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샤록스 선교사에 대한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그의 선교활동과 사상의 변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참여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는 초기 이북지역의 선천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진행하면서 ‘정확한 의술이 곧 선교’라는 사상을 그의 의료선교에 적용 했다. 그의 선교 사상은 러·일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 의료선교를 멈추지 않고 진행하면서 의료선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갔 다. 하지만 그는 의료와 교육 선교를 함께 맡으면서 일제의 종교 교육 금지 정책에 갈등을 경험한다. 이는 선교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선교 사상과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는 어려움 을 겪으며 반일 감정을 보이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후 1918년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자극 했던 “민족자결론”등을 한국인에게 전하고 3·1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에게 부상당한 사진을 보내는 등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도움을 주면서 3·1 독립운동의 시작과 말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감시를 당하면서 무리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미국으로 귀국하여, 한 달여 만에 순직하게 된다.
소속감은 다음세대들의 삶의 만족감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 한 청소년이 자신의 교회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만족감 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청소년은 자연스럽게 교회이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청소년 사역에서의 소속감 향상과 관련된 사역은 교회이탈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우선순위의 사역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연구자는 청소년들의 교회 내 소속감을 향상시키는 사역으로 팬데믹 이후 증가하는 단기선교를 연구하였다. 단기선교가 믿음의 내면화와 소속감 향상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들을 보인다는 선행연구들 은 매우 고무적이다. 연구자는 단기선교의 방향이 소속감 향상을 위해 서는 그간의 ‘Doing’ 중심의 사역에서 ‘Being’ 중심의 사역으로 무게추 를 옮겨주는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Being’ 중심의 단기선교는 ‘개인 소속감’에 ‘상호 소속감’(mutuality of belonging)을 더해주어 소속감을 더 강화시켜 신앙정체성을 확립하고 청소년들의 지속적인 선교적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논문은 1988년 부커상 수상작인 피터 캐리의『오스카와 루신다』에 재현 된 영국의 선교활동에 나타난 호주 원주민의 식민화 정책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성공회 사제 오스카는 가난을 핑계로 시작한 도박에 중독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호주 파견을 자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주로 가는 『리바이어던』 호의 비싼 비용을 치르기 위해 도박을 지속한다. 호주에서도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루신다와 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유리 교회를 제작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심지어 오스카는 살인을 저지른다. 문제는 제프리스가 제국의 임무 완수를 위해 호주 원주민을 살육한 것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살인은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호주 원주민은 이러한 오스카를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로 숭배하고, 오스카는 그 호주 원주민에게 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작가 캐리는 유리 교회에 갇혀 죽게 함으로써 오스카 사제의 종교적 위선과 기만을 풍자한다. 이에 의해『오스카와 루신다』를 기독교와 더불어 영국 제국주의의 허위성과 폭력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본 연구는 대학이 해외봉사활동 프로그램(Overseas Volunteer Service Program)을 국제봉사학습(International Service-Learning) 교과과정의 하나로 도입하여 어떻게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 삼육대학 교의 사례를 통해 고찰한다. 기독교대학의 봉사학습 프로그램 강화는 기독교대학의 정체성과 선교지향적 특성을 강화시키는 것으로서 선행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봉사학습 교육과정의 발전역사, 봉사활동이 봉사자에게 미치는 긍정적 인 영향, 봉사학습에 대한 이론적 고찰, 그리고 해외봉사활동 운영과정 등을 기술한다. 대학의 ISL 프로그램 운영시스템은 크게 학교, 봉사관련 부서(사 회봉사단), 봉사활동 지도교수, 봉사활동 참여 학생 등 교육 주체들이 어떻게 역할분담과 협력을 통해 조직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삼육대 학의 ISL 운영시스템을 제시한다. 또한 봉사를 통해 봉사자와 수혜자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담보해줄 필수요소인 봉사팀 사전준비는 어떤 절차와 내용을 거쳐야 하는지 12단계 과정을 소개한다.
