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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magazine (Bulletin) of “Seikou” was made by conservation engineers to exchange information about the survey and repair work of historic buildings in Japan before World War II. This magazine has 26 volumes in total, and was published periodically four times a year from April 1937 to December 1943. Publisher is Nindokai that is supposed to the forerunner of Bunkenkyo (the Japanese Association for Conservation of Architectural Monuments). Only 3 or 4 organizations except personal possession have it now. And it has a limit to use the contents of the article as a general historical material. So, it was rare that experts and researcher used to the “Seikou”. However, this study focuses on the articles of the Korean historic building, which is sometimes appeared in it, although there are few.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fact-finding of the conservation for the Korean historic building in Japanese colonial period by analyzing the articles in historical records of “Sei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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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台窩 河必淸(1701~1758)의 삶과 시세계를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강우지역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 탄압을 받아 출사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청은 家學을 이어받아 문장과 行義로 출사하여 정치적 소신을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역적 한계와 당쟁의 폐단으로 정치적 꿈이 좌절되자, 그가 택한 길은 권력자에게 아부하기보다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후진을 가르쳐, 실제 문하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남명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지역 인사들은 물론, 霽山 金聖鐸과 忠窩 許錘처럼 이곳으로 유배 온 인사들과 긴밀한 교유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추구한 107제 146수에 이르는 시문학은 출사하여 태평성세를 이루어보려는 정치적 꿈을 노래하였고, 그 꿈이 좌절되자 자신의 지조를 지키면서 속세의 부귀영화에 초연한 삶을 살고자 하였으며, 이처럼 出과 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평소 자기수양에 따른 실천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요컨대,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와 하필청이 추구한 삶의 지향은 18세기 강우지역의 지성사적 측면에서 볼 때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imothy Richard(1845-1919), a Welsh missionary, acted as the spearhead of the missionaries in China who were interested in the reform of the late Qing society. Being sent by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he worked in the areas including North China and Shanghai from 1870 to 1916 and his works included relief, literature, education, and social reform as well as evangelism. Sublating the hagiographical writings on him published in the first decades following his death and the socialist historiography utterly criticizing him as the agent of imperialism from the other side, this study tries to take a look both at his missionary motivation for the reform of Chinese society and politics and at his problematic toleration of the imperialistic Western Powers that was implied in his suggestions. Richard was convinced that Western civilization was benefited from the discovery of “the workings of God in Nature.” Communicating with the highest Chinese officials like Zhang Zidong and Li Hongzhang of the Self-Strengthening Movement, which was started in the 1860s, he made an effort to provide the society with scientific education and reform ideas in many areas including agriculture, industry, commerce, transportation, education, and religious education. Serving as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Christian and General Knowledge among the Chinese (SDK/SDCGK) since 1891, he had a great opportunity to help the Chinese society with writing essays, translating books, publishing books and periodicals. Especially, his translation of History of Nineteenth Century and the periodical titled The Review of the Times edited by Young J. Allen were very popular among the Chinese intellectuals seeking the ways to reform Chinese society.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in terms of the ideology of reform, he did not agree on the overriding Chinese motto of reform, ‘zhong-ti-si-yong,’ which meant ‘the Chinese in mindset and the Western in technology.’ Rather, his idea started from the Western Civilization, not Chinese traditional value system. His suggestion was based on his conviction that Western civilization, comprising of the materialistic development based on natural sciences and ‘the true Christian civilization,’ was superior to Chinese civilization. Thus, his suggestion tends to be a universal reform including modernization, opening of the nation to foreign nations, improvement in commerce and international trades, Western education in sciences, and toleration of Christian education. Even though he did not deny the classical education coming from Chinese tradition and only did ask adding Western subjects to the current education, his respect for Chinese tradition rather came from missiological considerations and his reform ideas came from Western and Christian influences. Furthermore, at the base of Richard’s political activism was his evangelical conviction that made him a missionary to China. In addition to his evangelical faith, through his experiences in China, he developed a type of social gospel emphasizing the Kingdom of God seeking for the salvation of both ‘body’ and ‘soul’ and both ‘individuals’ and ‘nation.’ His effort of reform was at its peak at the 1898 Reform Movement, in which the young rising reformers like Kang Youwei and Liang Qichao co-operated with the Emperor Guangxu to drive forward more progressive reforms following after the Chinese’s defeat at the Sino-Japanese War (1894-1895). He was very influential to the top leaders of the movement in many directions. However, a series of foudroyant ideas that he suggested were not accepted or administered by the leaders and the Court. For example, he suggested 1) a protectorate by the Powers, 2) an annexation or union of China with Japan, the United States, and the British Empire at least in some areas including defence and diplomacy, and 3) a united cabinet with the same number of Chinese and foreign representatives. His ideas were shared by Chinese officials and, in fact, even some similar ideas were coined by Chinese themselves in the great crisis of the fall of the Empire in the encroachments by imperialist Western Powers. His ideas listed above, in spite of the consideration of the context, had implications of Western colonialism trespassing Chinese sovereignty. They especially show the lack of his understanding in the commercial expansion of the Western colonialists. However, despite this point, it does not seem that he was directly connected to the officials or colonialists of the Britain or other Western countries. His idea of protectorate, annexation, or united cabinet was foreign to the current British position in diplomacy. In conclusion, Richard’s reform idea, first, came from his revised evangelical faith including the idea of the Kingdom of God and missiological consideration seeking for cultural adaptation. second, he contributed to the late Qing reform movement in promoting the discourse of reform and educating the younger reformers. Third, his reform had limitations due to his own political and cultural identities as a British subject. He, in his imperialists-friendly suggestions, came to be in the line of supporting the Western colonialists and he never approached republican ideas, which some progressive Chinese already had in their mind by the end of the century.
