적 범위는 동경 128° 41′47″~129° 27′47″, 북위 34° 53′12″~35° 43′19″에 포함되며, 행정구 역상 부산광역시 및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김해시에 해당한 다. 동물지리구상으로 구북구 지역(Paleoarctic region)에 속하며, 산림식물대상으로 온대림에 속하는 지역이다. 황조 롱이 이소 후 유조의 성장에 관한 조사는 2009년부터 2010 년까지 2년 간 황조롱이의 이소 시기인 5월부터 8월까지 사육 환경에서 조사하였다. 황조롱이 이소 유조의 구조에 따른 번식 기간 및 번식지 주변의 환경 조사는 1999년 1월 부터 2007년 12월[부산 경성대학교 조류관(천연기념물치 료센터)]과 2009년 1월부터 2010년 12월(부산야생동물치 료센터)까지 자료 수집과 구조 장소에 대한 현장 조사를 실시하였다. 2009년 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2년 간은 B(울산), C(김해) 2개 지역의 조사도 함께 하였다. 조사대상 은 야생동물치료센터에서 황조롱이의 번식기 동안 구조되 는 알, 유조 등을 선별하여 현장 조사를 하였고, 현장 조사 시에는 구조 시점, 둥지의 구조 및 지점의 주소와 좌표를 기록하였다. 먼저 유조의 이소기간을 조사하였고, 국내․외 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여 번식초기 행동기간, 산란기, 포란 기, 육추기로 나누어 전체의 번식기간을 산출 하였다. 이소 유조의 성장조사는 부산야생동물치료센터에서 황조롱이의 이소시기 때 구조되는 이소 유조들 중 건강하고 이상 증세 가 없는 개체들을 선별하여 측정하였다. 이소 유조의 측정 은 이소 후 측정과 성장완료 후 측정으로 성장량을 분석하 였다. 측정부위는 전장(Total length), 익장[Wing length (Maximum length)], 부리(Bill), 부척(Tarsus), 체중(Weight) 이며 측정은 Svensson(1992)의 방법을 따랐다. 영소지에 대 한 조사는 구조된 지점에서 둥지를 확인한 경우 ‘둥지 확 인’, 둥지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둥지 미확인’으로 구분하 였다. ‘둥지 확인’의 경우 둥지로 이용한 구조물의 종류에 따라 건물 및 까치둥지로 구분하였다. 건물은 아파트의 베 란다 및 건물의 틈(구멍)으로 구분하였으며, 까치둥지는 둥 지의 위치에 따라 철탑, 건물, 나무의 까치둥지로 구분하였 다. 영소지에서 녹지까지의 거리는 지도상에서 둥지 지점 또는 이소유조가 구조된 지점의 좌표로부터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녹지(도시 외곽)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를 ‘m’ 단위로 산출하였다. 통계분석은 SPSS 통계분석 소프트웨어의 카 이제곱 검정과 t-검정 및 회귀분석을 이용하였다. 결과 및 고찰 1. 도시 내 예측 번식기간 1999년에서 2010년까지 12년간의 조사에서 전체적인 이 소 시기는 5월 전반기(2건, 1.27%)에서 8월 전반기(1건, 0.64%) 이었으며, 대부분은 5월 후반기에서 6월 후반기로 나타났다. 이소는 6월 전반기가 62건(39.49%)으로 가장 높 았으며 5월 후반기 45건(28.66%) 6월 후반기 33건 (21.02%)순이었다. 2009년에서 2010년까지의 조사에서 황 조롱이 이소 유조의 구조에 따른 이소 시기는 5월 전반기(1 건, 1.35%)에서 7월 전반기(6건, 8.11%)까지 이소시기를 보였다. 연간 이소율이 가장 높은 시기는 7월 전반기(31건, 41.89%)이었다. 이소시기를 지역별로 보면 A(부산)지역은 5월 전반기(1건, 2.22%)에서 7월 전반기(5건, 11.11%)까 지, B(울산)지역은 5월 후반기(9건, 20%)에서 6월 후반기(2 건, 11.11%)까지, C(김해)지역은 5월 후반기(5건, 45.45%) 에서 7월 전반기(1건, 9.09%)까지 이었으며, 이소율이 가장 높은 시기는 A지역은 6월 전반기(22건, 48.89%), B지역은 5월 후반기(9건, 50%), C지역은 5월 후반기(5건, 45.45%) 로 나타났다. A(부산), B(울산), C(김해) 지역 간 유조의 이 소 시기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 다(x²-test, p=0.084). 황조롱이의 예측 번식기간 산정을 위 해 ①번식초기 행동기간, ②산란기, ③포란기, ④육추기로 나누어 국내․외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번식초기의 행동기간을 구애 및 최초 교미 시기부터 정하였 다. 황조롱이의 번식기간 산정을 번식초기 행동기간, 산란 기, 포란기, 육추기 4단계로 나누어 국 내․외의 연구 자료를 참고한 결과 번식초기의 행동을 보이는 기간은 최저 7일에 서 최고 21일인 것으로 조사되었다(Korpimaki, 1985; Village, 1990; 원 등 2005; Vergara et al., 2007). 산란기간 은 최소 3일에서 최고 12일인 것으로 조사되었고 (Kirkwood, 1980; Zyl, 1999; 원 등, 2005; Neve et al., 2008; Costantini et al., 2010), 포란기는 최저 26일에서 최 고 31일로 조사되었으며(Village, 1990; Bustamante, 1994; Morioka et al., 1998; Zyl, 1999, Costantini et al., 2010), 육추기는 최소 27일에서 최고 36일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Village, 1990; Bustamante, 1994; Morioka et al., 1998; Zyl, 1999). 따라서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최소 산정된 번식기간은 63일 이었으며, 최대 산정된 번식기간은 100일 이었다. 본 연구의 1999년에서 2010년까지 조사된 이소기 간에서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산정한 번식기간을 감한 결과 번식을 위해 도시에 머무는 기간은 최대는 1월 후반기부터 이며, 최소는 3월 전반기부터 시작하여 8월 전반기까지인 것으로 예측이 가능하였다. 이소 후 독립까지의 기간은 외 부 환경에 대한 간섭이 크고 서식지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 로 본 연구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소 직후 안전한 비행은 어려우므로 Zyl(1999)의 연구와 같이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둥지 인근에 머물 것으로 생각되지만, 비행 능력 획득 후에는 보다 나은 채식 활동을 위하여 도시 외곽으 로 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이소 유조의 성장률 이소 직후와 성장 완료 후 부위별 성장치를 조사한 결과 전 장 12.69%(46.04 ±23.50mm), 익장 18.6%(46.29 ±23.62mm), 미장 27.19%(45.87 ±22.15mm), 부리 11.11%(1.13 ±0.65mm), 부척0.03%(0.02 ±0.81mm), 체중 5.28%(13.69 ±37.61g)의 성장률을 보였다. 