This thesis aims to Know the views of the religious reformers including Jan Hus, Martin Luther and Jean Calvin on missionary work, and to know if they actually partake in missionary activities themselves. How did their views on mission influence the way in which future generations conduct missionary work? To approach this theme, we must first establish a clear definition of what missionary work is. And lastly, according to Karl Hartenstein, missionary work is to participate in God’s mission, that is Missio Dei. The author of this paper is interested in the latter definition since this concept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the religious reformers. Jan Hus placed the authority of the Bible over the authority of the church. According to him, the missionary work is to reform the church, when it goes away from the truth of the Bible. According to Martin Luther, the missionary work is the salvation of the world by the promulgation of the Gospel: “only by the belief in Jesus Christ.” According to Jean Calvin, man’s salvation depends upon only God’s sovereignty. Therefore, only God can practice the missionary work by his sovereignty. Like Jan Hus, Luther made efforts to reform the church, when it went away from the truth of the Bible. Jean Calvin taught many theologians in Geneva and sent them to France and other European countries. The religious reformers exerted an important effect upon today’s church. They taught us what is the genuine meaning of missionary work and what must be the direction of today’s missionary work.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early state of modern architecture, specifically mission architecture,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Christianity, and for the goal it deals with the architectural activities of pioneer missionaries. Especially it is a piece in a series of those researches after on Graham Lee, and it is focused on the other representative missionary, R. M. Wilson, A. M. Sharrocks, and C. A. Clark. Although coming in the capacity of a medical doctor or an educator, they should play all kinds of roles, such as carpenters, educators, and officers. For this mission, even they didn't have a professional knowledge for construction, they should carried on to establish mission compounds, only with their experience and informations. In this process they needed to be assisted by Korean carpenters, surely. The architectures born by them-selves are designed with a unique eclectic style compounded with those of Korean traditional and occidental. That is to say, the pioneer missionaries made a profound influence to create a new tradition of modern architecture in Korea, which is called as Korean-occidental eclectic style in the period of transition. Moreover, some pioneer missionary, such as Sharrocks, took a part in education of architectural skills. The educated carpenters seemed to be called from outside, and the unique styles could get spread away. On this point this paper has the meaning to clarify historically the continuous development of the Korean architecture through the survey on their activities, on the contrary of the existed recognition that Korean modern architecture has been evaluated to be imported from outside; therefore having a crevice with the its own architectural tradition.
Since Korea disclaimed to open the ports, Korean architecture has met the impetuous transformation. Although there would be various factors of this transformation, the new-coming architecture by missionary seemed to be a significant one, and many researches have been carried out on this theme in diverse viewpoints. However, because these researches have preponderated on the Catholic tradition, it is deficient for clarify the whole history of mission architecture. Therefore, this research has the meaning to enrich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chitecture by making balance. First of all,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activities of one missionary, Graham Lee. He is a practical missionary at the beginning, his architecture made a critical influence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Graham Lee was born in Rock Island, Illinois, 1861, and he determined to become a missionary through grown up. He spent his boyhood by working as a plumber for his purpose and studied in a university afterward. Graduating of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he was nominated as a pioneer of Pyeng Yang Mission Station and set foot in Korea, September of 1892. Since then he started to erect missionary facilities in Pyeng Yang, such as Well House(1898), Pyeng Yang Central Church(1900-1901), Pyeng Yang Academy(1902). These all his works are designed with eclectic style which shows western and Korean traditional style intermingled. This unique characteristic made a profound influence to the Korean mission architecture afterwards. Especially, the L-type plan of Pyeng Yang Central Church, which is first shown by him, is recognized very unique, and this plan type had been spread all over the country. Therefore the L-type plan became the peculiar feature of the early Korean churches. Furthermore, working with Korean carpenters, he taught them new skills of modem buildings. After that, they were expanded out northern part of Korea and took the roles of master builders. According to this expansion, his particular style had got spread and had been settled as a unique eclectic style in Korean modern architecture. In the conclusion, he is evaluated to be a critical pioneer missionary, who left a big influence on the frame work of Korean modern architecture in the transitional times.
