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엇은 전혀 새로운 시인으로서 20세기 영미시에서 우리가 전혀 본적이 없는 시를 쓴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 특히 프랑스 시의 전통에 확고한 뿌리를 둔 시인이다. 반면, W.B. 예이츠는 자신이 상징이라고 정의한 시의 특성을 추구한 시인으로 영시나 아일랜드 시에서 금세기에서 조차 어떤 시인도 그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엘리엇에 영향을 준 프랑스 시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엘리엇은 프랑스의 새로운 시인들과 접촉하게 되어 독특한 시를 쓰게 된 것은 명확한 것 같다. 엘리엇은 시인 코르비에르에게서 프랑스 시인들이 무시하고 가치를 보지 못한, 프랑스 시의 전혀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이 글은 구하의 책에서 프랑스 시의 영향을 다룬다. 특히 트리스탄 코르비에르의 엘리엇에 대한 영향을 논하다. 코르비에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한 무명시인이었다. 엘리엇은 이 시인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시에 잘 사용하였다. 구하는 이점을 다룬다. 반면 예이츠는 불어시를 읽을 수 없었고 프랑스 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예이츠는 그의 산문에서 엘리엇의 새로움과 위대함을 지적한다.
도와 일본의 미학은 예술적 적합성에서 유사한 미적 보편성을 나타내며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인도와 일본 미학의 예술적 목적은 덕목, 즉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술의 미적 감상은 인도의 미학이 브라만의 직관적인 빛을 드러내는 동양의 텍스트적 행복에 초점을 맞춘다면, 일본의 미학은 공의 신비한 그림자를 찬미한다. 절대의식의 형태로 동양적 주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브라만은 절대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반면, 공은 허무주의적이지 않으며 종종 오해되는 불합리한 생각도 아니다. 그것의 실현은 예술에 대한 인식에서 통일성, 연속성, 조화 및 마음 챙김을 발생한다. 동양적 관점은 형태와 무형태의 초월적 의식에 의해 한계를 지니는데, 이것은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지각하는 가운데 명상한다. 이 논문은 T.S. 엘리엇과 W.B. 예이츠의 시를 통해 그들의 예술이 어떻게 빛과 그림자의 미학을 드러내며 동양의 철학적 의미를 창의적으로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시가 어떻게 초월적이고 세속적인 속성으로 열반에 도달하는지 탐구한다.
마야의 교리는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경험은 삶의 실제를 구성하는데, 마야는 세상의 그런 당혹스러운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하여 경험을 무지의 범위 안에 두어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의 일환으로 삼는다. 두 번째로 마야는 앞서 말한 사건과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면 해방을 제안하는 로고스를 창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피상적 경험의 출현을 겪지만 동시에 더 높은 수준에서 피상적 경험에게 변함없이 계속되는 실질적인 경험을 겪는다. W. B. 예이츠, T. S. 엘리엇과 W. H. 오든의 시에서 우리는 각 시인이 삶의 혼란스럽고 상충되는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야 교리와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 성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시인들은 각 개성에 따라 큰 투쟁을 하면서 통합과 행복을 가져오는 궁극의 경험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예술적 상황은 그것이 가져오는 이해가능성에 그 힘을 의존하며, 그런 이해가능성은 그 자체가 변형의 도구인 ‘정확하고’ 구체적인 양식을 통해 설명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힘바타(7세기 인도 이론가)와 아누마나와 관련된 그의 이론화 (추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첫째, 자연 속에서 계속되는 모순되지 않 는 보편적 관계(vyapti)에 의해 객체와 주체가 함께 결합될 때, 이 둘은 변모한다. 둘 째, 마힘바타는 연역법칙에 의해 필요에 따라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만 예술성이 보편화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의 예술적 경험의 이 두 가지 탁월하게 빛나는 전제를 바탕으로 예술성의 동시성과 전시를 낳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힘바타의 추론 이론에서 발전된 개념적 구 조를 바탕으로 W. B. 예이츠와 T. S. 엘리엇의 시를 읽을 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다. 예이츠의 시에서 육체와 영혼은 각각 작은 것과 큰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두 용어로 나타나며, 둘 다 퇴폐와 해방에 의해 결합되어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병존 (vyapti)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시에서 고통, 불임, 죽음은 육체와 관련되 는 용어이고 진리와 지식라는 용어는 영혼과 관련된다. 낮은 수준에 몸이 있고 높은 수준에 영혼의 내재가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병존(모순되지 않은 보편적 경험)이 있는 반면 몸은 영혼으로 발전한다.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마힘바타의 아누마나 (Anumana)에서 확립된 추론에 귀속된다.