체중을 제외한 전장, 익장, 미장, 부리, 부척은 이소 후 평균 13.92%가 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으 며, 결과적으로 이소 시의 길이 성장률은 평균 86.08%인 것으로 나타났다. 원 등(2005)은 황조롱이의 부화 후부터 이소 전까지의 길이 성장률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부리와 부척은 이소 전에 성장이 둔해진 반면 전장, 익장, 미장은 성장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장이 완료되지 않은 시 점에서 이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체중은 이소가 가까워지면 서 최고점을 지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본 연구에서도 전장, 익장, 미장은 약 23%정도의 성장이 있었고, 부리도 약간의 성장이 확인되었다. 반면 부척은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 다. 체중을 제외한 전장, 익장, 미장, 부리, 부척의 전체 성장 률은 13.92%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소 시의 평균 성장률 은 86.08%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3. 둥지 구조물 및 영소지에서 녹지까지의 거리 1999년에서 2010년까지 12년간의 조사에서 총 구조는 170건이었다. 이중 둥지 확인은 34건(20%)이었고, 둥지 미 확인은 136건(80%) 이었다. 확인된 둥지 구조물의 유형은 건물 21건(61.77%), 까치둥지 13건(38.23%)으로 건물의 둥지수가 더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건물 중에는 건물의 틈 이 14건(41.18%)으로서 아파트의 베란다 7건(20.59%)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까치(Pica pica)둥지의 유형별로는 철재 탑 8건(23.53%), 나무 4건(11.76%), 건물의 까치둥지 1건 (2.94%) 순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도시 황조롱이의 둥지 구 조물은 건물 또는 까치둥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총 170건 중 건물 주변에서 발견된 136건(80%) 모두 건물에서 번식 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모두 도시지역 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도시의 인위적 시설물 또는 까치둥지와 연관성 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현장에서 확인된 34건의 분석결과도 빌딩을 이용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 것은 이러 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치둥 지 또한 철탑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영소지의 기반이 되는 구조물은 결국 도시의 인위적 구조물들과 연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1999년에서 2010년까지 조사한 영 소지에서 녹지까지의 거리는 0 - 300m가 67건(50%)으로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숲 가장자리에서 거리가 멀어 질수록 둥지 수는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냈다(y = -1.6924x + 22.805, R² = 0.7816, n=134, P < 0.01). 따라서 영소지로 이용하는 것은 도심의 인위적인 구조물들을 좋아하나, 도심 의 안쪽 보다 바깥쪽으로 갈수록 영소지의 비율이 높은 것 은 새끼의 양육을 위한 채식지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 각된다. 그러나 먹이를 구하는 장소가 황조롱이의 습성 상 나무가 우거진 숲속과는 관련이 없으며, 숲 밖의 창공 또는 나무가 없는 변두리, 개활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의 결과를 보면 영소지로서 선호하는 구조물들이 도시 내에 있기 때문에 번식을 위해서는 도시 내로 들어오 지만, 채식지는 도심 보다는 도시 외곽을 더 선호하기 때문 에 영소지와 도시 외곽의 거리가 가까운 곳에 둥지를 더 많이 짓는 것으로 생각된다. 황조롱이는 둥지의 구조물로서 건물, 철탑 등 인위적 건축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도시 환경에 잘 적응한 대표적인 맹금류의 한 종으로 사료된다. 인용문헌 원일재, 조삼래, 백충렬. 2005. 황조롱이(Falco tinnunculus)의 번식 생태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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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udy intends to investigate the measuring scales, locations and scales through arrangement plans for a research on construction plans. Through an analysis of the artifacts-measuring scales, the relation of two scales found, which further helped suppose the measuring scales applied during the foundation period. Southern dynasties-scale was still used even after the capital was transferred to Sabi till Tang-scale was introduced. Tang-scale was used for Buddhist temples mostly founded in the 7th century. On the other hand, Goguryo-scale seemed to be used almost at the same period as Southern dynasties-scale used, but it seemed that Goguryo-scale disappeared earlier than Southern dynasties-scale. The locations of Buddhist temples could be classified into mountains, flatlands and mountain valley. Buddhist temples founded in mountains were mostly small-sized, but ones located on flatlands could secure flat fields through mounding operations. In addition, through location conditions of Neungsa and Wangheungsa, it was