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에 대한 연구는 과거 자료의 한계 등으로 인해 교육자, 조직 운동가, 준비론자 등의 단면적인 접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량의 해외소장자료의 국내입수 및 자료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일제 식민지하 독립운동의 지도급 인사로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하여 총체적인 분석을 하는 상황으로 연구경향이 발전되었다. 안창호의 대표적인 활동은 국내외에서의 정치 조직결성과 운용,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민족내적으로는 지속적인 조직활동을 통해 단결을 도모했고, 대일전선에서는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광의의 ‘政治’ 를 차용하여 안창호의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정치관의 분석을 통하여 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안창호의 사상 형성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견해를 일거에 버리지 않고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새로이 체득한 내용을 반영하고 보완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황, 장소, 대상에 따라 발언의 수위와 내용도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굴절을 보이기보 다는 오히려 일관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과연 안창호는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면서 정치활동을 해 나갔는지, 또 현재의 안창호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짚어보고 향후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도산 안창호는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도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며,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방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지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그 날을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통합의 논리로 풀고 조직을 활성화한 정치가였으며 민주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켜 독립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구성분자로서의 중견의 인물 배양에 힘쓴 교육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삶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 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신문, 잡지 발간과 언론 홍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대계를 한 몸에 짊어진 인물이다. 수난의 시대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 무게만큼 오늘날 도산은 한국사의 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도산의 활동을 시대 구분해 보면 제1기는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제2기 1903~1906년까지 의 미주에서의 민족운동기, 제3기는 1907년 신민회 결성과 구국운동기, 제4기 망명한 이후 재러한인사회에서의 활동기, 제5기 미주 대한인국 민회, 흥사단활동, 제6기 1919~1932년 중국에서의독립운동기, 제7기 일제에 피체된 후 국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산의 활동은 지역 및 시기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산을 평가할 수 없다. 도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활동의 주요점은 독립운동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궁극적으로 근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준비운동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추진하였던 도산의 활동과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도산을 개조론자로 명칭하고 특히나 일부 도산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자’로까지 폄하되어 있 는 실정에서 도산과 혁명운동을 연관 짓는다는 것은 다소 낯선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은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하였고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했던 자신의 활동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본 연구는 도산의 독립운동을 그의 혁명관과 연관하여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전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의 도산의 활동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혁명적 활동이었으며 이러한 도산의 혁명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살펴보고자 한다.
In the period of nationalism, W. B. Yeats's works address the loss of nation and resolute fights for independence and remembrance of the fighters killed in the struggles. Freudian ideas of mourning and melancholy and moral masochism and Jacques Rancière's ideas of colonial 'policy' or 'police order' and postcolonial 'politics' can provide effective tools to understand characteristics of the post-colonial works by Yeats. By putting side by side Freud and Rancière, we can produce a combination of mourning-colonial police-order vs. melancholy-post-colonial politics. The colonial police-order induces the colonized Ego to forget the loss of nation and move on to other objects, for example, money, through mourning. Melancholic post-colonial fighters derail the workings of mourning espoused by the colonial policy or police order. Melancholy and moral masochism of the colonized Ego are the driving forces of post-colonial struggles. Melancholy of the colonized Ego and sadism of the Super-Egoic demand of independence and moral masochism of the colonized Ego can explicate the bloody and 'erotic' relationships between the colonized Ego and the womanized ideal of nation, which have been interpreted as 'fatal mistress,' 'eroticized politics' and 'vampirism' by many Yeats critics. But melancholy and moral masochism drove the colonized Ego to fall into a fatal love relation with the female symbol of nation demanding unconditional sacrifice of the colonized Ego, which renders 'eroticized politics' and 'vampirism' noticeable.