몰개성은 경험의 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예술가의 입장에서 행하는 실천 이다. 그러한 진실한 경험은 현실과 아름다움을 모두 포함한다. ‘실재적’인 능력 안에 서 우리는 몰개성의 경험이 충만함과 전체성을 가져온다면 몰개성의 미적 상태가 더 큰 이해를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 S. 엘리엇, W. B. 예이츠와 존 키츠는 인 간 삶의 모든 의미를 ‘결집’하여 예술로 만듦으로써 ‘감수성의 메커니즘’을 고안하여 예술을 창조했다. 이 위대한 시인들에게 몰개성화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현상과 현실이 구별되는 방식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엘리엇은 일상의 경험을 단편, 무정부 상태 및 불규칙성과 동일시하지만 예이츠는 일상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경험을 대립적 으로 본다. 한편 키츠는 탐닉이 최대 상태의 일상의 사건들과 상황들로 일상을 위치시 킨다. 전체성의 출현이 연기되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리엇, 예이츠, 키츠 는 경험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인 ‘몰개성,’ ‘존재의 통일,’ ‘부정적 능 력’을 제시한다.
예언자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다양한 상징과 맥락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둘째,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일상적 차원을 초월한 문자 혹은 기호로서 기능한다. 시인이면서도 예언자적 특성과 문학적 상징을 사용했던 작가들의 목록은 매우 길다.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워드, P. B. 셸리 등과 같은 낭만주의 시인뿐만 아니라 밀턴이나 예이츠, 엘리엇과 같은 시인은 단순한 문학적 표상을 넘어 시대와 문화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상징과 기호로 해독되어야 하는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았다. 엘 리엇은 매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시인으로 평가되는 만큼, 그의 대표작인『네 사중주』는 여러 관점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본 논문은 그러한 메시지의 형식과 의미가 생산되고 수용되며 해석되는 방식이 예언자들의 점사언어를 해석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밝히며, 어떻게 예언적 점사언어가 예술로서의 시적 상상력을 고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시학적으로, 언어적으로, 그리고 기호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위해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던 갑골문의 갑자(甲子)력 체계를 근간으로 한 명리학의 해석체계와 발터 벤야민의 언어기호에 대한 일반적 이론을 근거로 하여, 예언적 기호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문학적, 시학적 가치를 갖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예이츠와 엘리엇은 서로의 시에 대해 글을 쓸 때 조심스런 자세를 취한 다. 즉, 기본적으로는 동감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장점에 대해 부득불 인정하는 태도이다. 예이츠는 엘리엇의 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비판적이고 부정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의 시를 당대문화의 징후로 간주하는 반면에 엘리엇은 예이츠의 시에 대해 침묵으로 대답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2편의 공식적 견해를 발간했는데, 연배가 높은 노시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엇은 모든 면에서 예이츠의 시가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는 상반적이라는 점을 너무 잘 인식하고 있었다.
T. S. Eliot’s Four Quartets and Murder in the Cathedral inherited the religious and philosophical tradition of Thomas Aquinas’s Summa Theology and Dante’s Divine Comedy. The Anglo-Catholicism, as distinguished from the Roman Catholicism, thereby may be seen to designate Eliot’s religious identity. Dante’s Divine Comedy shows the apex of his contemplation based upon the intellect. Dante illustrates “paradiso” reaching contemplation by using various lights, and Eliot’s Four Quartets similarly reveals a still point that is a mystical experience filled with much light. In Four Quartets the moment of mystical experience can be seen like those in the works of Thomas Aquinas and Dante belonging to a Catholic tradition that reaches sanctification. The action of Archbishop Thomas Becket in Murder in the Cathedral might just sin as a failure to will in accordance with God, which is the choice of good and evil of human acts interpreted by St. Thomas Aquinas’s Summa Theology. For the true martyr is the person who has become the instrument of God, who has lost his will in the will of God, and who no longer desires anything for himself.
