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776년 5월 8번째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18세기 식민지와 연관된 타자의 관점을 보여주는 <오마이의 초상>을 다루고 있다. ‘고귀한 야만’이라는 개념과 연관해서 유 럽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타자를 그리스 시대의 인물처럼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예술에 대한 양식과 결합해서 보편적 시민처럼 타히티의 원주민인 오마이를 묘사 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오마이는 영국에서 타자의 문화적 상징처럼 다뤄지고 이후 오키프의 『오마 이: 혹은 세계 일주』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민속지학적 관점에서 분석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 한 전개와 이후 영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되는 과정들을 분석한다.
본 논문은 앨런 카프로우(Allan Kaprow, 1927-2006)의 1961년 <안뜰(Yard)>을 중심 으로 해프닝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의 특성에 대한 연구이다. 카프로우의 <안뜰>은 일상과의 소통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최초의 미국 해프닝으로서 20세기 말 현대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프로우는 1950년대 말 대중소비사회를 표상하는 도시의 일상적인 상황을 <안뜰> 을 통해서 소개했다. 카프로우는 <안뜰>을 연출하기 위해서 도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비 롯된 폐기된 타이어, 조각공원, 관람자 등의 특성과 이들의 조합에 주목했다. 그리고 카 프로우는 이 구성요소들을 토대로 일상을 재현에 가깝게 연출하여 대중들의 시선을 끌 고 그들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카프로우에게 <안뜰>은 삶과 예술의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며, 현대예술에서 일상의 의미에 중요성과 그에 따른 소통의 의 의를 재고해 볼 수 있게 한 시도였다. 카프로우는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도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안뜰>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의 본질적인 특성을 고려한다. 카프로우는 도시 의 문화적 쓰레기이자 사회문제를 표상하는 폐기된 타이어를 선택했다. 그리고 카프로 우는 도시의 건물들과 인접한 조각공원에서 수백 개의 타이어들을 배치시키는 데 주력 했다. 카프로우는 타이어로 타이어 폐기장이라는 일상적인 환경으로 공간을 새롭게 전 환시켜 도시의 현장감을 살렸다. 카프로우는 더욱 타이어 폐기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 기 위해서 타이어를 나르고 이동시키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강조했다. 카프로우는 타 이어와의 관계를 통해서 해프너로서의 역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카프로우의 이러한 신체적 행위의 역할의 특성은 그와 함께한 관람자들의 참여와 활동과 유사했다. 카프로 우는 예술가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카프로우와 같이 타 이어를 나르고 이동시키고 더 나아가 타이어 위를 걸어 다니는 신체적 행위를 보여준 다. 카프로우는 관람자들에게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안뜰>의 스코어를 통 해서 도와주었다. 관람자들은 자발적인 참여와 활동으로 개인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카 프로우는 관람자들의 창조적인 활동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성장을 기대한다. 이와 같이, 카프로우는 도시 일상에 근접한 해프닝 연출을 1961년 <안뜰>을 통해서 증명하고 일상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본 논문은 판자 컬렉션(Panza Collection)에 나타난 이상주의 미학을 당대의 사회 적 맥락 속에서 폭넓게 조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주세페 판자 디 비우모(Giuseppe Panza di Biumo, 1923-2010)는 1957년부터 1999년까지 다양한 형식의 미술작품을 수 집해왔으며, 그 수는 2,500여 점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판자 컬렉션에 대한 선행 연구 는 미학적인 측면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거나, 1960년대 이후 변화된 전시 방식의 사례 연구에 그친다. 그러나 판자 컬렉션은 한 개인의 미학과 더불어 당대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본 연구는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컬렉션의 출발점인 이상주 의적인 미학과 그 이면의 상업적 면모라는 양면성을 전시장과 유통과정을 통해 이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빌라 판자 안에서 색채와 형태의 적절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판자의 미니멀리즘 회화는 실내 디자인의 요소이자 추상회화로 이루어진 순수 조형적 공간이라는 양면성을 통합한 독특한 전시공간을 만들어낸다. 