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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137

        121.
        2011.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article is a hermeneutical evaluation of the life, the ministry and the theology of Rev. Sang-Bok Kim, for the purpose of inspiring and teaching the next generation. First and foremost, prior to evaluating his ministry and his theology one must first observe his life to understand the depth of his spirituality and the formation of his values and beliefs. We will look at his life through three different stages. First, his life in Korea (1939.1.11∼1965.8): north (Pyongyang) and south (Pusan and Seoul); second, his life in America (1965.8∼1990.5): studying abroad, teaching and ministry; and lastly, his life again in Korea (1990.6∼2011.1): his life based on his ministry at Hallelujah Church. Understanding his life through these three different stages will provide us insight with regard to the direction of his ministry and its characteristics. Furthermore, his ministry can be divided into teaching ministry and pastoral ministry. Within his pastoral ministry we will be able to see him as a ‘pastor-teacher’ (Eph. 4:11) through the vision, the method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ministry. Lastly, his theology is understood as well as criticized generally on his view of Bible (‘plenary verbal inspiration’) and in particular his view of pneumatology and eschatology and ecclesiology and woman ordination, and WCC.
        122.
        2010.07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신뢰성평가는 고속철도교량에 포함된 불확실성의 영향을 고려하여 정량적 구조안전성을 검토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안이며, 신뢰성평가에 기초한 기대생애주기비용은 고속철도교량의 합리적인 안전수준 및 설계기준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수치해석과 신뢰성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고속철도교량의 기대생애주기비용 및 최적설계 방안을 결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고속철도교량의 표준설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설계방안을 설정한 후, 각각의 설계방안에 대해 수치해석을 수행하였으며, 설계강도 한계상태방정식에 따른 신뢰성평가는 수치해석결과를 토대로 외적 불확실성의 영향을 고려하여 수행하였다. 고속철도교량의 기대생애주기비용은 각각의 설계방안에 따른 신뢰성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산정하였다. 또한 최적설계 방안은 산정된 기대생애주기비용을 이용하여 결정하였다. 아울러, 최적설계 방안의 신뢰성평가 결과 및 기대생애주기비용에 대해 내적 불확실성의 영향을 고려하여 검토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고속철도교량의 체계적인 안전성 평가 및 최적 구조설계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12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文益成은 1526년에 태어나 1584년 肅川都護府使로 재직 중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옥동집󰡕은 전란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詩文 들을 모은 것으로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본고는 특히 관직 생활과 연관된 시를 중심으로, 그 삶의 과정들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승문원과 사섬시에 근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禁中題立春」과 「題 司贍寺契軸贈同僚」에서는 관직 생활의 희망, 임금을 송축하는 마음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洪原縣樓贈別朴公鳴渭」 「次端川上房韻」에서는 향수와 함께 약간 울적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澤稚」라는 작품을 들고, 그것이 울산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매우 위험한 추정이지만, 관련 자료가 소략한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숙천도호부사 시절에 지은 「聞雁 有感」은 아마 문익성이 남긴 마직막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벼슬에서 완전 히 물러나 여생을 마무리할 뜻을 굳힌 상태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평안도 숙천 에 부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이 시에서는 나 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비장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24.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文劼은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쳐 소년시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시 작 품을 남겼고, 정유재란에 하수일과 의병을 일으켜 하동의 악양에서 활동함으로 써 이들 덕분에 이 지방이 온전하였다는 평과 조정의 상을 받기도 하였다. 文弘 運은 아버지를 따라 악양에 있다가 아버지가 병사함에 전란의 와중에서도 장례 를 치루고 그 이후로는 유거하며 지냈으며, 그가 남긴 「頭流八仙遊篇」은 지리 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頭流八仙遊篇」은 문홍운 자신을 비롯하여 성여신, 정대순, 강민효, 박민, 이 중훈, 성박, 성순의 여덟 사람이 성여신의 제의에 따라 두류산을 유람한 과정과 느낌을 읊은 시이다. 이 시는 지리산 유람을 노래한 여러 시편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240구 1,200자에 이르는 장편 5언시이다. 특기할 것은 성여신의 「방장 산선유일기」 가운데에도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여덟 사람을 신선이라 부른 것이다. 