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서울을 폐허로 몰아넣는 파괴의 문(門)이 자 새로운 독립국가의 이상적 수도 서울을 다시 지어내 는 재탄생의 문이었다. 전후 30여 년간, 발전의 꿈과 의 욕에 부푼 계획가들은 저마다 새 서울의 골격을 구상하 고 만들어 나갔다. 이 연구는 ‘주체’와 ‘과정’에 주목하 여, 1950년대-1980년대 중반의 서울 도시계획과 개발 을 이상적 도시에 관한 상이한 목표와 방법을 추구했던 계획가들 간 충돌과 경쟁 과정이었음을 드러내고, 그들 간 힘겨루기 국면에 따라 도시계획과 개발 방향이 변화 를 거듭하며 전후 서울이 조성되었음을 그리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동안 현대 도시계획사가 계획안이나 제 도, 도시 개발상 등의 ‘결과’를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서 울 도시개발이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일관성을 갖지 못하는 흐름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 음에 주목하였다. 이로부터 ‘도시계획가’라는 특정한 집 단의 관점과 기준에 의하여, 그들과 다른 생각을 지니 고 활약하였던 다른 계획가들이 소외되어 있으며, 시기 구분과 인식 또한 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의되어 있 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라 토목기술자와 건축가라는 계획가들과 그들의 구상을 발굴, 복원하고, 그들의 참여 에 의하여 수도재건 논의가 시작되었던 1952년부터 확 장된 서울시역과 한강의 개발이 마무리되는 1986년까 지의 기간을 전후 서울의 틀이 구상되고 완성되는 중요 한 시기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를 계획가들의 갈등과 조정 양상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도 시계획 논의와 실행 과정, 도시변화를 고찰한 연구 결 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2-65년은 관 주도로 도시계획이 마련된 시기로 서, 일제강점기 기술관료 출신 토목기술자들과 대한국 토계획학회 중심 도시계획가들이 기성 도시계획의 영향 하에서 분산 위주의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 최경렬 등 토목기술자들은 일제 하 도시계획을 이어 받아, 평면적 인 용도 구분과 체계적인 공지 확보를 통한 저밀도의 도심 경관을 추구하였다. 또한 동서방향 간선축 중심 도시 확장 방식에 따라 교외 주택지를 조성하여 인구를 분산하고자 하였으며 경인 간 연속적 도시 형성을 추구 하였다. 한편 주원을 비롯한 도시계획가들은 이를 극복 하고자 하면서, 경제지리학에 기반하여 국토의 균형 개 발을 추구하고 동심원형 도시 확장 방식을 통하여 교외 주택지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상이한 두 도시계획 논리 는 1960년대 중반, 동심원형 도시구조를 기초로 하면서 도 부분적으로는 간선축 중심의 선형 도시구조를 강조 하는 방향으로 절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계획은 현실과의 괴리로 상당 부분 구상 차원에 머물렀다. 1966-74년은 도시계획이 관 외부 전문가들에 의하 여 제안되도록 민간 용역화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계 획가 그룹에 더해 김수근 등을 중심으로 한 전후 해외 유학파 건축가와 그 유파, 외국인 도시계획 자문가 등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여 기성 도시계획을 비판, 변화시 켜 나간 역동적 시기였다. 이들은 물리적 환경의 조작 을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도시설계’에 의하여, 부분적 실행으로부터 도시를 바꾸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들은 슬럼화된 도로용지 위에 복합적 도시기능을 고밀도로 담는 ‘메가스트럭처’를 제안하면서 기성 도시계획 체계를 변형하고 주변부에 불과했던 도심 동부에 새로운 중 심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형 도시구조로의 전환 을 위한 인프라를 구상하여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고속 도로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들은 교외에 주택지 건설 대신 직주근접의 고밀복합 ‘신도심’ 건설을 통하여 선형 도시구조로의 전환을 꾀하였으며, 이를 여의도 개발에 적용하였다. 