이 연구는 한국 도시산업선교운동의 선구자 조지송의 생애, 산업선교정 책, 그의 노동자선교 신학 사상을 고찰하고, 그의 활동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조지송은 보수 적 친미 반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한에 온 피난민이었다. 그는 산업전도 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 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발견했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 정책을 네 단계로 발전시켰다. 1 회사 사주와 협력하는 노동자 전도 2. 훈 련된 평신도를 통한 공장 전도 3.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선교 4. 소그룹 안에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주체성 회복을 통해 산업현실을 개혁하는 산업선교. 조지송은 노동자 기독론과 노동조합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변화된 노동자의 성숙한 인격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헌신성에서 희망 와 용기를 발견했다. 독재정권과 비윤리적 기업과 협조해서 산업선교를 탄 압하는 제도교회를 거짓교회로 보았다. WCC와 CCA는 한국의 도시산업선 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운동이 세계교회 와 인류 노동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광주 선교 스테이션은 의료활동을 통해서 복음의 접촉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열악한 위생상태와 질병을 통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특히 광주 선교스테이션의 한센병과 폐결핵환자에 대한 치료는 헌신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를 통하여 주님께 돌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환자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의사가 없는 지역에 순회진료를 했고, 그리고 농어촌 의료봉사, 보건예방교육 등을 통하여 국민건강 증진과 위생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의료활동은 광주지역을 넘어서 여수와 순천으로 그리고 남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치료와 회복 그리고 재활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회의 소중한 일원으로 살아가게 했고, 의료인재를 양성해서 장차 선교한국으로의 토대를 마련했다.
본 논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소였던 장시(market)가 구한 말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을 밝히고, 장시가 복음의 장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복음 전도지로서 “장터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5세 기 중엽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조선 전역에 확산된 서울 뿐 아니 라 지방 포구를 중심으로 상품 유통의 중요한 발달을 가져왔다. 장시는 조 선 사회의 경제적 활성화를 견인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물, 신문화의 전파 통로이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끄는 기능도 하였다. 초기 입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장시의 특성을 파악하고 복음 전파의 중 심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로스는 국제 무역 장시였던 만주의 ‘고려문’에서 조선의 상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국경 무역장 시인 의주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한국의 풍토와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장시를 방문하였고, 19세기 말에는 개항지의 확대와 더불 어 전국 장터에 속속들이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이처럼 장시는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민족과 만나 어우러져 숨쉬기 시작한 토대는 바로 조선 시대 소통의 장이었던 장시였던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impact of early Jae Jung Won’s works to the Korean society in early Korean mission era. Because Jae Jung Won founded by Korean government and American missionary. Allen was a first Western mordern hospital in Korea. Medical works had significant meanings on the Korean mission. Mordern medical works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 included the spirit of Christianity which was a mental ground of Western civilization and medicine. Because Korean government did not permit the freedom of Christian mission except medicine and education in early Korean mission era, Jae Jung Won had important role of Christian mission at that time. In fact, through the Western medical cure of Allen for Young-ik Min, a high official in the government in 1884, Korean government felt kindly toward American missionaries and Western medicine.
There are several meanings of the early Jae Jung Won’s works from the missionary point of view. First, due to the role of Jae Jung Won, images of Protestant in Korea get better. And the influence of Protestant became larger as time goes by. Secondly, Jae Jung Won had a role of ecumeical works through the cooperation of denominations and missionaries for Korean mission. Thirdly, foreign missionaries through activities of Jae Jung Won performed their functions most effectively at that time. Taking care of patients itself was to be a mission, and to introduce Christian love to the Koreans. Fourthly, another meaning of early Jae Jung Won’s works to the Korean society was to educate Christian talents to the Korean youth through the education of medicine. Fifthly, Jae Jung Won’s works in early era to the Korean society was to the gate of civilization for the Koreans like campaigns for enlightenment and hygiene.
Therefore Western mordern medical works with the center of Jae Jung Won from 1880’s to 1890’s were effective mission in Korea.