이 논문은 權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그간 언급되어 온 玄石村이 아닌 新門밖 盤松坊임을 규명하고, 그 곳이 권필의 삶과 의식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권필이 태어난 곳은 新門밖 반송방으로 추정된다. 권필의 가문이 반송방을 거주지로 택한 것은 祖父祺의 代이다. 祺는 사헌부에 있을 때, 中宗祖의 권신인 金安老를 탄핵하는데, 김안로가 危害를 가하려 하자 都城안 明禮坊에서 반송방으로 이거하게 된다. 부친인 擘은 도성 안에서 태어나 15세 무렵 부친을 따라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벽은 文科로 진출하나 乙巳士禍期에 知己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정치 현실에 뜻을 잃고 詩에만 專心한다. 그는 항상 10里거리인 마포강가 현석촌을 찾는데, 1580년 중반 무렵에는 현석촌으로 이거한다. 1569년이 生年인 권필은 반송방에서 태어나 10대 중반 부친을 따라 현석촌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작품을 통해 그가 반송방에서 幼少年시절을 보냈고 이곳이 그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乙未暮春, …」같은 작품은 현석촌으로의 이거 이후에도 盤松第가 남아있었으며, 그 곳이 권필에게 懷古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공간임을 전해주고 있다. 「家有佳樹七株, 皆先祖承旨府君手植也. …」은 특히 주목할 만 하다. 긴 제목 가운데 ‘近六十餘歲’라는 내용은 盤松第의 나무들이 1530년대 중반, 즉 祖父가 반송방으로 이거하던 초기에 심은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반송제의 내력만이 아니라 이 곳이 어린시절 권필의 정서와 의식을 함양해 오던 곳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舊居地에 대한 정서와 先祖에 대한 追念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남다른 의식은 여타 작품의 해석 및 시세계의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낸 반송방은 권필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權近이래 勳舊家의 면모를 점차로 잃어가던 그의 가문이 마포 강가 현석촌을 근거지로 삼게 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中間地點이라 할 수 있다. 권필은 가문의 전통을 의식하고 자부하지만 都城안 - 盤松坊- 玄石村의 移居로 상징되는 家勢沈降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世界에 대한 대응의 태도를 형성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世界의 어두운 그림자와 自由․抵抗精神의 共存은 이러한 저변의 고려 아래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본고는 한일합병 전후 시기의 한문과 교과서들에 대한 탄압의 배경과 상황 그리고 탄압의 결과가 한문과 발전 역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에 대하여 고구할 목적하에 집필되었다. 처음부터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학교에서의 한문과 교육을 실시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한국 내 정황상 한문과 교육이 불가피하였으므로 한문과를 독립․존속시키고 학부에서 한문독본용 교과서를 제작하여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후 漢文科를 국어과와 통합하여 國語及漢文科로 변경시키고 활발하게 개발되어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던 한문과 교과서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敎科用圖書檢定規程을 발표한 시점을 전후하여 민간과 단체들이 제작하였거나 혹은 중국 등 외부로부터 수입한 교과서들의 내용을 면밀히 조사하여 교과서들의 내용이 정치적으로 일본 측에 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인 것은 모두 사용을 금지시켰다. 한문과 교과서는 수신과, 국어과, 역사과 교과서들과 함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새롭게 개발하여 사용하던 한문과 교과서는 예외 없이 사용이 금지되었다. 모든 교과서의 검정 진행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ꡔ敎科用圖書一覽 에 의하면 한일합병 직전에는 그나마 6-7종의 교과서들은 사용이 허가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명문장들을 모은 것이거나[고문약선, 문장지남, 한문학교과서 등] 아니면 문법 교육용 교과서[초등작문법]와 기독교계 학교에서 사용하던 수입 교재[초학계제, 회도몽학과본]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새롭게 개발된 교과서들을 철저히 탄압하는 대신 논어 맹자 등 四書類를 비롯한 전통 교재들은 모두 검정을 통과시키고 있다. 이는 한문과의 교육 내용을 다시 유교의 경전들로 회귀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지방 유림의 반발을 무마하고 한문 학습을 이용한 신지식 획득이나 정치의식 고양을 막고자하는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결국 1906년 이후 한문과 교육의 새로운 방향 모색과 시대에 기여할 수 있는 교과로서의 의미를 지닌 교과로 발전해가던 한문과의 노력은 좌절되었고 한문과 교과서들이 다시 중세의 교재들로 회귀하는 형국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굴절의 역사는 한문과의 정체성을 복고적인 것으로 고정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연구의 목적은 한반도 서남부에 분포하는 중성-염기성 심성암류의 지화학적 특성과 성인을 밝히는데 있다. 