빌라 판자의 별채 에 전시된 미니멀리즘 설치 작품 역시 실내장식 혹은 건축적 환경을 조성하면서도 동시 에 물성을 초월하는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판자는 실제의 건축적 공간에 형광 튜브 를 설치하거나 건축의 물리적 구조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하면서 빌라를 하나의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그 공간은 형광튜브의 물성과 빛에서 오는 비물질적인 경험, 실제 공간에 대한 물리적 체험과 그 안에서의 ‘걷는 행위’를 통한 명상적 체험이 공존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의 개념미술 컬렉션에서 나타나는 문자의 반복 역시 이미지의 복제 시스템을 드러 내면서도 단어의 반복으로 인해 일종의 사유의 과정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판자는 실제 의 건축적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거나 건축의 물리적 구조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하면서 빌라를 하나의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빌라 판자의 전시공간을 통해 삶의 세 속적인 측면까지도 이상화시킨 예술지상주의를 구현한 것이다. 반면 판자 컬렉션의 유통과정에서는 판자의 이상주의 미학의 이면이 구체적으로 드 러난다. 판자는 자신의 미적 취향에 부합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일 경우에만 작품을 구 입했으며, 작품을 매매하거나 교환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컬렉션을 미국의 주류 미술관에 판매하였으며 순회전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순회전은‘판자 컬렉 션’이라는 라벨과 작품의 설치 및 변경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판자의 의견을 반영하여야 한다는 계약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 즉, 그것은 일종의 문화상품처럼 유통된 것이다. 이와 같이, 판자 컬렉션의 전시공간에 드러난 이상주의 미학과 그 이면의 상업적 유 통이라는 현실은 미술작품과 그 컬렉션이 순수한 미적 취향의 구현체일 뿐 아니라 당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매우 다원적인 성격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판자는 현실적 인 면모와 예술적인 감성을 모두 갖춘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전형적 컬렉터였으며, 판자 컬렉션의 전시와 유통과정에서 드러난 이상주의 미학과 그 이면 역시 이러한 당대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본과 같은 것이다. 본 연구는 이처럼 판자라는 한 개인의 미적 취향과 그 예술적 발현으로서의 컬렉션 을 당대의 사회적 구조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접근하였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즉 판자의 이상주의 미학의 인문, 사회학적 측면을 재고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궁 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미술작품의 선호가 개인의 성격요인과 관련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행되었다.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사조에 대한 선호와 성격요인과의 상관에 관한 연구들이 보고되어 왔으나, 감상자에게 예술작품은 사조보다는 그림 자체가 주는 인상과 느낌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본 연구에서는 긍정 정서, 부정 정서를 일으키는 그림과 특정 정서를 유발하지 않는 중립적인 그림이 성격요인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자극의 친숙성 이 그림 선호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였다. 참가자는 성격 5요인 질문지에 응답한 후, 제시되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얼마나 선호하는지 평정하였다. 선호 평정이 끝난 후, 앞서 제시된 자극들을 다시 보고 그 그림을 알고 있었는지를 평정하였다. 결과, 성격 5요인 중 신경증 점수가 높을수록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그림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슬픔, 고통과 같은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예술에 대한 선호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에 대해, 신경증이라는 성격요인으로의 설명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각 정서표현 그림의 친숙점수와 선호점수 간 정적 상관이 나타나 친숙한 그림이 더 선호될 것이라는 가설이 지지되었다.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다르다는 주관성과 일반적 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미의 객관성이 모두 존재한다. 본 연구는 예술 선호가 갖는 주관성을 성격이라는 개인차를 통해 설명하고, 기존 연구의 사조적 분류방식에서 탈피하여 예술작품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 가 있다.
고려청자 발생의 직접적인 관련성 때문에 당대 월요청자 비색자인 옥벽저완(yubidiwan)은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옥환저완(yuhuandiwan)을 비롯한 오대부터 북송시대 월요청자의 유 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먼저 중국 각 지역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월요청자의 현 황과 유통경로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오대·송 시기의 최상급 월요청자는 후삼국시대 신라 의 수도였던 경주와 후백제 지역, 그리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주변 의 유적 및 왕릉, 그리고 사찰 및 생활유적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러한 사실은 당시의 최상류층에서 유행했던 월요청자의 소비패턴의 흐름을 통해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옥환저완, 대접, 발, 항아리, 잔, 잔탁, 주자, 타호 등의 수준은 오대·송 집권층과 요 정권에 공납되 었던 월요청자에 버금간다.