선비들이 자신들이 유람을 가는 곳을 신선세계라 하며, 그곳을 속세와 구분하 여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듯이 그 감회를 기록한 것은 있지만, 유람 가는 자신 들을 신선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인에게 신선의 이름을 이처럼 지어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이들의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또한 한 번의 일회적인 유희에 그치지 않고 유람하 는 동안 내내 이어졌음을 성여신과 문홍운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여신이 “속에 들어가서는 눈에 띄는 사람 모두 선인이었고, 산 밖으 로 나와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 범인이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결국 유자로서 신선에 인식의 테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 다. 문홍운이 지리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예찬이 극 에 달하였지만, 막상 그가 지리산에 당도한 뒤 특히 지리산 청학동이나 향로봉 에 올라 읊은 평범한 시구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홍운은 그의 시에서 청학동이나 향로봉에서 신선세계에 당도하여 신선을 보았다고 했으나, 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선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문홍운의 신선놀음도 결국은 성여신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는 이름은 비록 ‘仙’이나, 실제는 ‘仙’이 아닌 것 이다.”라고 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25.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발표에서 이해를 시도하는 澹山 河祐植(1875~1943)은 지금까지 본격적 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새로운 연구 대상이다. 이에 본 연구는 그의 文集 인 󰡔澹山集󰡕을 통한 텍스트 분석에 치중하였다. 󰡔澹山集󰡕은 그가 사망하고 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간행되었지만, 그 編次는 그가 생전에 손수 확정해 놓은 면모 그대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澹山集󰡕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담산의 인생에는 다음의 세 가지 특기할 만 한 사항이 눈에 띈다. 첫째, 南冥學을 수용함과 아울러 艮齋 田愚에까지 이어지 던 栗谷學을 함께 계승한 學問淵源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대신 비협조로 일관하며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을 변치 않 는 ‘靖獻’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셋째, 學問淵源이 닿은 선현들의 문집 간행을 돕고 집안에 전해지던 遺文을 수습하여 간행하는 등 문헌의 정리와 간 행 사업에 전념하여 업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을 걷는 과정과 일제의 식민통치시기를 몸소 겪어야 했 던 담산은 ‘時義’를 중시하는 出處觀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주의 원리와 心性의 원리 및 양자의 관계성을 통일된 원리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心性論에 대한 심 후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담산이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변절하지 않고 끝 까지 절조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마음공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 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채 인물의 도덕성을 부차적 문제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담산의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126.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滄洲 河憕(1563-1624)은 晉州 丹牧 사람으로 南冥 曺植의 문인 河魏寶의 다 섯째 아들로 태어나 삼촌인 河國寶의 아들로 입계한 인물이다. 하위보의 아우 河晉寶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으며 역시 南冥 曺植의 문인이 다. 하위보의 아들 河恒도 曺植의 문인이었고, 그 아들 河仁尙은 광해군 때 南 冥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를 주도한 인물이다. 게다가 河晉寶의 딸 이 鄭仁弘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니 집안 전체가 남명학파라 이를 만하다. 河憕이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曺植의 영향을 직접 받은 그의 문인들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曺植 문인들의 뜻을 받들 어 曺植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 을 제외하면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이는 來庵 鄭仁弘과 寒岡 鄭逑 및 崔 永慶·河沆·成汝信 등이며, 가깝게 지냈던 벗 李屹·吳長·鄭蘊·趙㻩 등과의 교제 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河憕은 1602년 이후 161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덕천서원의 여 러 건물을 중건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또한 1614년부터 1623년까지 덕천서원 원장을 하는 동안 1617년에 曺植의 󰡔학기유편󰡕을 덕천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622년에는 󰡔남명집󰡕 임술본을 간행하였으며, 1615년에는 고령에서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회를 주도하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이는 그 가 1600년대 초기부터 1624년까지 진주 지역 남명학파를 사실상 주도하였음 을 알게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인 홍을 만났다거나 의논했다거나 그의 의견을 들었다는 등의 일은 그의 문집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정인홍이 인조반정 때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약 300년 동안 신원되지 못하였던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쌍계창수의 출현도 정인홍 문인의 후예들이 정인홍의 흔적을 부정하려는 의 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서 세강계를 조직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쌍계창수」와 「신안어록」 등은 曺植에 대한 추숭 사업을 가장 충실히 해낸 河憕의 일생을 잘 드러내려 한 것임 에도, 河憕의 스승으로서 끝까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曺植을 추숭하려다 죽음 에까지 이른 정인홍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것이 다. 이것이 남명학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떳떳이 이를 드러내어 사실 을 바로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河憕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서 그를 대신하여 진주 지역에서 曺植을 추숭하는 일을 주도했으며, 이 가계의 노론화 도 기실 여기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128.