이들 중성-염기성암류는 주로 선캠브리아기의 회장암-반려암, 트라이아스기의 각섬석반려암(지리산 지역), 쥬라기의 섬록암-섬장암(지리산 지역과 북부 지역) 그리고 백악기 반려암-섬록암(남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암괴형의 회장암은 많은 관입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려암-노라이트-트록토라이트와 우백질 반려암으로 이루어진 반려암질암에 의해 관입되어 있다. 주 성분-미량 성분의 변화도, AMF 삼각도와 Pl-Px-Ol 삼각도에서, 우리는 한반도 서남부에 분포하는 중성-염기성암류가 Daly의 값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며 칼크-알카리질암류에 속함을 보여준다. REE (La/Yb)cw와 Eu/Sm 값에 따르면 이들 암류는 경희토류가 중희토류보다 부화되어 있으며, 이는 대륙 연변부의 지구조에서 정치한 화성암류의 특징이다.
정치성 구획어업 개발예정지의 해양환경특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2001년 8월과 11월 2회에 걸쳐 해양관측이 실시되었다. 관측결과 수온은 마산만에 비해 진동 내 외만 및 서부해역이 8월에는 2℃, 11월에는 약 0.7℃ 정도 놀게 나타났다. 염분은 진동만 서부 해역의 표층 염분농도가 가장 낮았고 진동만과 마산만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마산만 부근해역이 상대적으로 저온 고염을 나타내며, 진동만 서부해역과 진동 내 외만은 고온 저염으로 나타났다. 부유물질의 농도를 살펴보면, 8월의 경우 진동 내만에서 부유물질의 농도가 15mg/L 이상으로 높았다. 11월에는 진동 내만에서 외만으로 갈수록 농도가 마산만의 경우는 내해에서 외해로 갈수록 낮아지는 역 현상을 보였다.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의 농도는 만산만에서 7mg/L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본고는 이규보의 불교관련시를 통하여 유자로서의 입지에 충실했던 이규보가 무신집권의 시대와 불교문화의 시대에 관료지식인으로서 정치 사회적 현실과 갈등하고 적응하면서 형성된 불교인식은 무엇이며, 그것이 그의 시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규보의 불교관련시는 불교적 서정의 형상화에 있어서나 공사상으로 대표되는 불교적 사유를 시화하는 데 있어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의 詠物詩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의 경향이 볼교관련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불교인식은 주로 젊어서의 법화경과 노년의 능염경을 비롯한 경전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규보는 空恩想을 비롯한 불교적 사유를 시화하는 데 있어서도 탁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파악 된다. 山夕詠井中月에서 보이는 것처럼 달[月]과 달빛이라는 평범한 불교적 소재를 시화하는데 있어 그 상투성을 벗어나 작품 안에 불교적 사유를 시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실상과 허상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불교의 기본 교리인 空思想을 생경하지 않게 문학적으로 시화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이해의 정도를 넘어서 있음을 시사하는 예라 할 것이다. 본고는 이규보의 불교관련시가 그의 불교 교리 이해에 상응할만한 불교 인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佛敎詩로서 요구되는 종교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가 노년에 보여 준 불교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불교라는 주제는 그의 시에 있어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없고, 그것은 儒者로서의 입장이 불교에 대한 종교적 신앙으로 대체될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고를 통하여 기대되는 것은 이규보의 불교 인식과 불교시에 보이는 국면들이 이규보의 개인적인 성향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불교에 대한 일반적 정서 또는 불교 문학적 성취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 점이 밝혀진다면 본고의 논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이규보의 佛敎關聯詩를 통한 불교시 일반의 특질을 구명한다고 하는 문제에 한 결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Yeats looked into the past and prophesied the future and dreamed a unified Irish society that could then resist English oppression. He adopted the language of the oppressor to manufacture or invent a cultural space, and used