발견되는 유적의 성격과 기종별로 보면 고급기종인 항아리, 盞托, 注子, 唾壺등은 개성일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옥환저완의 경 우 주로 경주 일대와 서해에 근접한 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발견되 고 있어 불교적인 교류를 통해 오월과 직접적인 루트를 통해 들어왔 을 가능성이 크다. 즉 한반도에서 발견된 오대·송의 월요 비색자의 유 입경로는 정권 간의 외교적 상징이자 불교문화의 매개체로써 하사품 혹은 선물로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려에서 이미 자체적 으로 청자를 제작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최고 수준의 월요청자가 고려 의 수도였던 개성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월요청 자가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 논문에서는 9, 10세기에 만들어진 돈황 막고굴 제231, 237, 72굴 서 쪽 벽감 천장에 있는 서상도(瑞像圖)나 장경동에서 가져온 견본화(絹本 畵)에 그려진 서상 중에 미륵이라는 제기(題記)가 있는 도상을 다루었 다. 특히 이 도상에 대한 선행 연구를 검토하고 수정을 거쳐 새로이 알 게 된 사실을 추가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천축백은미륵서상(天 竺白銀彌勒瑞像)’에 관해서는 미륵을 백은색(白銀)으로 보는 근거를 고 찰하였고, ‘미륵수석가현서상(彌勒隨釋迦現瑞像),’ ‘건타라국백석미륵서 상(健陀羅國白石彌勒瑞像)’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의 견해(同定)에 의 문을 제기하였다. 또, ‘복주철미륵서상(濮州鐵彌勒瑞像)’의 경우를 보면, 인도나 우전(于闐)의 서상이 대부분인 돈황의 서상도 가운데에 극히 드 물게 중국 내지의 서상으로, 문헌 사료에 따르면 구리(銅製)로 만든 모 조상이 개봉(開封)의 건국사(建國寺, 후의 相國寺)에 안치되어 여러 영 험을 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돈황 사본의 서상기(瑞像記)에는 복 주의 상이 우전의 우두산(牛頭山)으로 찾아 와서 거주하였다고도 한다. 본 원고의 마지막에서는 하남(河南), 서역의 우전, 돈황으로 내력(由緖) 이 옮겨다녔던 복주천미륵서상의 성격과 의미를 논하였다.
敦煌莫高窟제57굴은 제220굴(642년) 이후에 주류가 되는 대화면 의 정토변상도가 출현하기 이전, 당 전기 제1기를 대표하는 석굴로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제57굴 바깥 감실 정면 좌우의 하부에 그려 진 보살좌상에 주목하였다. 북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 양 다리를 모으 고 앉았으며, 남벽의 상은 나무 아래에서 등좌 위에 반가사유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 조합, 그리고 이와 유사한 조합을 한 보살좌상은 수 제2기 굴 중에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 상들은 미륵상과 밀접하 게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제57굴의 경우 정벽 본존은 의좌의 자세 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미륵여래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 제가 되는 2구의 보살좌상은 이 석굴의 조영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 진다. 이러한 불상을 고찰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륵정토를 비롯 한 정토왕생에 대한 생각을 확실하게 밝히는 연구로 이어진다. 또한 본고에서는 託胎靈夢圖·出家踰城圖등에도 주목하고 이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정토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고안과 시도를 밝히고자 한다.
미륵신앙에는 하생신앙과 상생신앙이 있기 때문에, 미륵은 보살형과 여래형의 두 종류로 조형화되어 왔다. 이 중에서 보살형의 미륵은 지물 (수병)이나 수인(접법륜인), 좌세(교각좌, 병각의좌, 반가좌 등)에 의해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여래형의 미륵불은 간단하지 않다. 당대가 되면 미륵불은 대부분 예외없이 의좌(병각의좌)상으로 표현되지만, 수 이전의 미륵불은 입상, 부좌상, 교각상, 의좌상, 반가좌상, 유희좌상 등 여러 종류의 형식이 있다. 하지만 수인이나 지물에 미륵으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문에「미륵」이라고 새기지 않는 한 미륵불을 구분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위에서 의좌상이 미륵불 전용의 자세가 된 것일까?