        2007.07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생애주기비용을 고려한 성능기반 최적 유지관리 전략 수립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교량 수명동안 비용과 성능이라는 상반되는 목적을 균형있게 만족시킬 수 있는 유지관리 시나리오의 생성을 다중목적 조합최적화 문제로 정식화하고 유전자알고리즘을 적용하였다. 개발된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국도 상 강거더 교량의 최적 유지관리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과정을 제시하였다. 개발된 시스템은 현재의 교량 유지관리 전략 수립의 방법을 개선하여 교량 관리주체에게 다양한 제약 및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최적의 교량 유지관리 시나리오를 제공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129.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130.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계 표연말(1449-1498)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교체되던 시기에 사림파의 입장에 선 김종직의 문인 중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인물로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만나 사림파의 올곧은 정신을 꺾지 않다가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남계의 생애는 왕조와 벼슬에 따라 효행을 실천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초년기, 과거에 출사하여 告身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출사와 좌절기, 예문 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를 거치면서 간관활동을 하던 출세기, 그리 고 연산조에 들어 대사간까지 올랐다가 사초로 유배되어 죽은 쇠퇴기 등 4기로 나누어진다. 남계의 교유는 김종직, 서거정, 유호인과의 교유 정도만이 보이는데 김종직과 서거정은 당대 훈구관료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립적인 관계였으나 남계 에게는 각별한 선생들이었다. 김종직은 늘 서릿발 같은 기상을 길러 엄정한 판 단을 할 것을 요구하였고 서거정은 그런 기상도 좋지만 백성을 포용하는 관대 함도 지니라고 하였다. 유호인은 함양을 동향으로 김종직의 문인 동료로, 또한 거의 비슷한 환로를 거친 절친한 사이로 고향, 사림, 조정에서 바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함께 힘썼던 師友이다. 남계의 학문과 문학은 남겨진 글이 시 9제 20수, 산문 4편 밖에 없어 제대로 알기 어려우나 학문관은 주자와 같이 마음을 높이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세한 일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마 음만을 강조한 육구연을 이단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성현과 같이 되려면 마음 보존을 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당대 사림파처럼의 주자일변도 학풍을 그대 로 따른 셈이다. 남계의 문학은 당대 신진사류가 지향하던 東國文明의 懷古, 禮俗敎化, 우국애 민, 절의와 강개 등을 아울렀다고 여겨지나 남은 작품이 적어 전모를 알 수 없 다. 그러나 문장 공부보다는 현실참여를 중시했으며, 글로 표현하는 일과 관계 없이 본래의 자질은 불변한다는 생각을 가졌음이 작품에 나타난다. 한편 만년 에 가서는 현실참여를 통한 정치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고향 자연 속에서의 깨 달음을 추구하려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남계를 비롯한 성종조 신진사류들은 훈구파에 대적할 만한 문학적 재능을 지 녔으되 이를 발휘하기 보다는 도학적 수양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를 중시하였 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도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위기를 두 려워하지 않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의 표본이 되었다.
        131.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庵 鄭栻의 은 1683(肅宗9)년에 普州 玉峯에서 태어났다. 字는 敬甫이고, 명암은 그 號이다. 明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仕宦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높은 학문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 역사상의 正統 으로 인정하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국가로 명나라를 생각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였 고, 어떻게 하면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를 섬멸하여 축출할까 하는 것이 일생의 話 頭였다 명암의 사상과 문학은 모두 이 화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號마저도 明庵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결한 정신자세는, 朝鮮의 伯夷叔齊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明庵은, 名利를 초탈하여 명나라의 회복과 청나라의 축출을 염원하면서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出處의 大節을 지켜 곧게 깨끗하게 艱苦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선비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였던 것이다. 伯夷叔齊이래로 이어져 온 선비의 節義사장이 이 시대상황에서 명암을 통해 體現 된 것이었다. 그의 시는 淸浮하고 肺腑한 서체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詩想이 다채롭고 진지하고, 표현의 기볍도 독창적이라 이전의 시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아주 逼眞하게 사물을 묘사하였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섬세하여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文藝的으로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 「矗石樓重修記」, 「義嚴碑記」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 있지만,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遊山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록은 산수문학의 典範으로서 韓國漢文學史에 등장시킬 가치가 있 다. 本考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척이 없였던 明庵 鄭栻의 의 생애와 그의 詩文學의 독특한 면모를 밝혀, 韓國漢文學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한다.
        132.
        2003.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의 목적은 사회간접자본의 대표적인 시설인 댐과 같이 기획, 조사, 타당성분석 단계에서부터 설계, 계약, 시공 및 유지관리단계까지 건설 생애주기가 긴 경우 Risk에 노출되는 시간 또한 길어져 건설기간 지연에 따른 비용증가는 물론 적기 미 준공시의 증액비용과 이용연기에 따른 편익손실로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킴으로 이들 문제점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생애주기 각 단계별로 경제성분석을 통한 공기와 비용을 연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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