1970년대 초, 국토종합개발계획 수립과 그 린벨트 설치로 도시계획가들의 동심원형 도시계획이 다 시 주도권을 가지면서 서울시는 영동 등지에 교외 주택 지 개발 중심의 신시가 건설을 전개하게 되었지만, 여 의도에서는 ‘고층 아파트 단지’라는 새 도심 주거 유형 이 출현하여 신도심화 지향이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 시기 건축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서울의 경관과 구조는 실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5-86년은 안보 위기에 대응한 도시개발 여건 제 한 속에서 상이한 구상을 지녔던 각 그룹의 입장이 조 정되고 서울 도시계획 방향이 전환되어 오늘날 서울 경 관과 구조의 틀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강북 인구 소산 책에 따라 단핵 동심원형 구조로부터의 탈피가 추구되 면서, 서울시는 해외 유학파 건축가 김형만이 새롭게 제시한 ‘3핵 도시’ 구상을 채택하게 된다. 그는 김수근 의 구상을 계승하면서 구도심, 영등포와 함께 영동의 도심화를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메가스트럭처, 고층 아파트 단지 등 신도심 조성을 위해 시도되었던 선례들 이 이식되어 직주근접의 고밀복합 도시를 신속하게 완 성하였다. 기성세대가 물러난 뒤, 최상철 등 새 인물들 이 중심이 된 도시계획가들은 기존 구상에서 구심성을 소거한 ‘다핵화’를 지향하면서, 해외 유학파 건축가들과 구상을 맞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동일한 자연 인식을 공유하면서 도시구조 재편의 일환으로 한강 정 비를 추진하였으며, 여기에 토목기술자들의 오랜 국토 개발 구상이 힘을 더하여 한강종합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부터 서울은 구도심과 오랜 동서방향 간선축 에서 탈피하여 한강을 중심으로 세 도심이 배치된 도시 구조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상의 전후 서울의 탄생 과정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이는 도시계획 주체를 민간화해 나가기 시작한 과정이었다. 관 주도의 일관된 질서에 의해 도 시가 조성되는 대신, 대규모로 확장된 도시의 각 부분 이 여러 주체들에 의해 다원적으로 구상되는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전후 서울 도시계획의 일관성 부재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 이다. 다음으로 이는 전후 문화적 세대교체 속에서 시 차를 두고 도입된 국제적 도시계획 이론들이 제3세계 도시 서울이라는 문맥 속에서 만나 새로운 형태의 도시 구상을 낳는 과정이었다. 이로부터 대형복합시설, 고층 아파트 단지, 3도심 체제, 한강 중심 공간구조 등 오늘 날 서울을 특징짓는 경관과 도시 구조가 자리 잡기 시 작하였다. 한편 이는 상부의 철학, 원칙, 신념 등으로부 터 도시 형태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하부의 물리적 시 설 조성 기술로부터 도시 발전 방향을 결정해 나갈 것 인지, 규범과 경험 간 대결 속에서 도시계획 방법을 찾 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때 중요한 성취는 ‘도시 계획(urban planning)’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도시 설계(urban design)’라는 건축가의 새 업역의 등장이었 다. 마지막으로, 이는 앞서 밝힌 변화들을 통해 도시계 획에 관한 오랜 관념을 딛고 기성 도시가 담지 못하는 전후의 새 정치·경제적 요구를 수용하여 도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와 같이 서울 도시계획이 다양한 입장을 지닌 여러 주체들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주체들 간 경쟁구도에서 비롯된 긴장을 내포하고 있음을 살핀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또한 이는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주체로 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건축가들의 구상을 고찰 하고, 전후 서울 경관과 구조 재편에 대한 그들의 기여 를 발굴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연구 는 전후 서울의 탄생 과정의 다양한 장면들을 두루 살 피지 못하고, 도시 경관과 구조 재편의 시선에서 중요 한 사건들을 추려 한정적으로 살폈다는 점에서 빈틈을 갖고 있다. 앞으로 이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계획가들 과 그들의 구상, 실천을 살펴, 오늘날의 크고 복잡한 서울을 만들어 낸 힘들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게 되기를 기대한다.