본고에서는 북조시기의 여래형 미륵상을 주제로 삼아, 의좌형식이 미륵불의 전형이 되는 이전의 상황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특히 의좌계의 좌세인 교각좌와 반가좌, 유희좌의 여래상 중에 미륵불의 가능성에 관 해서도 검토한다. 또한 산서성 평정에 위치한 개화사 석굴의 수 개황원 년(581)명 불반가상의 명문 중에 보이는「진국왕상」을 실마리로 해서 하생미륵과 성왕상의 관계에 관해서도 주목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감숙의 돈황 막고굴이나 운강석굴 중기전반까지의 의좌계 여래상은 대부분 석가불이지만, 5세기말 이후 동부지역에서 미륵불이라고 생각되는 의좌나 교각좌의 여래상이 출현했다. 특히 동위 에서 북제시기에 하북을 중심으로 미륵불이라고 확인되는 의좌상, 반가상, 유희좌상이 많다. 게다가 수초 불교를 부흥시킨 문제의 등장으로 성왕이었던 문제에 하생미륵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그 이후 당대에는 의좌의 미륵불로 정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는 생명기술이 인간의 통제 및 감시에 어떤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는가를 포착하여 대 중적으로 알리거나 유전공학기술이 바이오산업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고발하는 바이오아티스트들의 프로젝트들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체정보를 수집하고 규제하 는 제도적, 정치적 차원의 생명감시에 대한 우려와 실상을 알리는 히더 듀이-해그보그의 작업과, 경제적 이득을 앞세우는 바이오산업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전공학의 잠재적 위험성과 탐욕 을 고발하기 위해 역-유전공학을 이용하는 CAE와 BLC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자연과 생명자체에 개입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이 시대에, 미술이 생명기술에 대한 올바른 사용과 판단, 정치 및 경제와 맞물린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포괄적인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 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이 젊 었던 시절 고향도시 레이덴(Leiden)에서 제작한, 화가의 초기 유화 트로니들을 다룬다. 논문은 트 로니(Tronie)란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회화장르로서의 트로니는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렘브란트의 초기 유화 트로니 일곱 점을 선별해 본보기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작 품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제시한다. 논문은 마지막으로 화가의 초기 유화 트로니들의 원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를 논하며 끝이 난다. 렘브란트의 초기 유화 트로니들은 비교적 저렴한 미술작품들이 었고, 젊은 렘브란트는 이 저렴한 트로니들을 통해 더 많은 미술 감상자들에게 자신의 미술을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17세기 로마의 전성기 바로크에서 활동했던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건축은 정교하고 복잡한, 하지만 탈 고전주의적인 기하학적 구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본 연구는 이 성당의 공사과정상의 문제들을 당대의 정치적 변화와 연동지음으로써 산 티보 성당의 정치적 상징체계의 변화와 그 양상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1642년에 착공되어 1660년에 봉헌된 이 성당은, 그 규모를 고려할 때, 상당한 공사기간을 가 졌다. 이것은 건축을 위한 물리적인 시간의 지연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에 따른 지연이었다. 건축 공간과 구조 속에 투영된 기하학적 그리고 문장학적 요소들은 선행연구들이 인식했던 ‘지혜의 상징’을 넘어서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실내와 외부에 추가된 장식물들 또한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본 논문은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무라카미 타카시와 중국의 차이 궈창이 전략 적으로 스스로의 ‘타자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을 통해 해외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룬 과정을 살피고 있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의 동양에 대한 통제 일뿐 아니라 동양 이 서양의 시각을 내재화시키는 측면이 함축됨을 보여주고 있다. 무라카미의 경우 미국진출을 염 두에 두면서 그 전까지의 시사적 작업에서 멀어지고, 현대일본의 특수층의 취미문화라 할 수 있는 오타쿠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제작, 발표한다. 차이는 중국 미술계의 디아스포라라는 대대적인 이 주의 시절에 일본으로 이동하여, 중국의 4대발명품으로 일컬어지는 화약을 사용한 작업으로 자신 의 특수성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 두 작가의 경우 모두 스스로가 개척해온 ‘타자 이미지’의 초 월을 통해 비로소 동양인 국제파 작가에서 단순히 ‘국제적’ 작가로 재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오늘날 ‘단색화’로 명명되는 한국 추상화의 한 경향에 대한 세 개의 반성적 질문을 던 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첫째 질문은 단색화를 진정 독자적인 유파로서, 긴밀한 이념과 그 실천의 집약체로서 형성된 한국적 미술운동 또는 유파로 볼 수 있는가이다.
둘째 질문은 오늘날까지 관례적 정설로 자리 잡아 온 견해로서 ‘단색화는 진정 한국성 또는 한 국적 미의 반영인가’이다.
셋째 질문은 단색화의 거의 공식화된 영문표기인 ‘Dansaekhwa’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 은 타당한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