T. S. 엘리엇은 『네 사중주』에서 시를 창작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능가운데 하나인 기억의 힘을 사용해서 작품을 썼으며, 기억은 정점(靜點)을 관상(觀想)하 는데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에 영향을 받 았지만 베르그송의 철학을 절대가 없기에 허약한 신비주의라고 폄하 했다. 이런 점에서 『네 사중주』는 단테나 아우수스티누스의 기억의 전통을 따르며, 서양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관점에서 정점은 이해된다. 이런 기억은 일종의 축복이 며 어둠의 길인 욕망을 제어하여 부정의 길에 거쳐서 정점에 이르게 하여 하나 님을 체험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암시된다. 욕망을 제어하여 멸각에 이르는 부정 의 길은 정점에 도달하는 길이나 인간의 욕망은 제어할 수 없기에 인간이 정점 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사중주』에서 기억은 신성한 기억과 정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는 암시를 준다. 신성한 기억과 정점은 기독교에서 하나님 을 만나는 정신적이고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4차원의 종교적인 세계이기에 모순 인 역설로 설명된다. 리틀기딩 교회의 신성한 역사 앞에서 신성한 기억의 축복 을 받은 엘리엇은 과거의 집착과 욕망이 사라지고, 기억의 힘은 사랑으로 승화 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로운 축복의 순간인 정점의 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본 연구의 목적은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타난 여성들의 노래를 통하 여,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착취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음을 진단하는데 있 다. 또한 이를 종교학, 여성학, 생태학적 비평을 융합하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전에 연구되었던 수많은 엘리엇의 선행 연구들은 다양하고 풍성하였다. 하지만 그의 종교성과 음악적 요소는 부분적으 로 연구되었고, 특히 여성들의 성적타락과 부도덕에 관해서 많은 비판이 있었던 반면, 그들의 노래에 재현된 고통과 갈망에 대한 연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생태비평적 관점에서도 여성들의 영성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엘리엇이 노래와 내러티브에 효율적으로 반향시킨 여성들의 종 교적 영성을 에코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는 황무지를 새롭게 재 해석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효율적으로 그려낸 신의 죽음/영성의 부재에 대한 각성, 황폐화된 자연환경, 여성의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식하여, 조화롭고 평등한 사회로 발전시킬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를 위하여 치유의 영적 에코페미니즘을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젊은 시인 예이츠는 개인의 상상력이 영감의 제일 중요한 원천으로 믿었다. 그의 낭만적 확신은 아더 홀럼의 주장에 힘을 받았는데, 그의 주장은 “순수” 시는 “어떤 극히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인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집중은 유아론으로 귀착된다는 것을 즉시 깨닫는다. 그는, 또한, 점차적으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서 자신의 글이 세상과 직접 연결되길 원한다.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 예술은 자기목적적인지, 하는 관심들은 1890년 후기 작품에 강화되며, 이어서 순수한 창의성 은 “보편적 사상”에 접근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제안을 그의 환상록에서, 마스크 이론으로 다듬고, 유동적이고 투과성이 있는, 마법사-예술가가 만드는 자아라는 신낭만주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T. S. 엘리엇은 시를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탈출”로 인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이츠의 시적 영감의 후기 개념들은 예술가를 필연적으로 흙과 손가락을 인정함으로써 그를 괴롭혀왔던 주요 긴장감을 해소했다. 불안정한 다중적 자아라는 모더니스트의 개념을 초기에 수용함으로써, 예이츠는 역설적으로 보다 더 낭만적인 작가가 된다. 주제어: 예이츠, T. S. 엘리엇, 낭만주의, 모더니즘, 창조의 원천 저자: 제임스 페디카는 매사추세츠 주 윌리엄 칼리지에서 아일랜드와 영국 모드니스트 문학을 강의하며, 현재 레이디 그레고리의 공식적 자서전 집필을 하고 있다. 그의 저서는 레이디 그레고리 일기 1892-1902; 코넬대 예이츠 시리즈 마지막 시편: 원고; 그리고 예이츠의 시, 드라마, 산문: 노튼 평론집, 등이 포함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images of landscapes in the poetry of W. B. Yeats and T. S. Eliot, the two greatest poets of the last century. Facing landscapes of the present world and the ancient as well, using his imagination, Yeats maximizes the poetic quality in his poetry. Some of his favorite landscapes, for example, include Innisfree, an islet in Sligo, Thor Ballylee in Coole Park, Byzantium, which delineate clear-cut images of his poetic themes. Either Yeats lived in Sligo with his mother's parents in his childhood, stayed in Lady Gregory’s house in the Coole Park, and owned and lived in the tower, Thor Ballylee in summer; or he admired the old Byzantium that he idealizes in his supreme poems. They serve as optimum metaphors for his poetry, making his poetry simple but rich in its imagery. On the other hand, Eliot focuses on delineating the life of modern man in his poetry by using cities, including London, Boston, Paris, and St. Louis. The people of the cities are being described as faithless and purposeless with their mind void. His depiction of the city further represents the whole modern civilization. The big city is the backdrop of such infertile imagery of modern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