2000년 이상 전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흉노부터 13세기에 칭기스 칸이 창설한 몽골 제국, 그리고 손자 쿠빌라이 칸이 만든 세운 대원 올스(원조, 元朝)를 거쳐 오늘날까지 몽골 고원은 계속 유목사회였다 .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유명한 만리장성은 사실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의 지리적, 문화적 경계선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몽골 고원 즉 현재의 몽골과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를 대상지로 하여 유목문명에서 성장한 도시와 건축 및 장인에 대해 설명한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에서는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층은 30cm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아래는 모래층, 점토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토양층이 얕기 때문에 작은 구멍이라도 파면 풀로 굳어진 토양층이 노출되면서 바람에 날아가고 이듬 해에는 사막화된다. 즉,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지인 것이다. 이러한 초원지대의 지리적, 환경적인 조건에 적합한 방목이 생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가족의 50배, 혹은 100배 이상의 가축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 생산방식으로는 계속 한 곳에서 방목할 경우 환경에 미치는 부하가 커지기 때문에 장소를 옮겨가면서 생활하는 ‘유목’이라고 하는 생활 양식이 성립했다.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토지소유에 관한 결정적인 차이는 유목사회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이 없다는 것이다. 한 곳에서 일정기간 생활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활 양식에 맞게 이동할 수 있는 건물 게르(중국어로는 '몽고포(蒙古包)'라고 부른다)가 탄생해 수천년의 진화를 거쳐 현대에 계승되었고 계속해서 변용해가고 있다. 즉, 토지를 '공유'하는 사회시스템에 기반해 이동을 전제로 하는 방목에 의한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의 니즈로 인해 토지에 속박되지 않는 도시, 건축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목사회에는 전통적인 생산기술과 생활양식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 기술과 문화는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널리 보급, 응용되어 유목문명을 구성하고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농경문명이 해양문명이나 유목문명보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해양 문명이 각광을 받고, 최근에는 정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네트워크 사회가 형성되어 주거와 직장 모두 정해진 장소에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유목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토지에 속박되지 않고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내는 지혜는 현대사회에서도 유익하다. 또한 유목사회에서는 일상생활을 항상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지품을 최소화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므로 중국 내지, 일본과 한국처럼 근세 이후 장인에게 전문 도구가 계속 늘어나는 것과 달리 유목민의 장인은 어떻게 도구를 늘리지 않아도 제조를 할 수 있는지에 최선을 다했다. 동시에 13세기 이후에는 이동건축양식의 시스템화가 진행되었다.
This paper discusses Leon Battista Alberti’s vision of the paradigmatic city. In his De re aedificatoria, Alberti proposes how the architecture of both individual buildings and cities should be ordered and embellished. Borrowing ideas from the ancient writers on one hand, and reflecting on actual urban reality on the other, Alberti proposes an ideal city where the sacred and the secular come together in hierarchical harmony, beautified under the principle of ornament. In Book VIII, dealing with secular public works of architecture, he writes about the composition of a new humanist city that transcends actual reality. Ornament, a central idea of his aesthetics, supports his conception of the paradigmatic city.
If we take account of the ‘Architectural Tradition’ which aims a construction of better environment, we can see that this tradition has ended historically toward Utopia. And the concrete concepts of utopia mainly started on the Renaissance periods. The Utopias were described well in the literatures which contained particularly three representative utopian books in Renaissance period. The one was the most famous novel <Utopia, 1516> by Sir Thomas More and the other were <La citta del sole, 1602> by Tommaso Campanella and <The New Atlantis, 1624> by Francis Bacon. These novels expressed ideal commonwealths in which inhabitants exist under perfect conditions, ideally perfect places or state of things. The plans of utopia are complete projects of image, its goal is an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al improvement according to the eras. Their utopias mostly had characteristics as follows; their shape of islands were almost circle, their shape of cities were rectangularity or circle and attached importance to geometrical compositions, their structure of cities were self-sufficiency in closed spaces and their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were uniformity, simplicity and non-ornament. And thes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are urban and architectural traditions in communist countries. Also their utopian novels had not much explanations to daily lives of people like as birth, death, relative, mental conflict or authority, money, art. So their utopian novels were not practical and had inappropriate aspects.