possible to find out the district setting of Sabi Capital Castle. Finally, the expansion range of Buddhist temples were found to be towards the east and the west. As for the scales of temples according to such conditions of location, it was found a similarity in Temple sites. In general, it was possible to assume that the scales of Buddhist temples tended to be expanded along with spatial expansion and there were regular systems in Buddhist temples related to the Royal family. Through the analysis of arrangement plans between individual buildings, it was found that the basic arrangement of Gate-Pagoda-Main Hall-Lecture Hall was preserved, but the proportion of distances between individual buildings varied depending on cases. As a result, there were differences between scales of entire building sites, construction subjective influences and master plan for each location of a Buddhist temple.
The examples of developing a building site after the Woongjin period are mainly found in temple sites, tile-roofed building sites of unidentified features, and palace remains including the pavilion site with the river in the front(임류각지) inside the Castle of Gongsan, Gongjoo,. In case of the Hanseong period, a glimpse of the features has been gained in Poongnab mud castle and Mongchon mud castle, but the excavated relics are not yet enough to make some data out of them. After the Woongjin period of Baejae, the earth-ramming development method was used mostly to construct a building site, which is divided into horizontal and slant raising of the ground level. Both are used simultaneously, but there are the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way of raising the ground level between them. Particularly, in case of the Wanggoong-ri relics in Iksan, the ground level was raised in a narrow line slantly, which is differentiated from other slant raising of the ground level, and its time of construction also is after that of others. In addition, the board-building development method used for narrow space is usually found in the remains since the seventh century. However, there are not enough the relics of Baekjae to reveal the whole aspect of building site development. It should be studied later through the subsequent excavation and research.
This study has been researched mainly about the gradual changing patterns of site plan and plan layout of 17 sampling traditional houses in kyungpuk province during the time period of 1877-1945.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closely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locality and trend of the times. Survey and Measured drawing, personal interviews with clients has been carried out and the result is as down below; 1.The certain changes have shown that the furnace in sarangchae(outer wing for men) in ㅁ shaped and 『』 shaped houses served only for that purpose and inner gate has been built in sideward of sarangchae. 2.As living standard was upgraded storage space and size of the rooms got bigger. On the other hand, spacial formation was emphasized by its function accordding to house activities and living circulation because the family members in direct line became reality of the time. 3.The modernistic thought of rationalism and convenience are well expressed in the plan layout and house living as a whol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se site natural period for estimating resonance of soil-structure. The natural period of seismic accelerometer installed site is calculated with HVSR(Horizontal to Vertical Spectral Ratio) proposed by Nakamura. To analyze natural period, a micro tremor is used at several sites. The result can be used for the study of soil-structure resonance, site classification and the site amplification effe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