        5.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중국의 17세기 말엽의 혁신적 사상가였던 顔元의 개혁사상을 학문 론과 교육론을 위주로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안원의 사상에 대한 그 러한 논의는 이후에 전개할 남명 사상과의 본격적인 비교 논의를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안원은 초기에 朱子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생명을 잃을 뻔한 실존 적 체험을 겪고 난 뒤에 품은 의문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행하게 된다. 이후 그는 주자학 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실제적인 공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들의 사유가 주자학적 인성론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서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개념을 공식화하 기에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의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실천 지향적 특성 은 이후 그의 사상이 후대에 나타나는 實學 사상의 한 선구적 존재가 되게끔 하 였다. 안원은 우주를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보고 인간도 본질적으로 선악을 벗 어난 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인간성을 자아실현의 진정한 도구로서 낙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이윽고 학문과 수양의 과정에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학문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길 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제시하는 三事와 三物, 특히 六藝의 학문을 習行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習行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현실적 과제나 구체적 사물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주자학 체계 가 지니는 개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과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이렇듯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중시하는 안원 사상의 특징은 格物致知 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그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 실제로 그 일을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서 그 행위의 대상이 곧 六藝라고 해 석한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행함으로써 그는 학문과 수양의 주체를 수동적 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경험 세계 속에서 대상 사물과의 동적인 관계를 맺는 주체적 자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안원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정한 목 적을 轉世之人,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데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이 론의 당연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안원의 사상적 탐구는 자아 수 양의 정신적 역량을 어떻게 하면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세계 형성을 위한 사 회정치적 힘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 향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안원의 사상을 그보다 앞선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 사상이었던 남명 조식의 사상과 비교의 관 점에서 논의해 보는 것은 남명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동아시 아 유학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6.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顔元元은 중국 명말청초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그는 야심찬 기백으로 2천여 년 동안의 학술 권위에 도전하고, 2천 년 동안 열지 못한 입을 열였고, 2천 년 동안 대지 못한 붓을 대였다. 그는 漢學과 宋明理學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周 公• 孔子의 正學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그는 ‘復古’의 깃발을 내세워 유학의 새로운 형태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退本開 新으로 특정지을 수 었다. 이런 사상을 근본으로 한 그의 사상척 특정을 좀더 구 체적으로 상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명말청초의 사상적 특징은 천하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유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하게 전개한 점인데, 안원에게서 그런 의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안원은 “성인의 책을 읽으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야 되어야지, 세상에 따라 바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적극적인 사회 개혁을 주창하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세상을 바꾸자는 사회개혁사 상이다. 둘째, 그의 사상에는 깊은 반성과 주체적 자각이 자리하고 있다. 안원은 이론을 내세울 때는 옳고 그른 점만 따져보고 같고 다른 점은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학술적 자각이다. 또 안원은 옳은 것이라면 비록 한두 사람의 견해일지라 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높은 학문척 주체의식이다. 이런 반성과 주체척 자각을 통해 안원은 송명이학은 물론 한학까지도 철저히 버판하였다. 셋째, 안원은 배워서 실제에 응용하는 것을 중시하여, 用을 본체로 삼고 用을 학문으로 삼았다. 그는 兵• 農• 錢· 穀 · 水· 火• 工· 盧를 體이면서 用으로 보아, 體와 用응 하나로 보았다. 그의 習行哲學은 이런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척 특징으로부터 명말청초 중국철학의 새로운 동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숭상하고 실행한 習行哲學은 外在的인 사회에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였고, 학문 안에서만 탐구할 수밖에 없었다.
        7.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