도심지 빌딩에 의한 그림자가 대기경계층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위하여 위성자료 분석과 수치실험을 실시하였다. 연구에 사용된 위성은 한국다목적위성(KOMSAT-2)의 가시자료이며, 수치모형은 다중반사도 계산을 위한 반사도 계산모형과 지표면 열수지를 계산하기 위한 오레건주립대학교 경계층 모형의 2가지이다. 위성자료 분석에서 고층빌딩이 밀집한 지역은 그렇지 못한 지역에 비하여 반사도가 최대 17% 낮게 산정되었다. 이는 건물의 그림자가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반사도의 일변화는 태양고도에 따라 다르며, 정오에 가장 작은 값을 나타낸다. 건물 밀도가 높은 경우 지표면 온도가 43.5˚C까지 상승하는데 비하여 건물 밀도가 낮은 지역의 경우 지표면 온도는 37.4˚C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높은 빌딩에 따른 기계적 난류에 의하여 반사도에 의한 온도상승이 직접적으로 대기온도상승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본 논문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실천적 주제를 통해 점차 도시화되어가는 건축의 실험적 영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대표적인 랜드스케이프 건축가인 제임스 코너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실천적 주제와 크리스트퍼 지롯과 세바츠찬 바롯의 랜드스케이프 건축의 개념간의 매스릭스 분석을 통해 시간기반프로세스, 표면의 잠재적 영역성, 실천적 방법론 상상력의 주제들이 이미 어바니즘을 넘어 건축의 영역으로 충분히 들어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전반적 랜드스케이프 개념의 트레이싱 그리고 건축적 랜드스케이프 개념간의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매트릭스 밀도를 통해 보다 세부적인 주제별 특성들과 전략들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건축공간내 다양한 사건공간을 만들어 내는 현대건축의 주요한 공간특성을 구성하는 랜드스케이프의 전략은 외부공간으로 확대되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으로 연속되어 건축도시공간은 거대한 사건의 장소로 강화된다.
If we take account of the ‘Architectural Tradition’ which aims a construction of better environment, we can see that this tradition has ended historically toward Utopia. It is a continual trend from ancient Greece to contemporary epoch in each transitional periods and especially in the Renaissance Era. Utopia is an ideal commonwealth in which inhabitants exist under perfect conditions, ideally perfect places or state of things. The plans of utopia are complete projects of image, its goal is an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al improvement according to the eras. Its plans are characterized by rigid geometrical pattern as circle and square, which contain generally center․axis․symmetry․enclosure. Recent urban and architectural circumstances no longer reflect utopian visions. Since the latter of the 20th century, it appears dystopia on the contrary. Therefore, the utopian ideal city and architecture describes characteristics of the era unlike the continuity of its concept.
This paper presents a study on the Palazzo Firenze of B. Ammannati, designed between 1550~1572. He was active in Rome and Firenze in the middle of 16th Century. His most important project, such as Palazzo Pitti, is located in Firenze. But there are some projects that are important as well as Palazzo Pitti in Rome, such as villa Giulia and Palazzo Firenze. Usually, in the history of Western Architecture, the period in which Ammannati was active is denominated as late-Renaissance or Mannerism. In this period there was very important progress in field of artistic theory. There were active many great Masters such as Michelangelo, Vignola and Giulio Romano. But, over the all, the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 of this period was a transition period between Renaissance and Baroque. This paper try to reveal such characteristics reflected in architectural projects designed in this period, focusing on, over the all, B. Ammannati and his Palazzo Firenze project..
Tough Korean architecture and urban environment has been developed for almost 100 years, it still remains various kinds of problems. Many attempts was carried out by every new plan to reduce the problems, it result in requiring more investment than before. It means all the investment for the development has been inefficient and immature to protect economic problems compared with the developed country. For the reason of economic problems it must be studied in historical cases which influenced the economic impacts, before the proposal of index with the economic theory. Searching typical architecture or urban development that brought about economic impacts can be classified into 3 cases. First case is the impact that caused the economic growth, increase, boom like the Westminster & others and the american architectures after the economic crisis. Second case is the impacts that was the origin of decline, shrink in economic as the Palace of Versailles, the skyscrape buildings in america before the economic crisis. Third case is the impact that was the both role of increase and decline in economic as the modern architecture in industrial revolution which led to the national economic growth and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and as the american architecture that was the root of crisis and the revival in economic. From the case study, it is clear that architecture has relation with economics in various factors as mass production, labour, and another industries all over the history & the world. Now, architecture strongly needed not only to raise functional, cultural effect and value, but to predict and control the economic impacts with theory from further research of historical cases to policy and practise.
The urban form of Korean cities significantly changed in the late Chosun dynasty. The influence of commercial development was the main cause of these changes. Commerce became a important function of existing cities, and the new type of commercial towns emerged at the important spots of traffic routes. In both cases streets became dominant element of urban form. Mainly commercial buildings aggregated along the streets, and to obtain higher land use intensity shape of lots became narrow and deep. Koyang(高陽) shows the most significant example of this new type of lot and lot pattern. Approximately 30 narrow and deep type of lots lined on each side of street forming about 390 meters long linear commercial town. Similar examples were found at the outside of south gate of Suwon(水原), Nuwon(樓院), and Pangyo(板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