that cultural space to find a voice with which to critique the oppressive culture. He used his literary works, like "The Hawk," to set free his colonized homeland. Also new literary forms of expression came to be known as modernism in literature and included the expression of such feelings as discontinuity, ambiguity, and fragmentation. This was the world milieu in which Yeats wrote. And he saw how to use words as weapons turned against the colonizer and how to use words to discover Ireland. At the same time that he was implicated in Anglo-Irish colonialism, he also developed a system of symbols that he believed explained cycles of history and would transcend contemporary quarrels. Yeats also persistently used and interacted with Irish political and historical leaders. He names many of the political figures in much of his writing and uses historical events as subjects. Not only does his writing overtly interact with historical figures; in at least some of his poetry, Yeats makes subtle allusions to Irish leaders of the past. "The Hawk" may be a poem about a real individual, but one who is never named at all; this poem provides an example of art that, upon closer inspection, serves politics. The poem not only shows the polit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Fenians and the English government, but it also introduces an element of the mystical; as Yeats uses the hawk as a symbol of the Fenian resistance in the poem to illuminate the political situation. He makes the Hawk of the Fenian movement into the hawk of the poem, he certainly presents the reader with a striking parallel; and he binds together history, politics, culture, spirituality, and poetry into the configuration of his famous interpenetrating gyres.
본 연구에서는 균일단면 뿐만 아니라 불균일 단면을 갖는 곡선보의 동적해석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2절점 곡선보 요소를 제안하였다. 전단변형률을 고려한 본 요소는 Hellinger-Reissner 변분이론에 바탕하여 유한요소정식화를 수행하였다. 또한, 변위장에 대해 무절점 자유도를 추가적으로 도입하여 요소의 수치적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계산의 효율성을 위해, 요소정식화의 최종단계에서 정치조건으로부터 응력매개변수들을 제거하고, 동적축약을 통하여 무절점 자유도 성분들 또한 최종적인 유한요소방정식에서 제거되어 일반적인 변위기저 요소와 같은 자유도를 가지는 유한요소방정식을 얻을 수 있다. 몇 가지 수치예제들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무절점 자유도와 변위장에 일치하는 적절한 응력매개변수가 혼합요소의 수치적 거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으며, 본 연구에서 제안된 2절점 혼합요소가 곡선보의 동적해석에서 매우 정확하고 효율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해양자유와 개방적 자원사용 레짐은 오늘날 해양관리와 공유자원관리 레짐으로 변화하였다. 해양생물자원, 해양광물자원, 해양공간, 해로 등 해양자원은 경합성은 강하나 배제성은 약한 공유자원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를 방치하면 공유의 비극이 발생하며 따라서 합리적 해양관리가 필요하다. 주요한 국제 해양이슈는 해양오염 연안관리, 해수면상승, 어자원관리, 포경, 해양관할권, 심해저광물자원, 군사적 해양안보, 해적활동, 생태적 환경안보 등이 있으며, 이들에 대한 견고하고 지속적인 정책레짐이 형성되어 왔다. 이 논문은 오늘날 해양패러다임이 변화함에 따라 등장한 국제적 해양환경안전 이슈들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레짐의 형성, 그리고 향후 바람직한 정책레짐 형성과제 등에 대해 국제정치학 또는 국제정책형성론적 시각에서 거시적으로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公營방송제도가 나름대로 축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현행 방송법제하에서는 미국과 달리 그나마 객관적으로 검증, 분석할 수 있는‘매체간 균형 발전을 통한 경쟁촉진’이라는 交叉소유규제의 목표가 오히려 지상파방송위주의 자리매김으로 인해 사실상 실종되어 있으며, 그렇다고 규제기관 스스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도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交叉소유규제제도는 실체가 없는 방송의 ‘공공성, 공익’이라는 모호한 이념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는 외부의 변화 압력에 그만큼 취약한 상태라고 진단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방송 채널의 디지털화 추세는 일단 可用채널수의 한계를 배경으로 한 채널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소유가 분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미 무력화시키고 있다. 국경없는 글로벌 서비스 시장의 확대 추세를 고려하고 恣意的인 정치 논리를 배제할 경우 신문과 방송의 交叉소유 허용은 독일, 영국, 일본 등의 에서 잘 보듯이 公營방송제도가 축으로 버티고 있는 한 적어도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켜 미국으로 상징되는 對外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경쟁력 확보의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고 인터넷, 케이블 TV 등의 매체를 상대적으로 건강한 경쟁 관계로 유도함으로써 전체적인 의견 시장의 다양성도 크게 提高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 인식하에 交叉소유규제를 현재와 같은 시장진입 자체의 규제 수단이 아닌 매체별 자유로운 경쟁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사후적 시장 補正수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交叉소유규제의 완화로 인해 야기되어질 수 있는‘프로그램과 의견의 다양성 훼손’부분에 대한 우려는 또 다른 事後통제 장치인 ‘내용 심의’의 기능을 보완하는 것과 시장에서의 공정경쟁 규칙을 강화하는 타 제도들에 의해 상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돼지정액의 보다 간편하고 손쉽게 동결시킬 수 있은 방법을 확립하기 위하여 수행하였다. 돼지정액은 3시간에 걸쳐 5℃까지 냉각 후 Straw에 봉입하고 다양한 방법 및 step에 의해 스티로폼 용기 내에 들어있는 LN2 중에서 동결하였다. 정자의 생존성은 LN2 표면으로부터 10 cm 위에서 10분간 정치 후 침적할 경우 가장 높게 나타났다(54.0%). Straw를 -102℃에서 10분간 정치시킨 처리구가 여타구보다 높은 생존성이 얻어졌다(74.0%, P<0.05). 응해 방법에 따른 동결정액의 생존성 실험에서는 37℃의 융해구가 52℃ 융해구보다 유의적으로 높은 결과를 나타냈다(P<0.05). 1단계 동결 방법과 3단계 동결방법으로 돼지 정액을 동결시킨 결과 정액의 일반적 특성 및 첨체의 이상 유무를 평가하는 CTC 검사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인정되지 않았다. 동결정액을 이용한 체외수정 결과에서는 상실배기 이상 발육율에서 1-step이 3-step보다 높은 발육율을 나타내었다(27.5 vs 14.7%, P<0.05). 본 실험의 결과 돼지정액 동결 시 -102℃에서 10분간 정치시키는 1단계 동결방법이 간편하면서 유리한 동결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李齊賢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학자요 또한 시인으로서, 후세 사람들로부터 ‘道德의 으뜸이요 文章의 宗主’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문학부문에서 이제현이 남긴 업적 가운데 한 가지는 고려시대 四大詩話集의 하나인 『翁稗說』을 통해 그의 詩論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제현의 시론이 특색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후세의 문인들이 이제현을 시의 大家로 존경한다는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詩觀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제현은 詩作에 있어서 ‘個性’을 존중했고, ‘言外意’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詩의 언외의’를 ‘詩味’라는 말로 표현하였다.‘시미’는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추구되던 미학이었다. 漢詩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고려시대의 시화에서도 가끔 ‘시미’가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그 내용은 빈약한 것이었으며, 이 ‘시미’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詩作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사람이 바로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의 ‘詩味論’은 중국의 여러 ‘詩味說’과는 다른 이제현만의 독창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가 추구했던 시세계는 ‘미래에 豫期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豫味論’이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가 있다. 이제현의 시론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시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